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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제 29회 학술회의] 2013.10.01 국학원 개천문화 학술회의 2013.10.04  조회: 6451

단기 4346년 개천절 기념

[제 29회사단법인 국학원 정기학술회의]

국학원 개천문화 학술회의

- 한민족 우수성 중심으로 -

 

 

1. 목적

개천절은 모든 국경일 가운데 으뜸이 되어야 할 날이다. 우리 계례의 뿌리를 마음에 되새기는 날이다. 국경일 가운데 최고의 경축일 개천절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개천문화는 계례의 뿌리를 말하는 것으로 뿌리를 잘 지킴으로서 우리 계례를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뿌리가 없는 나무가 없듯이 우리도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알고 나서 새로운 것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개천문화는 단순히 우리것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풍요로운 삶, 보다 나은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문화이다.

이제 진정한 개천문화를 알려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주체성과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민족 고유의 정신을 심어 자긍심과 민족혼이 살아나게 하고 웅혼한 기상를 되살리고 개천문화의 이론적 근거를 구축하기 위하여 학술회의를 개최하고자 한다.

 

 

학술회의 일정 및 프로그램

1) 일정

▶ 일 시 : 2013년 10월 01일(화요일) 오후1시 30분 ~ 오후 6시

▶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1층 강당(본관)-( 전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 )

▶ 주 최 : (사)국학원, 전국민족단체협의회

▶ 후 원 : 코리안스피릿, 국학운동시민연합

 

2) 프로그램

▶ 대주제 : 국학원 개천문화 학술회의 (한민족 우수성 중심으로)

제 1 주제 우리말 동서언어의 뿌리다

발표 강상원박사

제 2 주제 일본말의 뿌리는 우리말이다

발표 김세택 [전일본 총영사]

제 3 주제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도

발표 반재원소장 [훈민정음 연구소장]

제 4 주제 위대한 우리민족

발표 손성태교수 [배재대학교]

 

 

 

우리말 동서언어의 뿌리다

강 상 원

 

 

 

 

일본말의 뿌리는 우리말이다

 

김 세 택 [전일본 총영사]

 

Ⅰ. 한국어의 일본어화

Ⅱ. 음운 대응의 법칙

Ⅲ. 한자의 훈독과 음운대응

 

 한국과 일본은 정말 가깝다. 그래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거리에 있다고 한다. 부산 영도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쓰시마섬(對馬島)과의 거리는 겨우 50여 km에 불과하다.

 일본의 고대사는 조몬시대(繩文時代), 야요이시대(?生時代), 고분시대(古墳時代),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나라시대(奈良時代)로 이어지는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의 한국인과 관련이 없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를 포함한 일본 지식인들은 한반도 한국인들의 일본으로의 이주(移住: 일본측에서 보면 도래)를 최소화시키거나 있어도 아주 미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만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전통을 세우고 외부와의 접촉 없이 오로지 일본인만의 순수혈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근래 들어서, 한반도에서의 도래를 어느 정도 수긍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한국인이 아닌 대륙인’이 도래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한다. 그러한 주장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 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황국사관(皇國史觀)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한국인의 도래’를 무실화(無實化)하려는 의도가 더 간교하게 음성적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여러 정황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일본의 학자 대부분은 지금도 야마토(大和) 정권이 신라를 정벌해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한반도에 설치하여 오랫동안 지배하였으며 특히 백제를 속국으로 지배했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한반도지배설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후에 그들이 의도한 대로 대(對)한반도 종주국사관(宗主國史觀)으로까지 확립되어 일본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한 역사관은 후에 도요도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구한말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에 의한 한일병합(韓日倂合)을 정당화시키는 역사적인근거로 삼았으며, 급기야는 한반도 나아가 만주까지도 일본의 식민지하에 둠으로써 그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영토적 야욕을 일시적이나마 충족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천 수백 년에 걸친 주장을 그대로 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저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에도 나오듯이 한반도에서 정치적인 격변이 있을 때마다 한인(韓人), 특히 백제인들은 집단적으로 일본 열도로 이주해 갔다. 5세기 초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한 수십차례의 전쟁으로 전화(戰禍)에 시달린 백제의 지식층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야마토 정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야마토 정권 자체를 세웠다는 설도 한국 측에서 제기되고 있음)하였고, 7세기 중엽에는 백제의 멸망으로 왕족을 포함한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망명하여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정하고(삼국사기에 의하면 670년), 나라시대의 기틀을 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 천황들이 백제촌(百濟村)이 많은 야마토 지역의 백제강(百濟川) 부근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백제음악(百濟樂)을 즐겼으며, 천황의 시신을 모시는 안치소 이름까지도 백제대빈(百濟大殯)이라고 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와 야마토 정권 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백제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이메이(?明)천황이 ‘본방(本邦, 즉 本國)이 망하여 의지할 곳도 말할 곳도 없다’고 통곡했다는 것이나, 이미 항복한 백제를 구하기 위해 멀리 츠쿠시(筑紫. 규슈의 다른 이름)에 가서 객사하면서까지 부흥군 파견을 독려하고 준비했다는 기록 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결국 구원군 27,000명을 파병했으나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제가 영원히 멸망하자(663년) 야마토 조정의 국인(國人:신하)들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조상의 묘소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절규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의 정황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음인지 일본 천황이 근래 드디어 침묵을 깼다. 1984년에 히로히토(裕仁) 전 천황이 ‘지난 6~7세기 고대국가 형성 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였고, 2001년 12월에는 아키히토(明仁) 현 천황이 ‘천황가에 백제의 혈통이 섞여 있으며 자신의 선조인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손녀였다’고 힘들게 밝혔다. 한국인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짧은 언급이었지만, 어떤 일본 지도자나 지식인보다 훨씬 앞선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왕으로서 할 수 있는 견해를 소신있게 밝힌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고대의 한국 특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앞에서 대략 언급한 것처럼 보통 관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관계였다면 그때 사용했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된다. 이웃나라끼리의 언어는 같거나 닮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래서 언어학에서도 같은 지역 안의 언어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하여 같은 어족(語族)에 속한다고 한다. 유럽언어를 보면 같은 유럽이라도 북부지방은 비슷한 말을 쓰는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이 한 묶음이 되어 게르만 언어(Germanic) 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남부에서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루마니아가 역시 한 묶음이 되어 이탈리아 언어(Italic)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과 일본은 고대에 가깝게 접촉하면서 한 묶음이 되어 역사를 엮어왔음은 번한 것이므로 서로 같은 언어를 썼거나 적어도 유사해야 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그렇게 긴밀한 양 국의 관계였는데도 양 언어 간의 관계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이 알타이(Altai) 어계(語系)를 주장하는 것 외에는, 대체로 양 언어가 각자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무관설(無關說)이나 독자설(獨自說)에 따르면, 양 언어의 형태나 구문(構文)에서는 유사성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고유어에서 같은 어족에 속한다고 할 만큼 유사어가 충분치 않으므로 동계어(同系語)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필자가 양 언어 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한 유사어를 찾아보자는 호기심이나 언어학상의 어족연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양국 간의 역사적 진실을 캐고 이를 토대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미래의 역사를 올바르게 설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인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어가 자연의 이치대로라면 또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들이 보여주는 대로라면 오늘날의 일본어에 남아 있어야 한다, 아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동안 ‘사전편’의 표제어들을 모아 한국어와 ‘이음’ 관계를 탐색해 왔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친족 관계’ 탐색 방법론을 통해서는 규명될 수 없다. 양 언어가 북방어족에 속하느냐 아니면 남방어족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별도로 한국어와 일본어는 둘만의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양 언어가 알타이어에 속할 개연성이 있다는 견해를 보면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물론, 이에 동조하는 한국 학자들도 양 언어는 수천 년 전에 알타이어족의 조어(祖語)에서 분화되어 제각각 아주 오랜 세월의 분화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조어를 재구(再構)할 수 없을 만큼 양 언어 간의 유사성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가 아직까지도 정립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이러한 분화설이 양 언어 간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단절시켜 소위 무관설 내지 독립성을 배태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5, 6천 년 전에 또는 야요이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3세기경에 공통조어(共通祖語)에서 분리되거나 분화된 그런 관계는 아니라고 본다. 고대의 한국과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의 특별한 관계는 언어적 측면에서도 특별한 관계성을 형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멸망은 신생국 일본으로 하여금 백제어의 일본화를 촉진시켰으며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백제어와 고구려어의 신라어화(新羅語化)가 한층 가속화되어 양 언어 간의 표면적 이질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일본어의 기원이 알타이어에 속할 개연성이 있다고 해도 그 가설을 밝히기 위해서는 알타이어족에 직접 접근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한국어에서 공통요소를 찾은 다음에 그것을 몽골어나 퉁구스어에 대입(代入)해 보거나 비교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어는 특별한 배경 하에 한국어에서 변형된 언어이므로 단독으로는 도저히 조어(祖語)에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에서 언어 간의 관계를 밝히는 데에는 음운 대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한일 양 언어 간의 이음 관계가 우연이나 자의적(恣意的)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음운 대응의 법칙’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표제어와 그에 대응하는 한국어가 서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Ⅰ. 한국어의 일본어화

말과 글은 한 몸이다. 글이 없을 때 구전(口傳)으로만 내려오는 말은 상당 기간 본래의 모습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글(文字)’이 등장하면 ‘말’은 ‘글대로’ 변하기 마련이다.

가나(?名)가 창제되기 전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한국어인 백제어가 지배적인 언어로 사용되어 왔을 것임을 앞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음절문자(音節文字)인 가나가 8세기경 등장하면서 그때까지 쓰였던 한국어는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된다. 그것은 몇백 년 후 한반도에서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그때까지 쓰였던 조선어가 큰 변화를 겪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로가 다른 글(文字)이 나오면서 두 언어는 각각 두드러진 이질화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가나의 등장과 더불어 일어난 양 언어 간의 변화의 흐름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가나는 음절문자로서 초성(初聲), 중성(中聲)만 있고 받침(終聲)은 없는 문자이다. 그러므로 받침이 있는 한국어를 표기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받침을 아예 없애거나 아니면 받침을 따로 떼어내서 음절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예컨대 물가에 쌓는 ‘둑(津)’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받침 그을 없애서 ‘두’로 하든지 아니면 ㄱ을 떼어 별도의 음절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 (둑: 두가, 두고). 그 때 일본어는 전자를 택하여 받침 ㄱ을 없애고 ‘둑’을 つ로 표기했다. 또한 ‘벌(原·蜂)’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ㄹ받침을 없애서 ‘버-바-は’로 하든지 아니면 ㄹ을 떼어내어 별도의 음절을 만들어야 한다. 벌(原)은 ‘바라-はら’로 표기하고 ‘벌(蜂)’은 따로 ‘바지-はち’로 표기했다. 이와 같이 가나의 등장으로 인해 종래 받침이 있던 한국말은 큰 변화를 일으켜 일본어화되었다.

2. 가나로는 한국어 자음 ㅈ, ㅊ을 표기할 수 없다. 종래 ㅈ, ㅊ으로 시작되는 한국어는 さ행 또는 た행으로 표기되면서 일본어화되었다. 예컨대 ‘자잘(細)하다’의 방언인 ‘잘잘하다’는 한국어 ささら로 표기(앞의 ‘잘’은 ㄹ이 탈락되어 さ가 되고 뒤의 ‘잘’은 받침 ㄹ이 분절되어さら가 됨)되고, 추운 것을 뜻하는 ‘참(寒)’은 さむい로 표기된다.

3. 한국어의 ㄹ이 탈락되거나 또는 さ행, た행으로 분절되면서 다양한 일본어로 탈바꿈하였다.

①‘구름(雲)’이 ‘구루모-くも’ ‘가려워(痒)’가 ‘가여워-かゆい’, 파도를 뜻하는 ‘너울음(波)’이 ‘나루미-なみ’로 변한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津波(つなみ)는 한국어 ‘둑(津)’과 ‘너울음(波)’의 합성어이다.

②‘말(言)’이 ‘申(も)し’, 풀을 뜻하는 ‘꼴(초)’이 ‘골-굴-くさ’, ‘별(星)‘이 ’볼-보시-ほし‘로 변한다.

③‘꼴(型·形)’이 ‘갈-가다-かた’, 여럿을 뜻하는 ‘들(達)’이 ‘달-たち’, ‘벌(蜂)‘이 ’발-바찌-はち‘로 변한다.

고유 한국어의 ㄹ받침이 고유 일본어에서 さ행 도는 た행으로 분절되어 발음되는 것은 한국어에서 ㄹ받침을 갖는 한자어가 일본어에서 つ 또는 ち로 분절되어 음독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은 흥미롭다.

예컨대 발달(發達)은 はつたつ, 결실(結實)은 けつじつ, 길(吉)은きち 또는 きつ로 음독된다. 또한 한국어의 한자어 받침 ㅇ, ㅂ은 일본어 한자어에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묵음된다. 예컨대 농업(農業)은 のらぎよら, 공업(工業)은 こらぎよら, 합성법(合性法)은 ごらほらせい로 음독된다.

4. 모음 ㅓ와 ㅡ의 소멸은 한국어가 일본어화 하는 과정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할 수 있다. 예컨대 ‘법을 어겨서’에서 ‘어겨서’를 한국어 발음대로 가나 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어겨서’를 가나에 맞게 변음시켜야 한다. ‘어겨서’라고 동사화했기 때문에 ‘서’를 일단 す로 변음시켰지만 ‘어겨’에 대한 가나는 여러 가지 조합해서 표기할 수 있다. 아가, 아기, 아구, 아게, 아고의 5가지 조합과 이가, 이기, 이게, 이고, …오가, 오기, 고구, 오게, 오고 등 무려 25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이러한 조합은 원칙이 없으며 순전히 자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조합 중 ‘어겨서’와 대응되는 가나로 おかす(犯す·侵す·冒す)가 선택된 셈이다. 한국어 자체도 오늘날 문법 기준으로 하나의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일상회화에서 일일이 모음표기를 분명하게 발음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상대를 뜻하는 ‘너’를 ‘니’로 발음하고 ‘먹어라’를 ‘묵어라’로 발음하며 ‘할꺼냐’가 ‘헐꺼니’, ‘그것’이 ‘고거’, ‘저놈’이 ‘지놈’, ‘마을’이 ‘모을’, ‘하다’의 명령형을 ‘하라’, ‘해라’, ‘허라’, ‘히라’로 발음하는 등 일상회화에서의 모음 변화는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현대에도 이럴진대 문법과 글자가 없었던 옛날에 여러 가지 사정과 사람, 지역에 따라 한국어의 모음이 다르게 발음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다양한 모음 발음은 한국어의 일본어화 과정에서 가나화하는데 더욱 다양한 모음 변화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은 음운 대응의 법칙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일본어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태는 한국어이므로 언어학에서 말하는 ‘의미자질(意味資質)’, 즉 언어의 속성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일본어 書(か)く와 한국어 ‘쓰다’는 음운대응의 법칙에 따라서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쓰다’라는 말의 의미자질인 속성에는 ‘긁다’라는 자질이 있다. 한국어에서는 글을 쓰는 것을 나타내는 속어로 ‘몇 자 긁었다’라고도 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의미자질로 일본어 書(か)く는 한국어 ‘굵어-かく’로 이어질 수 있다. 描く, ?く도 かく로 훈독하는데 고대에는 대체로 글이나 그림을 갑골이나 벽, 암석에 뾰족한 것으로 긁어서 그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어는 ‘글’이나 ‘그림’도 ‘긁다’에서 유래했다.

‘돈’도 그 의미자질로 보아서는 ‘돈다’라는 기능적 자질과 ‘갖는다’라는 소유적 자질이 있다. ‘갖는다’라는 자질에서 ‘갇네-かね’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연결된다.

6. 본래의 한국어에 접두어, 접미어가 붙어 일본어화되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일본어화되었지만 그 접두어, 접미어를 떼면 두 언어는 다시 이어진다.

①접두어 : 暖(あたた)かい, 溫(あたた)かい에서 접두어 あ를 떼면 たたかい인데 이것은 한국어 ‘따가워’에서 ‘다다거워-たたかい’로 이어지고, 熱(あつ)い, 署(あつ)い에서 あ를 떼면 つい인데 이것은 한국어 ‘더워’에서 ‘두어-두이-つい’로 이어진다.

②접미어 : 船(ふね)에서 ね를 떼면 ふ인데 이것은 한국어 ‘배’에서 ‘배-부-ふ’로 이어지고, 峰(みね), 嶺(みね)는 ね를 떼면 み인데 이것은 한국어 ‘뫼’에서 ‘매-み’로 이어진다.

7. 일상회화에서의 한국어 동사 어미는 그대로 일본어 동사 어미가 되었다. 예컨대 그렇게 했다우에서 ‘우’, 그렇게 했구에서 ‘구’, 그렇게 했수에서 ‘수’, 의문형인 그렇게 했쑤에서 ‘쑤’, 그렇게 밟아-발바-발부에서 ‘부’, 그렇게 했음-해슴-해수무에서 ‘무’, 그렇게 하거라-하가루에서 ‘루’와 같이 한국어 어미 동사는 그대로 일본어화되어 일본어 동사의 어미로 되었다. あう의 う, かく의 く, おこす의 す, たつ의 つ, あそぶ의 ぶ, のぞむ의 む, かける의 る는 한국어의 어미 동사 우, 구, 수, 쑤, 부, 무, 라-루와 그대로 대응된다.

지금은 한국어문법이 체계화되어 동사의 기본형을 ‘다’의 어미를 갖는 것으로 문법화되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일상회화에서는 앞에 언급한 어미, 그 중에도 명령형의 라-루, 연용형의 수, 구, 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그대로 일본어에도 동사 어미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일본어 동사 어미는 그 어느 나라 어미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다’로 끝나는 한국어 동사 어미가 활용된 형태를 기본형으로 해서 다시 활용된 것이 일본 동사의 어미 활용이라고 볼 수 있다.

Ⅱ. 음운 대응의 법칙

고유 한국어(이하 한국어라 함)와 고유 일본어(和語, 이하 일본어라 함)는 다음과 같은 음운대응 또는 변화의 법칙에 따라 서로 이어진다.

1. 한국어의 초성이 같은 음가를 나타내는 오십음도(五十音圖) 각 행의 일본어와 이어지는 경우

ㄱ(ㄲ), ㄴ, ㄷ(ㄸ·ㅌ), ㅁ, ㅂ(ㅃ·ㅍ·ㅎ), ㅅ(ㅆ·ㅈ·ㅊ), ㅇ을 초성으로 하는 한국어가 か행, な행, た행, ま행, は행, さ행, あ행의 일본어와 이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가. 초성 ㄱ(ㄲ)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갈아라’, ‘깎고’, ‘긁고’, ‘걸어라’ 등은 일본어에서 ㄱ 음가를 가진 か행의 ‘かえる’(?える·代える·換える·替える), ‘かく’(書く·描く·?く), ‘かける’(掛ける·架ける·懸ける·賭ける) 등과 이어진다.

나. 초성 ㄴ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남겨서’, ‘노려’, ‘누워라’ 등은 일본어에서 ㄴ음가를 가진 な행의 ‘のこす’(殘す·遺す), ‘ねらう(狙う)’, ‘ねる’(寢る·寐る) 등과 이어진다.

다. 초성 ㄷ(ㄸ·ㅌ)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다투고’, ‘떼고’, ‘태우고’ 등은 일본어에서 ㄷ(ㄸ·ㅌ) 음가를 가진 た행의 ‘たたかう’(戰う, 鬪う), ‘たく’(焚く·炊く) 등과 이어진다.

라. 초성 ㅁ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맡겨서’, ‘말고’, ‘메(밥)’ 등은 일본어에서 ㅁ음가를 가진 ま행의 ‘まかす’(委す, 任す), ‘まく’(卷く·捲く), ‘めし’(飯) 등과 이어진다.

마. 초성 ㅂ(ㅃ·ㅍ·ㅎ)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벗겨서’, ‘팔딱팔딱’, ‘빼거라’, ‘헐어버려’ 등은 일본어에서 ㅂ(ㅃ·ㅍ·ㅎ) 음가를 가진 は행의 ‘はがす(剝がす)’, ‘ばたばた’, ‘はくる’, びるびる(滅はろ·亡びる) 등과 이어진다.

바. 초성 ㅅ(ㅆ·ㅈ·ㅊ)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섬’, ‘쏟고’, ‘쏘아’, ‘쪼고’, ‘찢고’, ‘찾고서’ 등은 일본어에서 ㅅ(ㅆ·ㅈ·ㅊ) 음가를 가진 さ행의 ‘しま’(島), ‘さす’(注す·点す·射す·刺す·差す), ‘さく’(裂く·割く), ‘さかす’(探す·搜す) 등과 이어진다.

사. 초성 ㅇ으로 시작되는 한국어

‘열거라’, ‘알려서’, ‘어겨서’ 등은 일본어에서 ㅇ 음가를 가진 あ행의 ‘あける(明ける)’, ‘あらわす’(表す·現す·著わす), ‘おかす’(侵す·犯す·冒す) 등과 이어진다.

2. 한국어의 초성이 유사한 음가를 나타내는 일본어와 이어지는 경우

ㄷ, ㅅ, ㅈ, ㅊ을 초성으로 하는 한국어가 구개음화와 유사한 변화를 일으켜 さ행 또는 た행으로 변음되는 경우를 말한다.

가. ㅅ, ㅈ, ㅊ을 초성으로 하는 한국어가 た행으로 이어지는 경우 ‘서다’의 연용형 ‘서서’가 ‘たつ’(建つ·立つ)로, 주는 것을 뜻하는 ‘줌’이 ‘たまう’(賜う·給う)로, ‘참아라’가 ‘たえる’(堪える, 耐える)로 이어진다.

나. ㄷ, ㅈ, ㅊ을 초성으로 하는 한국어가 さ행으로 이어지는 경우 ‘닫다’에서 ‘鎖(さ)す’로, 차가운 것을 뜻하는 ‘참’에서 ‘寒(さむ)い’로 ‘짜다’의 ‘짜오’에서 ‘しお’(?·潮·汐)로 이어진다.

3. 한국어 초성 ㄴ이 あ행과 이어지고, 역(逆)으로 한국어 초성 ㅇ이 な행과 이어지는 경우

한국어에서 ‘님금’이 임금으로, ‘녀름’이 ‘여름’으로 변음되고, 반대로 ‘임자’가 ‘님자’로, ‘일곱’이 ‘닐곱’으로 발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다’의 ‘남아서’가 ‘나마서-余(あま)す’로 이어지고, 반대로 ‘울다’의 ‘울구’에서 ‘우구-아구-なく’로 이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가. 한국어 초성 ㄴ이 あ행과 이어지는 경우

① 낡아 : 나가-아가-あか(垢)

② 노세 : 노소-오소-아소-あそぶ(遊ぶ)

③ 날(것) : 나라-あら(新·組·荒)

④ 눌러 : 눌-울-うつ(打つ·射つ·擊つ)

⑤ 내 : 내-애-え(江)

⑥ 늙어 : 울어-우이-おい(老い)

⑦ 널 : 얼-일-いた(板)

⑧ 놓구 : 노쿠-おく(置く·措く·?く

⑨ 늦어 : 늣어-느서-으서-오소-おそい(遲い)

⑩ 내리라: 애리라-오리라-おりる(下る)

나. 한국어의 초성 ㅇ이 な행과 이어지는 경우

① 아니 : 안이-아이-ない

② 없어 : 어어-아어-아이-ない(無い)

③ 없고서: 어고서-아구수-나구수-なくす(亡くす·無くす)

④ 없지 : 어지-아지-なし(無し)

⑤ 어째 : 어재-아재-아조-なぞ(謎)

⑥ 여름 : 열음-열-녈-녀쓰-なつ(夏)

⑦ 어느 : 어니-아니-なに

⑧ 익음 : 닉음-니그미-にこみ(煮?み)

⑨ 여보 : 녀보-にょうぼう

⑩ (빼)앗음: 앗음-아수무-나수무-めすむ(盜む)

⑪ 옮겨라: 오겨라-오게루-のける(退ける·除ける)

⑫ 없애구: 오세구-오소구-のぞく(除ぞく)

⑬ 앉음 : 아주무-오조무-のぞむ(臨ぞむ)

4. 한국어 초성 ㅂ, ㅎ이 あ행과 이어지고, 초성 ㅁ이 あ행으로 이어지는 경우

일본어에서 주격조사인 は가 “와‘로 발음되고 방향을 나타내는 조사 へ는 ’에‘로 발음되듯이 한국어 초성 ㅎ이 あ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맛‘에서 ’맞-마지-味(あじ)‘로 이어지듯이 한국어 초성 ㅁ이 あ행과 이어진다.

가. 한국어 초성 ㅂ과 ㅎ이 あ행과 이어지는 경우

① 발 : 바시-あし(足)

② 빨다의 ‘빨’ : 빠라-바라-아라-あらう(洗う)

③ 발(足) : 바로-바루-아루(동사화)-あるく(步く)

④ 뻐겨라 : 버고루-보고루-おごる(奢る·驕る·傲る·倨る)

⑤ 빠개라 : 바개라-바가라-바가래-아가래-わかれ(分れ·別れ)

⑥ 바다(海): 아다-와다-와다루(동사화)-わたる(渡る)

⑦ 빠개라 : 바개라-바라-아라-わる(割る)

⑧ 사발 : 사알-살-さら(皿)

⑨ 헛 : 허소-후소-うそ(噓)

⑩ 헛 : 허사-어이사-うわさ(?)

⑪ 훌륭 : 우륭-우루-에루-えらい(偉い·豪い)

⑫ 하아(제주방언): 아아-오아-오이-おおい(多い) 또는 ‘허구한(날)’에서 어구-오구-おおく(多く)

⑬ 하고 : 아고-오고-おこなう(行う)

나. 한국어 초성 ㅁ이 あ행과 이어지는 경우

① 맛 : 마지-あじ(味)

② 모시라: 맞-마시라-아시라-あしらい

③ 맡겨라: 마주거라-아주가루-あずかる(預かる)

④ 맞대라: 마다라-아다라-あたる(?たる)

⑤ 맞대라: 마데라-아데라-あてる(?てる)

⑥ 맞추다: 마쯔다-마쯔라에루-あつらえる(?える)

⑦ 모둠 : 모두마-마두마-아쯔마-あつまり(集まり)

⑧ 맞(장구): 마도-あど

5. 한국어 받침의 일본어에서의 변화

한국어 받침이 일본어에서는 탈락되고 ㄹ, ㄷ, ㅅ, ㅈ 받침은 경우에 따라 분절된다.

가. 받침이 탈락되는 경우

① 열구 : 여구-아구-あく(開く·明く·空く)

② 아침 : 아치-아차-あさ(朝)

③ 걸어라 : 거기루-가게루-かける(架ける·掛ける·懸ける·賭ける)

④ 굴뚝 : 구두-くど

⑤ 상앗대 : 상아-사아-さお(竿·棹)

⑥ 질(길) : じ(路)

⑦ 업어 : 어어-おう(負う)

나. ㄹ 받침의 변화

한국어의 ㄹ 받침은 세 가지로 변화되어 일본어와 이어진다.

① ㄹ 받침이 그대로 분절되는 경우

벌(原) : 바라-はら

골(꼴)(柄) : 고라-가라-から

절(寺) : 저라-더라-데라-てら

② ㄹ 받침이 さ행 또는 た행으로 변하는 경우

발달(發達)이 はったつ로 되는 것처럼 고유 한국어의 ㄹ 받침이 さ행 또는 た행으로 변화한다.

벌(蜂) : 바찌-はち

꼴(形·型): 고다-가다-かた

올(날:明日): 오사-あさ 또는 오시다-아시다-あした

별(星) : 벌-버시-보시-ほし

③ ㄹ 받침이 き 또는 け로 분절되는 경우(접미어화)

한국어에서 ‘닭’은 일본어에서 とり로 변했지만 아직도 한국어에서는 ‘달’ 또는 ‘닥’으로 발음된다. ‘닭이 운다’는 ‘달기 운다’ 또는 ‘닥이 운다’라고 두 가지로 발음(어느 것이 표준음이냐는 별 문제)되는데, 고대에는 ‘굴’, ‘달’, ‘술’, ‘밀’도 ‘닭’과 같이 두 가지로 발음되었을 수도 있다. 받침 ㄹ이 き 또는 け로 분절되는 예는 다음과 같다.

굴(牡蠣) : 구기-가기-かき

술(酒) : 수개-사개-さけ

달(月) : 다기-두기-つき

밀(麥) : 미기-무기-むぎ

대(竹) : 대개-다개-たけ

다. ㄷ, ㅅ, ㅈ 받침의 변화

한국어에서 ㄷ, ㅅ, ㅈ 받침의 발음은 거의 같으므로 일본어에서는 발음 편의에 따라 さ행, た행으로 분절된다.

① 것(事) : 거도-고도-こと

② 갓(笠) : かさ

③ 젖(乳) : 저지-じじ

④ 옛(後·跡·迹): 에도-아도-あと

⑤ 붓(筆) : 부데-후데-ふて

6. 한국어에서 중간음의 초성 ㄹ이 탈락하는 경우

한국어의 ㄹ이 발음의 편의상 일본어에서 탈락되는 경우를 말한다.

① 구름(雲) : 굴음-구음-굼-くも

② 씨름(相撲) : 실음-시음-심-숨-수모-すもう

③ 오름(山) : 올음-오음-옴-오마-やま

④ 사람(人·民) : 살암-사암-삼-사미-다미-たみ

⑤ 우러름(敬) : 울어음-우어음-우엄-우어마-우야마-うやまう

⑥ 우러름(羨) : 우러음-우라음-우라우마-うらやま

⑦ 가려워(痒 : 갈여이-가여이-かゆい

7. あ행, や, ゎ가 접두어로 붙는 경우

본래의 일본어가 그대로 한국어로 이어지는데 접두어 あ행, や, わ가 붙어 양 어간의 연관 관계가 모호하게 된 경우, 바꾸어 말하면 이들 접두어를 떼면 바로 양 언어가 이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① 暖(あたた)かい, 溫(あたた)かい : あ+따뜻-あ다다-あたたかい

② 熱(あつ)い, 署(あつ)い : あ+더워-あ두어-あ두이-あつい

③ 溢(あふ)れる : あ+흘러-あ흐레-あふれる

④ 泉(いずみ) : い+샘-い재미-い주미-いずみ

⑤ 牛(うし) : う+소-う시-うし(うま도 동일함)

⑥ 緖締(おじ)め : お+죔-お짐-お지메-おじめ

⑦ 劣(おと)る : お+떨어-お더러-お도로-おとる

⑧ 踊(おと)る : お+돌아-お도라-おどる

⑨ 易(やす)い : や+쉬어-や수어-やすい

安(やす)い : や+싸-や사-や수-やすい

休(やす)み : や+쉼-や수무-やすみ

⑩ 分(わか)れ, 別(わか)れ : わ+갈려-わ가레-わかれ

⑪ ?(わびる) : わ+빌어-わ비러-わびる

8. ね, め가 접미어로 붙는 경우

본래 단음절인 한국어에 ね가 접미어로 붙은 경우이다. 2음절인 한국어에 붙는 경우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름과 같다.

① 稻(いね) : 이(밥·쌀)-이-いね

② 實·核(さね) : 씨-시-사-さね

③ 種(たね) : 씨-시-사-다-たね

④ 船(ふね) : 배-부-후-ふね

⑤ 骨(ほね) : 뼈-벼-보-ほね

⑥ 胸(むね) : 맘-마-무-むね

⑦ 峰·領(みね) : 뫼-미-みね

⑧ 龜(かめ) : 거(북)-거-가-かめ

⑨ 燕(つばめ) : 제비-주비-주바-つばめ

⑩ 瓜(つめ) : (손·발)톱-토-투-쑤메-つめ

⑪ 雀(すずめ) : 참새-차새-사새-수수-수주-すずめ

⑫ 沼(めま) : 늪-누-めま

9. 한국어 앞말이 생략되어 뒷말과 이어지는 일본어

대체로 2음절 한국어 중에서 첫 음절이 생략되어 일본어와 이어지는 경우이다.

① 언덕의 ‘덕’ : 석-삭-사가-さか(坂)

② 이빨의 ‘빨’ : 발-바-ば-は(齒)

③ 이파리의 ‘파리-팔’ : 발-바-ばは(葉)

④ 깃발의 ‘발’ : 발-바다-はた(旗)

⑤ 눈매의 ‘매’ : 매-め(目)

⑥ 열매의 ‘매’ : 매-み(實)

10. 신체부위를 가리키는 한국어 명사가 일본어에서 동사화 하여 이어지는 경우

① 눈매-매-みる(見る)

② 귀-기-きく(聞く)

③ 코-코무-かむ(?む)

④ 배-배라-바라-はらむ(孕む)

⑤ 발-발로-바루-아루-あるく(步く)

⑥ 발-바시-하시-はしる(走る)

⑦ (이)빨-바-하-はむ(食む)

Ⅲ. 한자의 훈독과 음운대응

일본의 한자어는 당연히 모두 한자로 표기되지만 대부분의 고유어도 한자로 표기된다. 단지, 한자어인 경우에는 대체로 음독(훈독되는 경우도 있음)되고, 고유어인 경우에는 훈독되는 이중적 구조를 갖는다.

고유어는 한자가 다르면서 훈독이 같은 동음이자(同音異字)와 한자가 같으면서 훈독이 다른 이음동자(異音同字)로 나눌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음운이나 뜻에 고유 한국어의 음운이나 뜻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이것은 음운상으로나 의미론상으로 두 고유어가 체계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1. 동음이자의 음운대응

고유 일본어에는 한자가 다르면서(異字) 훈독이 같은(同音) 동음이자가 상당히 많다. 이 동음이자는 뜻이 같은(비슷한) 경우도 있고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뜻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는 동음이자(同音異字) 이의어(異義語)라 할 수 있다.

어느 것이든 동음이자의 상당수가 일정한 음운 대응의 법칙에 따라 고유 한국어와 이어지고 있다. 동음이자가 뜻이 같을 경우에는 비록 다른 한자로 표기되지만 각 한자의 뜻이 어느 고유 한국어와 뜻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표시(標示)를 나타내는 しるし는 각각 다른 한자 인(印), 기(記), 표(標), 징(徵)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각 한자의 뜻은 고유 한국어 ‘찔러서’의 뜻을 의미자질로 하여 ‘지러서-지루시-しるし’로 이어진다.

한편, 동음이자가 뜻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그 이자(異字)가 음운이 유사하면서도 각각 듯을 달리하는 고유 한국어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달(達), 질(質)은 둘 다 たち로 훈독되는데 각각 음운이 유사하면서도 뜻이 다른 ‘들’과 ‘틀’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달(達)을 듯하는 ‘들’과 질(質)을 뜻하는 ‘틀’이 서로 유사한 음운을 가졌기 때문에 たち로 동음훈독(同音訓讀)되는 것이다.

즉 동음이자 동의어인 경우에는 의미의 공통성을 기초로 하여 한국어와 일본어가 이어지고, 동음이자, 이의어인 경우에는 음운의 공통성을 기초로 양 언어가 이어지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 동음이자가 동의어일 경우

合う, 會う, 逢う, 遭う, 遇う, 嫁う는 모두 あう로 훈독되는데 만나서 ‘아우르다’와 ‘어우르다’를 공통의 기본 의미로 한다. 한국어 ‘만나다’와 일본어 ‘あう’는 음운상으로는 전혀 대응관계를 이루지 못하지만 ‘아우르다’와 ‘어우르다’를 의미자질, 즉 속성으로 하고 있으므로 의미상의 공통성을 기초로 서로 이어진다. 歌う, 謠う, 唄う, 詠う, 謳う는 한국어 ‘노래’의 의미자질의 하나인 ‘읊다’를 공통의미로 하기 때문에 うた로 이어지고, 侵す, 犯す, 冒す는 한국어 ‘어겨서’를 공통의미로 하기 때문에 おかす와 이어진다. 架ける, 掛ける, 懸ける, 賭ける, 驅ける도 한국어 ‘걸다-걸어라’를 공통 의미로 하므로 ‘걸거라-가게라-かける’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음독을 가진 한자가 같은 음운으로 훈독되고 뜻도 같거나 비슷한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한국어의 일본어화 과정에서 유사한 뜻을 가진, 즉 의미자질을 공유하는 한자들을 하나로 묶어 그 뜻에 가장 부합하는 한국어를 뽑아 그 어간으로 훈독시킨 것이라고 본다.

나. 동음이자가 이의어일 경우

書く, 描く, ?く, 搔く, 欠く, 斯く, 繫く, 構く 등 8개 한자는 모두 かく로 훈독된다. 이들은 음운이 유사하면서도 뜻이 서로 다른 한국어와 이어지고 있다.

書く, 描く, ?く는 글이나 그림을 갑골이나 벽, 암석에 긁어서 적거나 그렸기 때문에 한국어 ‘긁다’에서 ‘구고-가구-かく’로 이어진다. 한편 搔く는 긁는 행위로 이어지는 점에서는 書く(描く, ?く)와 같으나, 머리나 등을 긁는 행위에 한정하므로 서로 뜻이 다르게 된다. 또한 欠く는 ‘깨다’에서, 斯く는 ‘같다’에서, 繫く와 構く는 ‘걸다’에서 서로 이어지는데 유사한 음운 ‘깨고’, ‘같고’, ‘걸고’에서 かく를 공통 음운으로 하고 있다.

つく(でく), さす,すく(すくう) 등으로 훈독되는 많은 한자가 뜻을 달리 하면서도 훈독을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 또한 한국어의 일본어화 과정에서 유사한 음운을 가진 한국어를 하나로 묶어 그 중 つく(でく), さす,すく(すくう)를 공통 음운으로 훈독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이음동자와 음운대응

일본어에는 한자가 같으면서(同字) 훈독이 다른(異音) 이음동자도 상당수 있다. 이 이음동자도 뜻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도 있고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뜻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는 이음동자 동의어라 할 수 있고, 뜻이 다른 경우는 이음동자 이의어라 할 수 있다. 어느 경우나 일정한 음운 대응의 법칙에 따라 한국어와 이어진다.

가. 이음동자가 동의어인 경우

명일(明日)을 あした 또는 あし라고 훈독하는데 명일(明日)은 내일(來日), 즉 ‘올 날’이다. 여기서 ‘날’을 탈락시키면 ‘올’이 된다. ‘올’에 음운대응법칙을 적용시키면 ‘알-아수’ 또는 ‘알-あした’로 이어진다. 형(形)이 かた, かたち로 훈독되는데 이것도 ‘골’에서 ‘갈-가다’ 또는 ‘갈-かたち’로 이어진다.

의고지(意固地) 또는 의호지(依?地)도 いこじ 또는 えこじ로 훈독되는데 그것은 한국어 ‘외고집’이 ‘이고지’ 또는 ‘에고지’로 발음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극(極)은 きめる, きわめる처럼 き나 きわ로 훈독되는데 모두 한국어 ‘끝’, ‘가’와 이어지고 있고, 박(迫)도 せる, せまる처럼 せ 또는 せま로 훈독되는데 그것은 한국어 ‘조이다’에서 ‘죄다-재다-새루-せる’ 또는 ‘죄메라-세마라-せまる’로 이어짐으로 해서 이음동자가 동의어가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 이음동자가 이의어일 경우

(1) 이음동자 이의어의 대표적인 예로 ‘생(生)’을 들 수 있다. 생(生)은 음독, 훈독을 합치면 10개는 족히 된다. 음독은 せい, ぜい, しよう, じよう 등이 있는데 음독은 별도로 하고 훈독을 보면 모두 한국어와 절묘하게 이어진다. 생(生)의 훈독을 한국어와 관련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① 生(い)かす, 生(い)き, 生(い)きる, 生(い)ける

모두 한국어 ‘있다’의 연용형 ‘있고서’, 종지형 ‘있지’, 명령형 ‘있거라’와 각각 이어진다.

② 生(な)す, 生(な)る

한국어 ‘낳다’의 ‘나서’, ‘나라’에서 なす, なる로 이어진다.

③ 生(う)む, 生(う)まれる

한국어 ‘움트다’의 ‘움’에서 うむ로 이어진다.

④ 生(なま)

‘날 것’의 ‘날’ 명사형 ‘남’에서 なま로 이어진다.

⑤ 生(き)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그’에서 き로 이어진다.

⑥ 生(は)える, 生(は)やす

‘뻗다’의 명령형 ‘뻗어라’에서 ‘하에루’, 연용형 ‘뻗어서’에서 はやす로 이어진다.

(2) ‘生’ 이외에도 請(こ)う와 請(う)ける, 被(こう)むる와 被(おお)う, 熟(ぃ)なす와 熟(う)む, 下(さ)がる와 下(お)りる 등도 이음동자 이의어인데 모두 고유 한국어와 이어진다.

3. 한국어 ‘뜨다’와 음운대응

한국어 ‘뜨다’는 어떠한 행위나 사물과 어울려 쓰이는 대표적인 동음이의어이다. ‘뜨다’를 의미하는 일본어 역시 상당히 많은데 흥미로운 것은 ‘뜨다’를 본고에서 설정한 ‘음운대응의 법칙’에 적용하면 ‘뜨다’를 의미하는 일본어와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한국어 ‘뜨다’의 의미에 상응하는 일본어와의 이어짐을 살펴본다.

가. 起(た)つ, 發(た)つ, 建(た)つ, 裁(た)つ를 뜻하는 ‘뜨다’

急(いそ)いで座(ざ)をたぃた 하면 급히 자리를 떴다는 뜻이고, 明日(あす)はンウルにたつ豫定(よてい)です 하면 내일은 서울로 뜰 예정이라는 뜻이다. 또한 高層(こうそう)ビルが建つ 하면 고층건물이 뜬다는 뜻이고, 裁ち落(おと)す 하면 떼내는 것을 뜻한다. 모두 ‘뜨다’에서 ‘다-たつ’로 이어진다.

나. 融(と)く, 解(と)く를 뜻하는 ‘뜨다’

髮(かみ)を融く 하면 머리를 뜨듯이 빗질하는 것을 뜻하고, 包(つつ)みを解く 하면 보따리를 뜯는 것을 뜻한다. ‘뜨다’에서 ‘도-とく’로 이어진다.

다. 退(ど)く를 뜻하는 ‘뜨다’

ちよっとどいてちょうだい 하면 자리를 좀 뜨라는 뜻이다. ‘뜨다’에서 ‘도-どく’로 이어진다.

라. 飛(と)ぶ, 跳(と)ぶ를 뜻하는 ‘뜨다’

飛ぶ와 跳ぶ는 둘 다 위로 뜨는 것을 공통 의미로 한다. ‘뜨다’에서 ‘도-とぶ’로 이어진다.

마. 높이(高) 뜨는 것을 의미하는 ‘뜨다’

‘높다(高)’라는 말에는 ‘뜬다’라는 의미자질이 중요한 속성으로 기능한다. ‘뜨가’에서 ‘드고-다고-다가-たか’로 이어진다.

바. 覺(さと)る, 悟(さと)る를 듯하는 ‘뜨다’

覺る, 悟る는 불교에서 득도(得道)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득도한다는 것은 눈을 뜨는 것(開眼)을 의미한다. ‘뜨다’의 명령형 ‘떠라’에서 ‘따라-다다루-다도루’로 이어지고, ‘다’가 ‘사’로 변음되어 さとる로 이어진다.

사. 剝(す)く, 結(す)く, 梳(す)く, ?(す)く, 抄(す)く, 鋤(す)く를 듯하는 ‘뜨다’

剝く는 가죽을 뜯는 것, 結く는 그물을 뜨는 것, 梳く는 머리를 뜨듯이 빗질하는 것, ?く는 김 등을 뜨는 것, 抄く는 초본 등을 뜨는 것, 鋤く는 흙을 뜨는 것을 듯한다. 모두 ‘뜨다’에서 ‘두고-두구-’로 이어지고, ㄷ이 ㅅ으로 변음되어 ‘두구-すく’로 이어진다.

아. ?(すく)う를 듯하는 ‘뜨다’

金魚(きんぎょ)をすくう 하면 어항에서 금붕어를 뜨는 것을 뜻한다. すく처럼 ‘뜨다’에서 すくう로 이어진다.

자. 据(す)える를 뜻하는 ‘뜨다’

灸(きゅう)をすえる 하면 뜸을 뜨는 것을 뜻한다. ‘뜨다’에서 ‘떠어라-두에루-すえる’로 이어진다.

차. 犁(すき), 鋤(す)き를 뜻하는 ‘뜨다’

犁나 鋤き나 모두 흙을 뜨는 농기구이다. ‘뜨다’에서 ‘두기-すき’로 이어진다.

카. 岳(たけ), 巖(たけ)를 뜻하는 ‘뜨다’

たけ는 높이 “떠‘ 잇는 산, 산봉우리를 듯한다. 高(たか)い처럼 ’뜨다‘에서 ’두고-다고-たけ‘로 이어진다.

타. 出(だ)す를 뜻하는 ‘뜨다’

湖水(みずうみ)に舟(ふね)がだす 하면 호수에 배가 떠 있음을 뜻한다. ‘뜨다’에서 ‘다-だす’로 이어진다. 新聞(しんぶん)に記事(きじ)がだす 하면 신문에 기사가 떠 유명세를 탄다는 뜻이 된다.

파. 出(で)る를 뜻하는 ‘뜨다’

でる는 뜨는 것을 의미한다. 해, 달, 별이 뜨는 것에서부터 자리를 뜨는 것, 배가 뜨는 것, 신문이나 잡지에 이름이 뜨는 것 등 모두 でる로 받는다. ‘뜨다’에서 ‘드라-데라-でる’로 이어진다.

하. 取(と)る, 撮(と)る를 뜻하는 ‘뜨다’

魚(さかな)を取る 하면 고기를 뜨는 것을 뜻하고, 書類(しょるい)を撮る 하면 서류의 사본을 뜨는 것을 뜻한다. ‘뜨다’에서 ‘도-とる’로 이어진다.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도

 

반 재 원 [훈민정음 연구소장]

 

1. 서론

2. 훈민정음 중성의 배열 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3. 훈민정음 초성의 배열 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4. 훈민정음이 모두 28자로 만들어진 이유

5. ㅋㅌ과 ??????에 획을 더한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

6. 옛글자의 음가문제

7. 훈민정음의 뿌리글자

8. 결론

 

1. 서론

한글 창제 원리는 학자들 간에 이미 다 밝혀진 것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창제원리에 대한 연구는 일단 관심거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현실이다. 더구나 <한글과 천문도>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연구는 없다. 이 발표는 한글과 천문도와의 관계를 각론적인 측면에서 깊이 파헤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2. 훈민정음 중성의 배열 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1) 현행의 중성 순서가 정해진 이유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근거하고 있음.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2) 『훈민정음』의 중성 순서

? ?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훈민정음 연구소장, 태극원리연구소장. 한국문화훈련원주임교수. 국학박사.

3) 중성은 천문도인 하도에서 기원함

<천간이 배속된 하도> <천간과 중성> <천간이 배속된 중성도>

<중성도>

<중성과 천간, 수의 배속표>

중성

?

오행

(토)

방위

중앙

중앙

?

천간

(무)

5

10

?

1

3

2

4

7

9

6

8

4) 하도와 오행성

<하도>

예) 하도의 북방 1 ? 6수-하도의 1 ? 6수(水)는 수성으로서 매일 자시子時에 북쪽 하늘에 보인다. 매월 1일과 6일에 해와 달이 북쪽에서 수성을 만나며 매년 1월과 6월의 저녁에 북쪽 하늘에 보인다. 그러므로 1과 6은 수와 합한다.(一六水) 하늘의 1이 수를 낳고(天一生水), 땅의 6이 수를 이룬다.(地六成水) 따라서 1일은 수성이 처음 보이는 때이고(天一生水星), 6일에는 수성이 마지막 보이는 날이다.(地六成水星)

3. 훈민정음 초성의 배열 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1) 현행의 초성 순서가 정해진 이유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근거하고 있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

2) 『훈민정음』의 초성순서

ㄱ ㅋ ㅇ, ㄷ ㅌ ㄴ, ㅂ ㅍ ㅁ, ㅈ ??? ㅅ, ㆆ ??? ㅇ,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

3) 초성의 배열순서는 천문도인 낙서에서 기원함

초성의 위치를 <지지가 배속된 5행 방위 낙서>에 배치하면 다음의 오른쪽 그림 <초성 5행 방위낙서>가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중성을 <하도>에 연관시킨 연구는 있었으나 초성을 <낙서>와 연관시킨 연구는 없었다. 그것은 <오행방위 낙서>와 초성을 이론적으로 서로 연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지가배속된 5행방위낙서> <지지와 초성> <초성5행 방위낙서>

<초성과 지지, 수의 배속표>

초성

?

o

오행

방위

동남

서남

서북

동북

지지

8

3

5

2

7

10

4

9

5

6

1

10

4) 낙서와 별자리

<오행 방위 낙서> 역시 다름 아닌 천문도이다. “낙서라 함은 하나라 우왕이 홍수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산 거북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된 9개의 무늬이다.”라고 하였다. 또 최근에 공개된 우리의 고대 사상서에는 “단군때 책을 만들어 금거북의 속에 감추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우임금이 낙수에서 거두었는데 이것이 낙서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낙서>

<초성과 지지, 수의 배속표>

초성

?

o

오행

방위

동남

서남

서북

동북

지지

8

3

5

2

7

10

4

9

5

6

1

10

<『훈민정음』 초, 중성의 배열 순서>

4. 훈민정음이 모두 28자로 만들어진 이유

1) 세종의 천문지식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천문 관측 및 연구에 몰두했다는 여러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15년(1433년)에는 자신이 직접 28수의 거리와 도수, 12궁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측후하여 이순지에게 명하여 그것을 석판에 새기게 하고 천문 역법에 대한 책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실록 15년조에 의하면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바쳤다. 세자(문종)가 간의대에 나아가 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과 함께 간의와 혼천의 제도를 강문하였다. 김빈과 내시 최습에게 명하여 간의대에서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관찰하여 그 문제점을 파악하게 하였다. 당시 숙직 때문에 고생하는 김빈에게는 옷까지 하사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서운관은 세종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하였다. “관상감은 천문, 지리, 역수曆數에 관한 업무를 맡아본 관아로써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의 발명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천문과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관상감의 관원을 30여명에서 8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명나라 천문 기관인 흠전감欽典監의 인원이 11명이었던 점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천문에 심혈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이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장영실을 중용하여 ‘혼천의’ ‘관천대’ ‘일성정시의’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천문기기를 제작하게 한 것은 천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천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천문 이론이 서로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영혼관은 천문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궁궐의 건물 이름도 천문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창덕궁 내의 정자와 전각의 이름도 28수의 이름을 따랐다. 돌아가신 선대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건물을 선원전璿源殿이라고 하고 왕실의 족보를 선원록璿源錄이라고 하는데, 선원璿源은 북극성을 뜻한다. 고구려 백제 등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四神圖도 28수천문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은 죽음이 곧 영혼의 본 고향인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망자亡者를 죽음을 관장하는 별인 북두칠성을 새긴 판에 뉘여 묻었으며, 무덤 내부의 천정을 우주로 보고 별자리로 장식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천문지식으로 미루어 볼 때 천문이론이 훈민정음 창제의 이론적인 바탕이 되었음은 낯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주천문이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한글의 창제원리나 태극의 원리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저변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예술과 문화의 맥을 짚어낼 수 없다.

2) 훈민정음 28자와 28수 천문도

동양천문도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외에 <28수宿 천문도>라는 천문도가 있다. 그것은 천구天球를 동, 서, 남, 북으로 나누고 각각 7별자리씩 배당하여 모두 28별자리로 나눈 천문도이다. 이 천문도가 바로 한글이 28자로 만들어지게 된 이론적인 배경이 되었다. 훈민정음의 글자 수를 28자로 만든 이유를 28수 천문도과 연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아래 <정음 28자 천문도>는 앞에서 밝힌 중성과 천간, 초성과 지지와의 관계를 그대로 대응시킨 것이다.

<정음 28자 천문도>

이와 같이 천문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창제하였기 때문에 한글이 모두 28자가 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28자가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종이 문자 창제를 함에 있어서 수(학)를 중요시하면서 천문 이론에 바탕을 둔 것도 한글을 단순히 언어를 표현하는 문자로만 보지 않고 천문과 우주 변화의 작용까지 읽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기본 지식을 알아야만 비로소 한글이 왜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과학적인 문자가 되었는지를 상대방에게 제대로 납득 시킬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5. ㅋ ㅌ과 ??? ???에 획을 더한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

1) 천문도로 본 초성의 가획加?획원리

<『훈민정음』의 ㅋ ㅌ, ??? ???의 가획 모양>

2)ㅋ ㅌ과 음도陰道, ??? ???과 양도陽道와의 관계

필자는 그 이유를 28수 천문도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천문도에서는 28수를 양도 천문과 음도 지호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28수 천문도>에는 동지부터 하지까지 일조량이 길어지는 양의 영역인 양도陽道와 하지부터 동지에 이르기까지 일조량이 짧아지는 음의 영역인 음도陰道로 나누어져 있다.

다음의 <천문도에 배당된 ㅋ ㅌ, ??? ???의 위치도>를 보면 ㅋ ㅌ은 지호가 있는 음도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ㅋ과 ㅌ은 음을 상징하는 획(━)을 더한 것으로 판단된다.

<천문도에 배치된 ㅋ ㅌ, ??? ???의 위치도>

반면에 ???과 ???은 양도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은 음을 상징하는 획(━)을 더하지 못하고 양을 상징하는 점을 더한 것으로 해석하고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훈민정음은 15세기에 천문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글자인데도 천문이론을 한글창제의 바탕이론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19세기 후반에 정립된 서양언어학의 잣대로 연구하다보니 세종의 깊은 창제원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서양언어학으로는 글자 하나하나의 오행배속이나 방위와 수리 등 천문분야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6. 옛 글자의 음가 문제

1933년 10월 29일에 한글 24자로 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년 후 1934년 7월 보성전문 학교 교장을 지낸 박승빈을 비롯하여 윤치호, 최남선, 지석영, 이병도, 권병훈 등 112여명의 이름으로 훈민정음 28자를 모두 써야한다는 요지의 ‘한글식 신 철자법 반대성명서’를 내었다. 그러나 성명서는 관철되지 못하였다. 해방 후 1948년에 최현배, 피천득. 언더우드 등 22명이 참여하여 ‘들온말 적는 법’을 공표하였다. 그때 순경음 ?,? 등 4자를 추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외래어표기에는 새 문자나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1940년 6월 25일에 발표한 조선어학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규정을 내세워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또 폐기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사장된 4글자와 그 밖의 옛글자들은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다. 다음의 음가연구는 그 불씨를 새로 살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1. ?, , ㆆ, ? 의 음가

1) ? 의 음가

<?와 다른 중성과의 관계>

(1) ? 의 현대적 표기방안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 와 각각의 초성을 연계하여 ? 음가를 살펴보고자한다,

< ? 와 초성과의 관계>

앞의 <? 와 초성과의 관계>에서 초성과 중성을 5행끼리 대응시킨 오른쪽의 그림을 토대로 하여 ? 음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목에 속하는 아음 ㄱ ㅋ ? 과 중앙의 ? 가 결합할 때는 목에 속하는 ‘ㅏ’의 기운이 섞인 깊은 발음이 나고,

화에 속하는 설음 ㄷ, ㅌ, ㄴ과 ? 가 결합할 때는 화에 속하는 ‘ㅜ’의 기운이 섞인 깊은 발음이 나고,

금에 속하는 치음 ㅈ ㅊ ㅅ 과 ? 가 결합할 때는 금에 속하는 ‘ㅓ’의 기운이 섞인 깊은 발음이 나고,

수에 속하는 후음 ㆆ ㅎ ㅇ과 ? 가 결합할 때는 수에 속하는 ‘ㅗ’의 기운이 섞인 깊은 발음이 나고,

그리고 토에 속하는 순음 ㅂ ㅍ ㅁ과 ? 가 결합할 때는 토에 속하는 ‘ㅡ’의 기운이 섞인 깊은 발음이 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는 목이니 ‘가’의 기운이 섞인 깊은 소리가 나고,

?는 화이니 ‘누’의 기운이 섞인 깊은 소리가 나고,

?는 ‘금이니 서’의 기운이 섞인 깊은 소리가 나고,

?는 수이니 ‘오’의 기운이 섞인 깊은 소리가 나고,

?는 토이니 ‘므’의 기운이 섞인 깊은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본다.

2) ㅿ의 음가

(1) ㅿ의 현대적 표기방안

ㅿ의 정확한 이름은 ‘??’이며 ‘여린 ’이다. 그러나 있는 글자를 차용 하는 의미에서 본다면 ㅿ을 Z음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삼월 삼일(三月 三日)’의 日(?)이 ‘삼월 삼질’로 변한 것과 ‘거?(殆)’가 ‘거진’의 ㅈ음으로 변한 경우도 있다. 그것이 Z음으로도 쓸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는 있다. 예를들면 ‘디?인’ ‘텔레비?’ 등으로 대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ㅿ의 원래 음가는 Z음이 아니고 ㅅ보다 여린 발음이다. Z음의 정확한 표기는 합용병서인 이다. 아음 ? 과 치 음 ㅈ 의 합 음 이 다.

3) ?의 음가

(1) ?의 현대적 표기 방안

장단음으로는 별(星)이나 말(言)은 장음으로, ‘?(別)’이나 ‘?(馬)’은 단음으로 구분하여 표기하면 좋을 것이다. 또 ‘영동永東’, ‘영등포永登浦’는 장음으로, ‘?동嶺東’은 단음으로 서로 구분하여 표기할 수 있다.

?은 촉급한 소리로 입성에 속한다. 예를 들면 ‘여’는 ‘여봇’으로, ‘?!’는 ‘억’ 또는 ‘엇’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소리인 ‘?!’의 원래발음이 ‘억’이나 ‘엇’이 아니다. ‘어!’의 짧은 외마디 소리이다. ?의 소리 값은 ㄱ이나 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봇’은 ‘여’로,‘억’이나 ‘엇’은 ‘?!’로 하면 원래의 소리를 한층 더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다.

4 ) ? 의 음 가

(1) ? 의 현 대 적 표 기 방 안

목구멍과 코로 소리의 기운이 동시에

<사장된 글자의 이름>

현재 이들 글자에 대해서는 명칭이나 음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 는 깊은 소리로, ㅿ은 ‘여린 시읏’으로, ㆆ은 ‘여린 히읗’으로, ? 은 ‘여린기윽’으로, ? 은 ‘여 린 비 읍 ’으 로 하 는 것 이 옳다고 본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초성의 명칭도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행의 명칭을 따른다면 ㄱ을 ‘기윽’으로, ㄲ을 ‘끼윾(윽)’으로, ㅋ을 ‘키읔(윽)’으로, ? 을 ‘여린 기윽’으로, ㄷ을 ‘디읃’으로, ㄸ을 ‘띠?(읃)’으로, ㅌ을 ‘티읕(읃)’으로, ㄴ을 ‘니은’으로, ㅂ을 ‘비읍’으로, ㅍ을 ‘피읖(읍)’으로, ㅁ을 ‘미음’~ 등으로 하여 앞 글자의 초성이 뒷글자의 종성이 되게 일관성 있게 표기하는 방법이 있다. 또 새로 정한다면 천지인(? ㅡ ㅣ) 중 인(ㅣ)을 붙여서 ‘기’ ‘끼’ ‘키’ ‘?’ ‘디’ ‘띠’ ‘티’ ‘니’ ‘비’ ‘삐’ ‘피’ ‘미’ ‘지’ ‘찌’ ‘치’ ‘시’ ‘씨’ ‘?’ ‘히’ ‘?’ ‘이’ ‘리’ ‘?’ 로 할 것을 제안한다.

2. 그 밖의 음가

1) 순경음 ? ? ?의 음가

(1) ? ? ?의 현 대 적 표 기 방 안

옛글자 연구가들 중에는 ?을 로마자의 v 발음으로, ?을 f 발음으로 쓸 것을 주장하는 경우를 본다. 필자는 입술이 잠깐 합하므로 순음에 비하여 목구멍소리가 많다는 내용으로 보아 v 나 f 발음과는 전혀 다르다. 이 글자는 몽고어의 ‘B’를 ‘?’로 표기할 수 있으며, 슬로바키아어와 네델란드어의 ‘W’를 ‘?이’로 표기 할 수 있다. 그리고 ‘멍멍’이라는 의성어를 ‘??’으로, ‘음메’를 ‘??’ 등으로 표기할 수 있다. 이 글자를 살려 쓰면 외국어 표기 뿐 아니라 의성어를 더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다.

2) 외국어 f, v, r 및 권설음(ch, sh, zh) 등의 표기 방안

합용병서에서 김승곤은 이중조음 자음설을 주장하였다, 조규설과 이은정은 선위자음 시차적 경음설(先位子音 時差的 硬音說)을 주장하였다.

필자는 ‘?’ ‘?’ 등 합용병서의 앞 초성 ‘ㄴ’ ‘ㄹ’은 발음을 준비하는 발성기관의 모양이며, 뒤 초성 ‘ㅅ'은 음가로 보고자한다. 즉 ‘?’의 앞 초성 ‘ㄴ’은 혀의 모양으로 보자는 것이다. 즉 ‘ㄴ’은 발음을 준비하기 위하여 혀를 밖으로 쑤욱 내민 형상이며, 뒤 초성 ‘ㅅ'은 그 상태에서 내는 ‘ㅅ'발음으로 본다. 영어의 ‘θ’음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의 앞 초성 ‘ㄹ’은 발음을 준비하기 위하여 혀를 꼬부린 형상이며, 뒤 초성 ‘ㅅ'은 그 상태에서 내는 ‘ㅅ'발음으로 본다. 즉 권설음의 음가가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의 앞 초성 ‘ㅅ’은 잇발로 입술을 문 상태에서 ‘ㅂ’발음을 내는 것으로 영어의 ‘v’발음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의 앞 초성 ‘ㅅ’은 잇발로 입술을 문 상태에서 ‘ㅍ’발음을 내는 것으로 영어의 ‘f’발음으로 표기할 수 있다. 즉 앞 초성은 발음을 준비하는 조음기관의 모양이고 뒤 초성은 음가를 나타낸 것으로 본다. 합용병서가 미묘한 간격으로 시차적으로 발음이 된다하더라도 결국 합용병서나 각자병서가 모두 된소리이다.

따라서 ‘?’은 영어의 ‘?=th' 즉 ‘로 표기할 수 있다. ‘ð=th’의 ‘this’는 ‘?스’로 표기할 수 있다.

‘?’는 영어와 프랑스어와 루마니아어와 슬로바키아어와 브라질어와 터키어의 ‘v(?)’와 영어의 와 러시아어의 ‘B’(?)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도솔가 같은 고가에는 ‘巴’를 ‘?’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fighting’은 ‘?ㅏ이팅’으로, 로 쓸 수 있다. 또 프랑스어, 스페인어, 루마니아어, 터키어의 ‘f’발음으로 표기할 수 있다. l과 r의 발음은 반설음 ‘ㄹ’와 반설경음‘ㄹㅇ’로 구분할 수 있다. 중국어의 권설음 로 표기할 수 있다. 합용병서의 예는 후대의 <열녀 춘향 수절가> 등 많은 문헌에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 ‘?’ 의 예를 보면 ‘사또’를 ‘??’로, ‘딸’을 ‘?’로, ‘끌다’를 ‘?다’로, ‘꼼작’을 ‘?작’으로 표기한 예가 있다.

<합용병서를 활용한 외국어 표준 표기법 제정>은 우리들에게 정확한 외국어 발음을 할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외국인에게는 우리말을 잘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종주국인 우리가 세계의 다양한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글과 훈민정음은 서로 기능이 다르다. 없어진 4글자를 포함한 합용병서법을 살려 써야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7. 훈민정음의 뿌리글자

여기서 다시 고전古篆이라는 단어에 눈을 돌려보자.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 중 정인지 서문에서 <象形而字倣古篆>이라 하여 글자의 형상이 옛 전자를 본떴다고 한 구절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5년 12월 조에(12월 30일) <是月上親製諺文 二十八字其字倣古篆 分爲初終聲~>이라 하여 이 달에 상께서 친히 언문28자를 제작하였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라 하여 언문을 모두 옛 글자에 근본 하였으며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고, 또 세종 26년 2월 20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라 하여 글자의 형태가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고 글자가 합해져서 소리를 내지만 모두 옛것과 반대라고 하였다.

또 신경준은 그의 언서운해에서 ‘동방에 옛적에 통속으로 사용하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 하고 그 형태가 무법하여 제대로 말이 못되어 일반적으로 쓰이지 못하였는데 우리 세종 임금께서 훈민정음은 만드셨도다’라고 했다.

단기고사에는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지었다고 했으며 황해도 백악 마한촌에 국문 정음 비문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의 글자꼴은 가림다문을 많이 참고하였다고 본다.

필자는 ‘고전古篆’을 가림토문으로 보고자한다. ‘가림다’란 원래 산수가림토珊修加臨多라고 하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산수가림다珊修加臨多로 나오고 『심딩전서』의 「단서대강」에는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로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상고사>에는 산호산, 패옥소리산(珊)이며 <단서대강>에는 깍을산, 정리할산(刪)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산수刪修’란 ‘불필요한 자구를 잘 정리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수가림토’가 여진족발음으로 ‘산수그리토’로, 그것이 인도로 건너가면서 ‘산스크리트’가 된 것으로 유추해 보는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어도 가림다문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가림다문도 또한 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시때의 ‘산목算木’, 치우때의 ‘투전목鬪佃目’, 부여의 ‘서산書算’, ‘우서雨書’, ‘용서龍書’, ‘녹도문鹿圖文’ 등의 글자를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한다.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가림토문>

8. 결론

훈민정음의 위대함은 무無에서 문자창제를 한 것이 아니라 선대의 자료를 참고하되, 그것을 우주자연 현상인 천문에 대응하여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으로 창조한데에 있다. 필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천문도를 이론적인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조선의 역법으로 ‘조선의 하늘’을 가지고 싶어했던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천문문자’를 가지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하늘’을 가지고자 했던 세종의 자주정신이 ‘조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가림다문과 같이 역사 속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하늘의 별밭에 28개의 영롱한 구슬로 수놓아 두었던 것이다.

초, 중성의 배열순서와 초성의 이름도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은 분명히 ‘여린ㄱ’이다. 그런데 지금도 ‘옛ㅇ’이라 하고 있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한글 국제 공용화 정책>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그 선행과제가 바로 한글 창제원리의 규명과 옛글자인 합용병서를 선별적으로 살려 쓰는 길이다. 통일 후의 언어 정책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앞으로 이러한 것들은 학계의 주요 주제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끝-

 

 

위대한 우리민족

아메리카의 주인은 우리민족이었다.

 

손 성 태 [배재대학교 교수]

 

1. 사라져버린 우리민족

2.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민족

3. 멕시코 원주민으로서의 우리민족

4.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풍습

5. 우리민족의 이동 루트

6. 욱일승천할 우리민족

 

1. 사라져버린 우리민족

* 북방의 강자였던 우리민족

오늘날 우리민족은 동북아의 약소민족으로 통한다. 우리민족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부터 약소민족이었을까?

우리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약 1천년동안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민족의 영토도 한반도에 국한되지만, 고려 개국 이전의 시대, 즉 발해가 건재하던 시대, 고구려가 만주 대평원을 호령하던 시대, 부여가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는 외세의 침략보다는 우리민족이 주변의 다른 민족을 누르고 지배하던 시대였다. 즉 기원전부터 발해가 멸망했던 10세기 초까지, 우리민족은 만주 대평원의 주인으로서, 동북아의 강자였다.

3세기 후반에 집필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문자가 없던 우리민족은 우리의 역사를 남겨두지 못했지만, 비록 자기들의 관점에서 그리고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우리가 그 시대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민족은 동북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 책에 따르면, 3세기에도 만주와 요동 일대는 우리민족의 터전이었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으며, 오랫동안 고조선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나라 후예인 공손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들이 살았다.

그 당시의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에서 가장 발달했던 곳이었고, 중국 중원과 문물 교류의 핵심 통로였으므로, 인구 밀집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에 동북아 만주에서 우리민족이 아닌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으로서, 두만강 북쪽 연해주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그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과 우리민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 (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세상에 알려진 이래로,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강대국 부여에게 스스로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已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말기에 스스로 찾아와서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시대의 국력은 인구수에 좌우되었다. 숙신은 적은 인구수로 말미암아 약소국으로서 8만호의 부여에게 스스로 찾아와서 굴복하였고, 부여는 반갑게 맞이하고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년(220년~226년)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숙신의 인구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게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의 만주와 요동일대의 우리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로 추정하고, 숙신은 2만호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3세기 초의 만주와 요동 일대의 우리민족 분포도/ 부여를 건국한 집단은 길림과 장춘 일대에 살던 네 개의 고리족 집단(마가, 우가, 구가, 저가)였다. 그러나 보다 북쪽의 아무르강 일대에는 수많은 고리족들이 씨족집단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부여라는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 선조들이었다.)

* 사라져버린 우리민족

494년,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 이어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남쪽으로 향해 가족들만 데리고 떠났고, 백성들은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쪽으로 집단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왕은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은 북쪽으로 떠난 것이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의 대흥안령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국의 중원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만주일대에 거주하던 우리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들은 선비족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마침내 668년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당나라에게 져서 멸망했다. 그리고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고구려와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겨우 승리한 당나라는 쇠진한 국력으로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이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의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영토를 장악했다.

(전성기의 발해)

그런데, 역사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남겼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 『신당서』와 『구당서』에서 그렇게 기록했고, 일본 역사서 『유취국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집단이 되었고, 우리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전 세계 역사에서 이런 미스테리한 일이 또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고대에는 인구수가 많은 종족이 강자이고, 그들은 넓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인구수가 적은 종족은 약자로서 좁고 척박한 땅에 살았다. 먹고 살 식량이 중요했던 그 시대에는 넓고 비옥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인구수가 빠르게 증가했고, 척박한 땅에 살던 사람들은 그만큼 인구 증가도 느렸다. 광대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살았던 우리민족의 인구수가 숙신족에 비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해야 했다. 역사는 그렇게 진해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만주의 역사는, 3세기에서 8세기까지의 오백년의 만주역사는 정확하게 그 반대로 흘렀다. 그리고 8세기 말의 만주는 우리민족이 아니라 숙신족의 땅이 되어 있었다. 만주의 주인공이 바뀌어 있었다고 역사기록은 전하고 있다.

기록이 잘못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에는 진리가 있다. 어느 땅에 어느 민족이 계속 머물러 산다면, 다른 민족의 침입으로 잠시는 지배받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민족 중에서 새로운 왕조가 그 땅에서 반드시 다시 일어나곤 했다. 이것이 역사의 진리이다. 그러나 만주의 역사는 일부 사가(史家)들이 주장하는 ‘역사 기록의 오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동북아 북방 민족들의 모든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모든 민족들이 점차 인구가 불어나서 강해지면, 중국의 중원을 향하여 남하했다. 동북아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흉노가 그랬고, 그 이후의 선비, 거란, 숙신(여진족)), 몽골, 다시 숙신(만주족)이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 왕조 역사에 그들이 세운 왕조의 자취를 남겼다.

(동북아 제민족의 이동)

만주에 살던 우리선조들도 중국으로 남하했을까? 절대로 아니다. 만약 남하했다면, 중국 왕조 역사에 우리선조들이 세운 왕조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 왕조 역사에 그런 것이 없다.

*우리민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넓고 비옥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살던 북방의 강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기에, 불과 7분의 1밖에 안되던 변두리의 소수민족 숙신이 8세기에 만주의 주인공으로 돌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사라진 이후, 남은 우리들은 소수민족으로 급전직하했다.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는 소수민족으로서 북방에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을 맨몸으로 겪어야 하는 끝없는 시련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족의 세 번의 침략, 여진족의 침략, 몽골의 일곱 번의 침략, 외의 임진왜란, 청나라의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마침내 나라를 잃는 한일합방까지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으며, 지난 1천년의 시간을 견뎌내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도 동북아의 소수민족으로서 운명을 짊어지며 살고 있다. 떠난 자들로 인하여 남은 자들의 운명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 떠난 자들을 되찾는다면, 남은 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바뀔까?

2.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롬부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고자 하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하였고, 그로 인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어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 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고,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을 받았고, 그것을 그림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흥분했다. 신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독교 국가인 유럽은 구약성경에서 사라진 ‘단’지파의 후예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약성경에는 야곱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택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버린 ‘단’의 후예들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경우처럼 19세기까지도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한 사람도 있다.)

그 당시, 스페인은 유럽국가들 중에서도 기독교신앙이 매우 깊던 나라였다. 전국에 많은 수도원이 널려 있었고, 평생을 성경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학문을 연구하던 세계 최고의 학자들이 있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택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학자이면서 기독교 신부인 그들을 대거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자기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밋이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고조선의 아사달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밋이 있다. 모든 피라밋은 위가 평평하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말하는 언어를 무슨 언어라고 하는지 명칭을 몰랐다. 그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 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년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3. 멕시코 원주민으로서의 우리민족

* 남자들의 모습

(1) 상투

(2) 갓과 두루마기

* 여자들의 모습

(1) 한복과 가체(加?)

(아스택의 여인)

(아스택의 귀족 여인)

(18세기 신윤복의 그림)

(2) 비녀와 쪽진 머리

우리나라 멕시코

미국 코네티컷-주의 인디언들의 전쟁 무기.

Conneticut - ‘beside big river(큰 강 가까이)’

Con + ne + ti + cut

큰 내 티(터) 곳

(3) 머리꽂이와 봉잠

(우리나라/조선조 말)

(멕시코)

(영왕비의 소립봉잠)

(멕시코의 봉잠)

(4) 붉은 볼연지

우리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볼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쌍영총(5세기 말)의 볼연지 여인들

아래 벽화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미국 남부 아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세 번째 그림은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민족의 후예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멕시코(1세기~7세기)

미국 남부 아리조나

미국 중북부의 슈족의 추장 부부

(19C말)

19세초 초반의 슈족 추장 - 상투하고 머리에 새깃털을 꽂았다

슈족의 원래 명칭- Nadowesioux: ‘나도 왔슈’

일리노이주 고인돌 Illinois ? ‘이리 놔’

황해도 은율군 관산리 고인돌(기원전1천년)

4.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풍습

* 창포에 머리 감고

1960년대의 멕시코 여인 - 푸른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에 머리를 감고 있다.

* 여인들은 이고

(멕시코 여인)

(따배)

* 남자들은 지고

아래 그림들은 1540년대 그려진 아스택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 금줄과 정한수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 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아래는 우리나라의 금줄이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카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아래의 첫째 그림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 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이다. 둘째 그림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마틴이(tlamatini) - 점(占)쟁이: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태어난 아기의 운명을 묻고, 점쟁이는 금줄을 먼저 주고, 그 아기의 운명을 점치는 모습이다.

산신제를 지낼 곳의 나무에 금줄을 쳐 두고, 무당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알리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 멕시코 원주민과 우리민족은 악기도 같았다: 예) 징

(아스택의 징)

(우리의 징)

* 사주(四柱)와 점(占)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

히의보왈리(Hiuhpohualli)- ‘해를 보아서’ ‘해를 보니’

토날보왈리(Tonalpohualli)- ‘신성한 날을 보아서’ ‘신성한 날을 보니’

* 언어의 일치

히= 해

날= 날

보다, 보아(서) = 보알리

* 중요한 점: 우리와 멕시코의 풍습이 일치하고, 그 풍습에 사용된 ‘말’이 일치한다.

‘말’의 뜻이 ‘그 풍습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육아 풍습: 업고 다녔고, 젖을 줄 때 ‘찌찌(tzitzi)’라고 말했다.

아래 사진은 맥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은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

(20세기 중엽의 우리 육아 모습)

1540년 경에 스페인 카톨릭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들은 아이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이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했다. 또 등에 업은 아이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고 해석까지 했다.

* 5일장

우리민족은 옛날부터 5일마다 장을 여는 풍속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풍속은 아직까지 이어져서 전국의 많은 곳에서 지금도 5일장이 열리고 있다. 시골에서는 장날에는 농사일을 쉬고 장보러 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멕시코의 원주민 풍속 - 5일장 (20세기 중엽)- 모두가 흰 옷을 입은 모습.

* 놀이 풍습

(1) 팽이치기

(2) 공기놀이

“여자들 두 명이 하는 놀이이다. 5개의 둥근 조약돌을 먼저 준비한다 먼저 하는 여자가 그 다섯 개 돌중에 하나를 ‘나의 돌’로 골라서, 그것을 공중으로 던지고, 눈은 그것을 보면서, 그 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땅에 있는 네 개의 돌중에 하나를 집는다. 이렇게 땅에 있는 돌들을 차례로 하나씩 다 집은 후에, 그 여자는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한 번에 두 개씩 집는다. 그 다음에는 세 개를 집고, 나머지 하나를 집는다. 그 다음에는 땅에 있는 돌 네 개를 동시에 집는다. 여기까지 성공하면, 이긴다. 그 다음 놀이는 더 어렵다. 돌 하나를 선정하여, 앞의 게임처럼 공중으로 던진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이 만든 아치(원형 홀)-검지는 중지 위에 겹쳐 놓는다- 속으로 땅에 놓인 돌을 밀어서 집어넣는다. 순서는 첫 번째 놀이와 같다 (즉 처음에는 하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세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은 후,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고, 마지막엔 네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는다). 세 개를 먼저 집어넣고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어야 할 때, 상대방이 돌 하나를 지정하면, 그 돌을 선택한다.”

(3) 윷놀이

윷놀이의 시작은 우리민족 부여이고, 윷놀이는 말 경주를 본떠서 만들었다. 그래서 윷놀이 판을 ‘말판’이라고 부르고, 놀이 사용되는 돌이나 나무 조각을 ‘말’이라고 부른다.

만주에서 사라진 우리민족이 대거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따라서 이들이 즐겨하던 놀이가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놀이가 바로 윷놀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윷놀이에서도 말판에 사용된 돌을 ‘말(horse)’이라고 불렀다. 돌을 보고 ‘말’이라고 부르는 민족이 우리민족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윷판에서만 그렇게 부르는 것까지 같으면서.

아래는 미국 남부 아리조나주의 아리조나대학교 인디언 박물관에 보관된 인디언 윷놀이에 대한 설명이다.

1) 윷의 모양은 한 면은 평평하고 뒷부분은 둥글다.

2) 각 참가자는 자기 집에서 말을 출발 시킨다.

3) 움직이는 대상을 ‘말(horse)’라고 한다. (말로서 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4) 말이 출발하는 곳을 ‘집(house)’라고 한다.

5) 윷을 한 손에 수직으로 잡고서, 그 밑을 다른 손바닥이나 땅에 평평한 돌 위에 탁 친 후 공중으로 던져 떨어지게 한다.

5) 윷가락 가운데 서로 닿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던진다.

6) 1점당 한 칸씩 움직인다.

7) 점수는 최소한 5점을 넘어야 말이 집을 나올 수 있다.

8) 윷을 던져서 옮긴 말이 상대편의 말 위치에 오면, 상대편 말을 잡는다. 상대편은 말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한다. (상대편 말을 패퇴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낸다.)

9) 자기의 모든 말이 윷판을 돌아서 먼저 집으로 오는 자가 이긴다.

10) 우리의 ‘모’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오면 ‘조오타(jouta)'라고 했다. (특히 윷을 던져서 나온 숫자가 단번에 10이 나오면 이렇게 말했고, 한 번 더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인디언에게 직접 조사함)

5. 우리민족의 이동 루트

춥지(Chukchee/Chukchi) 반도- 춥지? 차버, 추버,

캄차카(Kamchatkan)반도 - 깜짝+칸 ‘깜짝스러운 곳’

한겨울에도 영하 9도까지 밖에 안 내려감.

6. 욱일승천할 우리민족

오늘날 아메리카는 백인과 인디언들의 혼혈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경우, 인구의 60%가 혼혈이고, 20%가 순수인디언들이다. 멕시코 인구의 80%에 인디언 피가 흐르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그들의 조상들은 어디서 왔는지 매우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하고, 전설 같은 그 근원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멕시코 남쪽의 중미 지역의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 등은 물론, 거대한 남미 대륙의 모든 나라의 인구의 절대다수가 인디언이거나 인디언 피가 흐르는 혼혈들이다. 오늘날의 그들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 백인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지배받던 그들이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바탕으로 각 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의 전 분야에서 주도세력으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인디언 출신 대통령까지 나오고 있고, 인디언 피가 흐르는 대통령뿐 아니라 장관, 기업총수, 대학총장 등등,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사회전면에 나서서 각 나라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근원을 알고 싶어 하고, 그리워한다. 전설같은 그 피의 근원지에 대하여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우리민족의 후예들이고,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이다. 이 사실이 이제부터 전세계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이 가만있을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그 진한 피의 형제들과 우리가 하나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북미 대륙의 미국의 인디언들도 옛날의 인디언이 아니다. 높은 교육을 바탕으로 미국의 정계, 관계, 재계에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캐나다의 인디언들은 캐나다 국회에서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이미 하고 있다. 캐나다 인디언들은 캐나다 건국의 주체로 처음부터 참가했고, 그들이 ‘노’하면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의 인디언들도 높은 교육을 바탕으로 점차 미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미국 백인들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 백인들도 ‘나는 몇 퍼센트 인디언이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즉 외모는 백인일지라도, 수백년의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도 많든 적든 인디언 피가 혼혈되어 흐르고 있고, 그 숫자가 매우 많다.

결국, 아메리카 대륙은 그 전체가 우리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피를 나눈 형제이다.

자원의 보고인 남미 대륙의 형제들, 북미의 형제들, 이들과 우리가 하나 될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우리민족은 이제 동북아의 약소민족으로서 겪어왔던 시련의 1천년이 끝나가고 있다. 만주 대평원을 차지하며, 북방의 강자로서 살았던 우리민족은, 발해시대를 끝으로 아메리카로 떠나버렸고, 남은 우리들은 동북아의 약소민족으로 전락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침략을 당하여,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고난의 1천년을 살아왔다.

이제 그 시련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이제부터 다가오는 시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십 개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우리 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시대이다. 그들과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로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가! 지구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환태평양 시대, 새로운 환태평양시대의 종주국으로서, 주인공으로서 우리민족의 모습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곧 다가올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위대한 선조들을 가진 후예로서, 오늘의 우리는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나라에 대한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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