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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제24회 학술회의] 2011.10.26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 2011.10.27  조회: 6907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
국학원, 국회의원 회관서 ‘단기연호 병기사용 추진을 위한 학술회의


국민적 공감대 속에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통해 공식연호로 지정되었던 단기연호가 폐지된 지 올해로 50년이 되었다. 6 · 25사변의 폐허로 경제발전이 최우선 과제였던 당시 외교와 국제교류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폐지된 단기연호의 가치를 조명하고 대한민국의 자긍심과 중심철학의 표상으로서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학술적 논의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열렸다.


사단법인 국학원은 10월 26일 오후 1시 30분~6시까지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시민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기연호병기사용 추진을 위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재)한민족기념관이 공동 주최했으며 이종걸 국회의원, (주) 국학신문사, 한민족역사문화찾기추진위원회, 우리역사바로알기시면연대, 민족종신수호 협의회 등이 후원했다.


이날 단기연호 병기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한 이종걸 국회의원이 참석했고 김을동 국회의원이 축사를 보내 단기연호의 역사성과 당위성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여 그 중요성을 국민에게 올바르게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부총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기조발표와 함께 4개의 주제별 발표와 종합토론으로 이어졌다. 


박성수 명예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기조연설에서 “기년(紀年)은 그 나라의 나이를 표시한 것으로 역사가 오랜 나라에서는 아무리 왕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기년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나이는 2011년이 아니라 4344년이다. 나이를 모르는 치매 걸린 아버지처럼 놔두지 말고 연호를 되찾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단기연호 성립의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우리 역사가 단군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린 과정을 문헌사적으로 규명했다. 김 연구원은 “단군기년의식은 최소한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흥미로운 것은 19세기말~20세기 초 동북아 3국이 각자 인물을 내세워 기년의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의 단군기원, 중국의 황제기원, 일본의 천황기원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한말에 본격화된 외세가 간섭으로 인해 국가정체성이 자각되면서 단군기년의식은 중화적 역사의식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면서 위난기인 일제강점기에 단기연호로 자리잡았다.”고 결론지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임채우 교수(국학과)는 우리 역사 속에서 단군영정의 전승과 단기연호 확립을 중심으로 ‘해방 후 단군인식의 변화와 문제점’을 논했다. 임 교수는 “정부의 60년대 단기연호 폐지, 70년대 단군영정의 중복 승인, 그리고 80~90년대 단군성전이나 국조단군상 건립문제에서 불거진 종교성 시비, 최근 개천절을 국경일이 아닌 공휴일 차원으로 인식해 지정 요일제를 검토한 사례에서 해방 후 당연시 되던 국조 단군에 대한 존숭의식이 서구 중심의 근대화와 급격한 경제 개발 속에서 점점 협소해 졌다.”고 평가하며 “단군영정과 단기연호는 개별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국조 존숭이란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은 주제발표를 통해 단기연호와 임시정부의 연관성을 밝히고 “자주 독립과 통일된 한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오늘날, 단기연호 사용은 시대적 요청”임을 강조했다. 김 위원은 “임시정부에서 단기연호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개천절과 어천절 공식행사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독립운동가가 참석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단군사상을 보편적인 민족사상으로 인식했으며 강력한 민족통합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당시 단기연호를 손쉽게 폐지한 이유와 단기연호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반대 논리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단기연호의 탁월성을 조명하고 법제화 추진의 이론적 우월성을 확립하여 소통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양 교수는 “20세기 동서양의 문명충돌 결과, 동아시아가 합리적인 과학문명을 앞세운 서양 중심의 질서에 편입되었으며 단기연호 폐지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서양문물의 일방적인 수입이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 건국신화에 잠재된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관과 정치사상에 기초해 좀 더 발전되고 보편적인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문명사적 소명이 한국인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국학원은 지난 7월 말 ‘단기연호 함께 쓰기 범 국민서명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 47일 만에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현재 1,000만 서명운동을 새롭게 전개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단기연호 법제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주제발표

 


기년(紀年)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 이대로 좋은가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기조연설


국학원이 10월 26일 개최한 제24회 학술회의‘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82세 노구에도 열정을 다해 단기연호 복원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박 교수는 “기년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에서 “국호는 나라의 이름으로 강역(공간적 개념)을 표시하고 기년은 그 나라의 나이(시간적 개념)를 표시한다. 역사가 오랜 나라에서는 아무리 왕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기년이 있어야 한다. 세계에서 50여 개국이 독자연호를 사용한다.”고 했다.


박성수 교수는 “단기를 버린 처사는 남의 나라 연호를 써야만 했던 과거 일제식민지시대의 뼈저린 고통을 잊은 것이며 일제가 남기고 간 정신적 피해인 식민사관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제 『삼국유사』뿐 아니라 새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단기를 복원하는 것이 비과학적 처사가 아니다. 또한 개천절을 지내면서도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것은 큰 모순이다. 단기를 씀으로 모순을 씻어내자.”고 했다.


또한 박성수 교수는 “기원은 나라를 이룩한 첫 해를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서기만으로는 우리나라의 나이를 알 수 없고 우리가 누구란 것도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나이는 2011년이 아니라 4344년이다. 나이를 모르는 치매 걸린 아버지처럼 내버려 두지말자. 반드시 연호를 되찾아 고쳐드려야 우리가 불효자가 아니란 사실을 후세에 전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단기연호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정착되었나?
김동환 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


국학원이 지난 10월 26일 주최한 제24회 학술회의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사)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단기연호 성립의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우리 역사가 단군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인식이 뿌리 내린 과정을 문헌사적으로 규명했다.


김동환 연구원은 “단군기원은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점과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를 세운 최초의 통치자라는 의미가 어우러진 상징이 포함되었다. 단기연호의 배경이 되는 단군기년의식은 최소한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며 최초로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밝힌 일연의 『삼국유사』,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해를 ‘단군원년으로부터 3288년’으로 명시한 이승휴의『제왕운기』, 그리고 백문보의 『고려사』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또한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유학자이며 단군역사와 뗄 수 없는 행촌 이암과 그의 저서 『단군세기』를 소개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왕조가 세워지면서 자기 문화에 대한 자존심과 주체의식의 표상으로 단군인식이 등장한다. 단군기년의식은 16세기 사림의 모화사대의식으로 주춤하나 민중계승의 단군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며 단군을 동방에서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 동방의 시조로 주장한 조박, 변계량, 권근 등 유학자의 글과 단기연호에 대한 학설들을 통일한 『동국통감』각 단군의 치세연수와 치적을 기록한 북애노인의 『규원사화』등을 설명했다.


또한 김 연구원은 “흥미로운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동북아 3국이 각자 인물을 내세워 기년의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의 단군기원과 더불어 중국의 황제기원 일본의 천황기원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한말에 와서 외세의 본격적인 간섭으로 인해 국가정체성이 자각되면서 왕권국가차원의 연호가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끊이지 않고 이어온 단군기년의식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고 했다.


김동환 연구원은 “독자적인 연호를 표방한다는 것은 자신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받은 자주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이며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밝히는 행위이며, 반대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임에 동의하고 제후국의 지위를 수용한다는 뜻”이라며 “단기연호의 배경이 되는 단군기년의식의 역사적 전승은 우리에게 연면히 이어온 민족 정체성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중요한 근거이다. 규원사화 등에 실린 단군기년의식은 중화적 역사의식을 완전히 벗어난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의 꾸준한 지속 속에서 민족의 위난기인 한말 일제강점기에 단기연호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단군영정과 단기연호는 종교 아닌 국조존숭 차원에서 접근해야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국학과)는 10월 26일 국학원이 주최한 제24회 학술회의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단군영정과 단기연호를 중심으로 해방 후 단군인식의 변화와 문제점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임 교수는 “단군은 고대로부터 국조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본 강점기와 같은 혼란한 시대에는 민족을 지켜주는 위난극복의 구심점으로 작용했다.”며 60~70년대 단기연호와 표준 국조영정 제정 등에 대한 정부의 조치, 80~90년대 단군성전 및 국조단군상 건립 문제 및 최근 개천절 요일지정제 등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사회적 갈등을 통해 단군관의 변화에 대해 지적했다.


임채우 교수는 “『태백일사』에 서기 전 591년 불한세가 57대 아갑 임금이 ‘환웅과 치우와 단군 왕검 세 분의 상을 반포하여 관청에서 봉숭하게 했다.’는 것이 단군영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며 신라의 천재화가 솔거의 단군영정 제작과 고려 말 대학자 이규보가 “고개 밖 집집마다 명공의 작품으로 단군 상을 모셨다.”는 글을 소개했다.


단군영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거의 없다가 한말, 솔거가 그린 유일본이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께 전해져 1910년 국치일 전일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세상에 공개하였다. 대종교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정부는 1949년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종교 총본사의 단군상을 국조성상 표준본으로 공인하고 1976년 유일한 표준성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1977년 현정회의 단군영정을 공인함으로써 단군 표준영정은 두 가지가 되었으며 북한에서도 표준 단군영정을 지정 유포해 혼재된 상태이다.


대종교 영정과 현정회 영정의 가장 큰 차이는 대종교 단군영정에는 어깨와 허리에 초의목상(草衣木裳, 풀과 나무 옷)이 있다는 것이다. 종합토론시간 임채우 교수는 “쑥과 마늘을 형상화 한 것일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박성수 명예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은 “당시 주식으로 채식생활을 했으며, 풀은 약초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주제발표에서 임 교수는 “단군기원을 기록한 문헌으로 고려의 『삼국유사』『제왕운기』 조선의 『세종실록』『동국통감』등에서 각기 20년~50년의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은 연대를 종합 정리하여  서거정의 『동국통감』(1485년)에서 단군의 개국년을 당요 25년 무진년(서기전 2333년)으로 확정하여 서술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임채우 교수는 “1985년 서울시가 자라나는 세대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단군성전 건립계획, 1987년 국사교과서의 단군 기술문제에 일부 기독교계가 반대운동에 부딪혔다. 또한 1999년 시민운동단체인 홍익문화연합이 주축이 되어 전국에 건립한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급진적 원리주의 종교인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개천절을 어린이날, 현충일과 함께 요일지정제로 검토하면서 국경일이 아닌 공휴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는 “해방 후 당연시 되던 국조 단군에 대한 존숭의식이 서구 중심의 근대화화 급격한 경제 개발 속에서 점점 협소해졌다.”고 지적하며 “단군영정, 단기연호 문제는 개별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국조 존숭이란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조에 대한 인식이 왜곡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된 한민족국가 지향하는 오늘날 단기연호 사용은 시대적 요청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


국학원이 주최한 제24회 학술회의 “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10월 26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은 우리 역사상 독자적 연호사용과 한말과 임시정부의 단기연호 사용, 개천절 어천절 경축행사 기록 등을 예시로 단기연호와 임시정부의 연관성을 밝혔다.


김 위원은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졌으며 그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조선시기 유교적 명분론으로 명청의 연호를 추종하면서 역사의 중심이 아닌 주변국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임시정부서 단기연호 광범위하게 사용
개천절 어천절 공식행사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독립운동가 참석해


그는 “한말 위기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단군을 기년으로 하자.’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된 이후 단기연호는 각종 독립선언서에 사용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반영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연호를 채택했지만 공식문서 외에 개인이나 단체 문서에는 단기연호가 오히려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임시정부 첫해부터 개천절과 어천절 공식 경축식을 개최해 종교와 무관하게 300~400여 명의 많은 독립운동가가 참석했다.”며 “독립운동가들은 단군사상을 보편적인 민족사상으로 인식했으며 강력한 민족통합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병기 위원은 “해방 후 단기연호는 새롭게 부활하여 제헌국회에서부터 공식연호가 되었으나 5?16 군사정권 시절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서기연호를 공식사용하면서 자주독립과 통일된 한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오늘날 단기연호의 사용은 이제 시대적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 전문위원은 “단기연호의 부활은 국수주의로의 회기가 아니라 민족혼의 부활이며 우리 민족 자긍심의 회복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손쉽게 단기연호를 폐지했나?
양승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10월 26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국학원 주최 단기연호 학술회의에서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왜 단기연호를 손쉽게 폐지했는지”를 밝혀 단기연호에 대한 사회적 다수의 무관심과 반대의 정신적 원천을 파악했다. 단기연호 반대논리를 분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단기연호 법제화의 이론적 우월성을 확립하여 소통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양승태 교수는 “서양은 연호라는 개념이 없다. 역사를 예수탄생 전 후로 나누면서 ‘기독교적인 질서가 절대적 질서이며 서양문명은 문명자체“라는 오만한 관념이 십자군 운동과 19세기 제국주의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편전쟁 후 150년 간 동서양 문명의 충돌결과, 왕권과 봉건주의의 폐해 속에 있던 동아시아의 시공간 질서는 합리적인 과학문명을 앞세운 서양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단기연호 폐지는 서양 중심의 의식을 보편화시키는 작업의 하나였다.”고 전제했다.


다른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시키는데 포기해선 안 될 것이 ‘모국어와 역사의식’
한말 선각자들이 역사의식을 높이는 노력의 핵심에 ‘단기연호 사용’이 있었다


그는 “문명 접촉 시 다른 문명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고립되면 스스로의 문명을 퇴화, 소멸시킨다. 다른 문명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서 스스로의 문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코 포기해서 안 되는 것이 모국어와 역사의식이다. 박은식 주시경 신채호 안재호 정인보 등 선각자들이 모국어와 역사의식을 높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역사의식을 높이는 노력의 핵심에 ‘단기연호’의 사용이 있다. 그러한 노력이 나철 선생의 대종교 운동과 결합해 일본강점기 이미 종교의 차이를 떠나 단기연호 사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건국 후 어렵지 않게 단기연호의 법제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민족주의 의식 투철했던 박 대통령이 단기연호를 시대착오적 산물로 간주한 것은 아이러니


양승태 교수는 “근대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함께 나름의 민족주의 의식도 투철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단기연호 주창자들과 역사의식은 공유하면서 그 상징인 단기연호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폐지한 것은 아이러니”라며 “이는 역사의식의 부족 때문이며, 연호의 본질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양 교수는 단기연호 법제화의 당위적 근거를 제시했다. “단기연호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고조선의 존재는 지금까지 고대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신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인데, 단군신화는 국가의 기원과 더불어 근본적인 통치이념, 구체적인 통치체제까지 언급한 세계 어디에도 없는 탁월한 건국신화이다. 국가와 민족의 신화적 시원에서 출발하는 연호는 세계적으로 단기연호 밖에 없다. 단기연호는 참으로 절묘하고 심원한 역사의식의 표상”이라고 발표했다.


양승태 교수는 끝으로 “이제는 서양문물의 일방적 수입이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 건국신화에 잠재된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관과 정치사상에 기초해 좀 더 발전되고 보편적인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이 이 시대 한국인에게 부여되어 있다. 단기연호의 연호로서의 탁월성을 밝히고 법제화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부여된 소명의 상징이자, 소명의 실현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했다.


양 교수는 “단기연호 복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이론적 우월성을 확립하고, 서명운동과 같은 사회적 확산을 하여 정치적 힘을 얻어 법제화를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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