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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국학원 학술회의]국학의 성과와 방향 2016.04.10  조회: 2375

[제 30회사단법인 국학원 정기학술회의]

 ◈ 일 시 : 2014년 6월 5일(목요일) 오후1시30 ~ 오후6시
 ◈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1층 강당(본관)

【주 최】 (사)국학원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의 성과와 방향

1. 목적
 ○ 21세기 다가오는 통일시대에  국학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가?

  현대의 가장 존엄한 인성이 무시되고 물질문명의 극에 달한 이 시대에 한민족의 위대한 정신을 일깨워 주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국학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가 ?
  다가오는 남북 대화합의 큰 기운과  대통합을 위한  통일의 구심점은 국학이다. 남북한 대통합 방향성은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우선 찬란한 우리의 상고사를 바탕으로 한 국학의 학문화와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료의 발굴 및 축적을 통한 국학을 기반으로 한 남북 대화합과 대통합만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전 세계에 알리고 인류문화를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는 토대와 지구촌 행복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 국학의 성과와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이번 학술대회를 개최 하고자 한다.


2. 학술회의 일정 및 프로그램

1) 일정
   ▶ 일 시 : 2014년 6월 5일(목요일) 오후1시30 ~ 오후6시
   ▶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1층 강당(본관)
   ▶ 주 최 : (사)국학원ㆍ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 프로그램
   ▶ 대주제 : 국학의 성과와 방향

<1부>
  [사    회]  진행자
  [국민의례]  사  회
  [개 회 사]  장영주 [국학원장]

<2부>
  [사  회]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제 1 주제? 현대 ‘韓國仙道’의 전개 양상과 ‘丹學’
                   발표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제 2 주제?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발표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제 3 주제? 국학과 국학운동
                   발표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제 4 주제? 국학의 성립과 국학적 요소
                   발표  김동환 [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종합 토론? 사회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부총장]
3. 학술회의 세부일정

시      간

내     용

비    고

부터

까지

소요

< 식전행사 > 사회 :

13:00

13:50

50′

? 자료집 배부,

   발표자 도착확인

참석자

13:50

14:00

10‘

? 가벼운 운동(도인체조 등)

국학원

14:00

14:10

10‘

?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묵념

사회자

14:10

14:15

5′

? 개  회  사

장영주 (국학원장)

14:15

14:20

5′

? 환  영  사

 

14:20

14:25

5‘

? 참석자 소개

 

14:25

14:30

5′

? 회의장 정리

주 최 측

< 제 1 부 - 학술회의 >   사회 : 김광린 교수

14:30

15:05

35'

? 1 주제 발표

정경희

15:05

15:40

35'

? 2 주제 발표

신운용

15:40

16:15

35‘

? 3 주제 발표

조남호

16:15

16:30

15‘

? 휴식

 

16:30

17:05

35‘

? 4 주제 발표

김동환

17:05

17:15

10‘

? 휴식 및 발표장 정리

 

17:15

17:55

40‘

? 종합토론

사회

17:55

18:05

10‘

? 폐회 및 기념촬영

주최측

 

 

 

▶ 저녁 만남의 시간

 


목     차


1. 현대 ‘韓國仙道’의 전개 양상과 ‘丹學’ 1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2.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31
    ?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3. 국학과 국학운동 57
    ?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4. 국학의 성립과 국학적 요소 67
    ? 김동환 [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5. 종합 토론
현대 ‘韓國仙道’의 전개 양상과 ‘丹學’
현대 ‘韓國仙道’의 전개 양상과 ‘丹學’

┃2014년 6월┃ [제 30회 사단법인 국학원 정기학술회의]  국학의 성과와 방향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1. 머리말
  2. 한국선도 수련의 대중화
  3. 한국선도 氣學의 현대화
  4. 한국선도 수련법의 현대화
  5. 한국선도의 세계화
  6. 현대화·세계화속의 한국선도 원형
  7.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선도’는 한국사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고유의 사유체계로서 수련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상고 이래 줄곧 한국사상의 원류로서 기능하여 왔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國學科 교수
 한국 고유의 사상 전통은 風流道, 風月道, 仙道, 神仙道, 倧敎, 神敎, 古神敎, 仙敎, 仙家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어 왔는데, ‘仙道’, ‘神仙道’, ‘倧敎’, 仙敎 등의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단순한 종교나 신앙 전통이 아니라 ‘신선(仙?倧?佺)’으로 표상화되는 바 전인적 인격체가 되는 심신 수련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고유 사상이 단순한 종교?신앙이 아니라 수련법에 바탕한 사유 체계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계통의 용어중 ‘仙道’라는 용어를 선택하게 된다. 또한 이것이 崔致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도교 전통(세분화하면 도가철학?도교신앙?내단수련법)과 분명히 다른 사상이라고 한다면 ‘韓國仙道’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졸고, 2004 ?韓國仙道의 수행법과 祭天儀禮???道敎文化硏究??21 한국도교문화학회 : 2008 ?중국의 ‘음양오행론’과 한국선도의 ‘삼원오행론’???동서철학연구??49 : 2012 ?한국의 선도수행으로 바라본 중국의 內丹 수행???仙道文化??13)
 한국선도에 대해서는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 국어학, 국문학, 민속학 등의 분야에서 적지 않은 연구성과의 축적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한국선도가 중국의 도교 전통과 구분되는 고유의 문화?사상 체계로 바라본 연구는 아래와 같다.(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72 ?東國古代仙敎考(1910年)???丹齋申采鎬全集??別集 : 李能和(李鍾殷 譯註), 1925(2000)??朝鮮道敎史??보성문화사 : 車柱環, 1978(1997)??韓國道敎思想硏究??서울대출판부 : 宋恒龍, 1987 ?韓國古代의 道敎思想???道敎와 韓國思想??범우사 : 崔三龍, 1987?仙人說話로 본 한국고유의 仙家에 대한 연구???道敎와 韓國思想??범우사 : 李乙浩, 1990 ?‘한’ 사상의 구조적 성격과 역사적 맥락???한사상의 이론과 실제??지식산업사 : 都珖淳, 1991?한국사상과 신선사상???도교학연구??7 한국도교학회 : 都珖淳, 1991 ?韓國道敎의 史的 연구???도교학연구??7 한국도교학회 : 尹乃鉉, 1992??古朝鮮硏究??일지사 등 )
  삼국 이래 중국에서 도입된 三敎(道敎·佛敎·儒敎)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한국선도는 점차 퇴조, 불교와 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선·불 사상을 시대이념으로 하였던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 선도와 극히 대척적인 유교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되자 선도는 이단시되었고 민속·무속의 차원으로 저락되었다. 졸고, 2006「선도의 잠복」『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조선말 유교성리학 이념이 時宜性을 상실하게 되자 기존에 성리학에 의해 이단으로 억압받아온 사상들이 다시 양성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특히 한국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갔던 사상은 선도였다. 선도는 한국인들 스스로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의식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상적 혼란기에는 의식의 중심자리에 있던 것이 터져나오기 마련이었다.  이즈음 선도는 東學, 正易, 甑山道, 大倧敎, 檀君敎 등 대체로 민족종교의 형태로 등장하였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대종교 계열이 선도의 원형에 가장 충실하였다. 졸고, 2006「선도의 약진」윗책 725쪽
 대종교는 한국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선도 성향을 자극하였고, 1910?20년대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는데, 특히 극성기인 192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20만~30만의 대종교도를 거느릴 정도로 일대 선도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박영석, 1983「大倧敎의 민족의식과 항일독립운동」상·하『한국학보』31·32 : 김동환, 2001「大倧敎 抗日運動의 정신적 배경」『국학연구』6 국학연구소 등

  한국 근대시기 어렵게 발아한 선도는 선도의 민족적 성향을 경계한 일제에 의해 저지된다. 일제의 선도 탄압은 대종교 박해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식민사관’을 통한 간접적이고 지능적인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식민사관의 관건인 단군 말살은 단군 인식의 기반이 되는 선도의 말살에 다름아니었다.  뿐아니라 일본을 통해 새롭게 도입된 서구사상·문화의 위상이 차츰 높아져가게 되었다.  1930·40년대 일제 식민통치의 진전은 일제를 매개로 한 서구화의 진전에 다름아니었고 이 과정에서 선도는 점차 약화되어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그간 일제의 탄압과 서구사상·문화의 우세 속에서 입지가 좁아져 있던 선도가 재기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고 한국선도는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연구자는 광복 이후 선도의 변화 양상 중에서도 특히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의 변화에 주목해보는 입장이다. 이즈음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등장하면서 선도수련법이 널리 보급, 선도가 대중화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2000년대 이후부터는 세계화하는 면모까지 나타났던 때문이다.  1910·20년대 한국선도가 대종교를 중심으로 일시 부흥하였다가 사그러든 이래 가장 큰 약진을 보인 시기이기도 했지만, 특히 1970년대말까지 한국선도가  민속·무속 정도로 인식되던 상황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계화 현상이 나타났던 시기였기에 이에 대한 연구가 요구되었고, 이에 연구자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당시 선도의 성장세를 추동했던 ‘丹學’ 계열을 중심으로 선도의 변화 양상을 고찰한 바 있다. 졸고, 2006 윗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선도는 많은 변화상을 보였는데 그 중심에 ‘단학’ 계열이 자리하고 있었던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앞서의 연구에다 이후 10여년의 변화상을 추가,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선도의 전개 양상을 새롭게 분석하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특히 이 10여년간 선도사상이나 선도사 등 한국선도 방면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대폭 수용함으로써 이시기 선도의 전개상을 보다 깊이있게 천착하고자 하였다. 
  먼저 제2장에서는 이시기 선도수련법이 대중화하는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 또한 선도수련법이 대중화할 수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요인으로 한국선도의 현대화라는 요인을 제시하였다.  제3장에서 그 현대화 양상의 첫 번째 요소로 선도 기학이 현대화한 면모를 살펴볼 것이며 제4장에서는 그 두 번째 요소로 선도 수련법이 현대화한 면모를 살펴볼 것이다. 제5장에서는 선도의 현대화가 가능하였기에 더 나아가 세계화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고 세계화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6장에서는 선도가 현대화하며 또 세계화하는 추세 속에서도 한국선도의 원형이 지켜갔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한국선도 수련의 대중화
  일제시기 선도의 중심이 대종교였듯이 광복 이후 선도도 대종교 계열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상해임정에서 대종교계 인사들의 활약이 컸기에 광복후 새로 수립된 정부내에서도 대종교 계통 인사들의 비중이 적지 않았는데,  民政長官 安在鴻, 대한민국정부 초대부통령 李始榮, 국무경리 李範奭, 문교부장관 安浩相, 감찰위원장 鄭寅普, 審計院長 明濟世, 국방부장관 申性模 등을 위시하여 다수의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선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1948년 9월 檀紀 사용이 결정되었으며 1949년에는 양력 10월 3일이 ‘開天節’로서 국경일화하였으며,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선도의 ‘홍익인간’ 이념이 채택되었다.  또한 대종교는 종단 제1호로 등록되었으며, 선도이념에 입각한 학원 설립의 노력으로 弘益大學, 國學大學, 檀國大學 등 다수의 학원이 설립되었다.  대종교 계통 정치가들에 의해 선도이념은 정치이념화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조소앙의 三均主義, 안재홍의 新民族主義, 안호상의 一民主義이다. 졸고, 2009 「한국선도와 단군」122쪽~123쪽
 
  그러나 이러한 성가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해방 이전부터라도 일제를 매개로 한 한국사회의 서구화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해방 후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한국은 서구의 양대 사조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집중적으로 적용되면서,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양자의 대립점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 되었고 결국 6·25를 계기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졸고, 2006「선도의 약진」윗책 726쪽~727쪽
 
  남북 분단 이후 한국사회에 적용된 냉전 체제 하에서 남·북한 할 것 없이 모두 선도의 민족주의 노선을 거부하였고 선도는 크게 쇠락하였다. 정영훈, 2004「대종교와 단군민족주의」『단군학연구』10 300쪽
  남한의 경우 정인보, 조소앙, 조완구, 안재홍, 명재세와 같은 대종교계 인사 및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납북이 선도 약화의 일차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냉전체제 하에서 민족주의적 정서가 금기시되었던 점도 선도 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남한에서 새롭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미국을 통하여 서양사상이나 종교(기독교)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어갔던 이유도 컸다.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적 학문방법론에 의거할 때 한국선도는 원시신앙에 불과해진다.  동양사상들 중에서 불교나 유교 등 후대에 전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상들은 그나마 동양사상 전통의 하나로 학문적으로 인정되며 때로는 서양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되기까지 하였던 반면 한국선도는 ‘원시 샤머니즘(巫敎, 무속)’, ‘민간신앙’, ‘민족종교’ 등의 애매한 이름으로 격하되었다. 더우기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선도는 단군이라는 우상 숭배의 전통하에서 나온 ‘이단종교’에 불과해진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국선도는 상고 이래 한국사의 근간이자 한국적 정체성의 뿌리로서의 위상, 가깝게는 근대 항일독립운동의 주축으로서의 위상마저 심각하게 손상을 입을 정도가 되었다.  광복 직후에 나타난 선도 부활의 가능성들도 다시 사라져, 1962년 단기연호 대신 서기연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개천절도 형식적 국경일로 외면되어갔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으로 표방된 ‘홍익인간’의 이념 또한 형식적 구호로 전락되어갔다.
학문적으로도 신민족주의사학자들이 납북되면서 사학계내에서 실증사학이 우세해지고 식민사학에 대한 극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조동걸, 1998「해방후 한국사연구의 발흥과 특징」『한국현대사학사연구』나남출판사 392쪽~393쪽
 민족주의사학의 선도 연구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졸고, 2006「선도의 약진」앞책 729쪽~731쪽
  물론 사학계에서와 달리 철학, 국문학, 종교학, 민속학 계열 등에서는 민족주의사학자들의 선도 연구를 계승, 발전시켜갔고 그 결과 선도사상이 새롭게 ‘한사상’으로 정립되는 성과도 있었다. 안호상, 이을호, 최민홍, 송항룡, 김상일, 유병덕 등이 대표적이다.(김상일 등, 1990『한사상의 이론과 실제』지식산업사)
 그러나 이러한 선도 연구가 사학계로 수렴되지는 못하였기에 국민들의 역사인식 속에서 선도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하였던 점은 선도 약화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남북분단 이후 약화 일로에 있던 선도는 1970년대말·80년대초 무렵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주어지게 되었다.  곧 이즈음 그간 침체 일변도에 놓여 있던 선도가 선도수련법을 중심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이라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한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찾게 되었고 이러한 선상에서 동양사상이나 동양 명상법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구화된 동양사상 및 명상법인 TM(초월 명상), 마인드콘트롤, 아바타, 각종 요가나 중국계 기공 등에 관심이 높았으며 선도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1970년대 선도수련단체로는 正覺道(1970년대 중반 國仙道로 개칭)가 유일하였다. 정각도는 1967년 靑山 고경민 仙士에서 비롯되었는데 1970년대말에 이르기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고유의 선도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말· 1980년대초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 이즈음 ‘丹田呼吸’이나 ‘氣’를 표방한 많은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우선 1970년대까지 저조하던 國仙道가 선도사상과 수련법 체계를 정비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1985년에는 一指 李承憲(1950~현재) 仙士가 ‘단학’을 주창, 丹學仙院(2002년 단월드로 개칭)을 설립, 국선도와 함께 선도의 대표적인 양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외에도 1986년 韓國丹學會 硏精院, 1991년 道華齋 石門呼吸, 1998년 樹仙齋를 위시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등장하였다. 졸고, 2006「선도의 약진」앞책 733쪽~739쪽

  이처럼 1970년대말?1980년대초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한 선도수련단체들의 성장세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기왕에 등장한 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약세를 면치못하거나 경영난속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단학’ 계열만이 지속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는 이채로운 면모를 보였다.  단학은 국내외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세를 확장하여 선도수련단체의 대표격으로서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현재 국내 300여개 외에 일본,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중국 등 해외 여러나라에서 단센타를 운영하는 국·내외 최대 규모의 선도수련단체로서 선도의 대중화를 주도해오고 있다.
  이처럼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한국사회에 선도수련단체들이 집중적으로 등장, 선도수련법이 대중화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이러하다면 근대 이래 등장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선도의 주축이 되고 있는 민족종교들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민족종교의 경우 단순히 종교적인 신앙 차원에 머문 경우라면 민족종교로 범주화해야겠지만 종교적 신앙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선도수련(지감?조식?금촉수련)에 기반하여 ‘신인합일’, 또는 ‘천인합일’이라는 한국선도의 본령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경우는 비록 민족종교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선도수련단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기 대종교 등에 이어 광복 이후에도 正一敎(1965년, ‘한얼교’로 개칭) 이하 많은 민족종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선도의 변화된 흐름을 타고 선도수련법에 기반, 선도수련단체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경우로 仙佛敎(2000년)가 주목된다. 선불교는 1980년대 이후의 대표적인 선도수련단체인 ‘단학’ 계열에서 갈라져 나와 민족종교로 정립된 경우이기에 민족종교 중에서도 선도수련단체의 면모가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북분단 이후 약화 일로에 있던 선도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에 이르러 다시 한번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즈음 먼저  서구화된 동양명상법이 소개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한국선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였고 선도수련법의 보급을 통해 선도가 크게 대중화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계열로 ‘단학’이 있다. 한국 근대의 선도가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종교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과 달리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의 현대 선도는 선도수련법의 보급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흥한 특징이 있다.  근대 이후 선도가 민족종교의 방식으로 부활한 이래 선도는 민족정신, 또는 민족종교의 차원으로 이해되었을 뿐, 실상 선도의 본류라 할 수련법의 측면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련법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으니, 한국선도의 본령이 제대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해 보게 된다.

  3. 한국선도 氣學의 현대화
  앞서 1970년대말?1980년대초에 등장한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 중에서도 ‘단학’ 계열이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주도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단학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선도수련을 대중화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연구자의 경우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로 한국선도 전통을 현대화하였던 점을 들고자 한다. 단학이 선도수련 대중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첫째 조직과 운영 방식을 현대화한 점, 둘째 단학을 통해 심신이 좋아진 회원들이 ‘단학강사’로서 자율적이고 적극적으로 공원·학교·관공서·기업체·사회복지기관·군부대 등에 단학수련을 보급하였던 점,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한국선도 전통을 현대화하였던 점 등을 들 수 있다.(졸고, 2006 윗글 742쪽~743쪽)
 한국선도 전통에서 바라볼 때 단학이 주목되는 이유는 물론 현대에 등장한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세를 확장하여 한국선도를 대표하는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선도전통의 현대화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단학이 선도전통을 현대화한 면모는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점으로 한국선도의 요체인 ‘仙道 氣學’을 현대화한 측면을 들 수 있다.  한국선도를 대표하는 핵심 경전인『천부경』·『삼일신고』를 위시하여 민간의 오랜 선도전통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질로서 ‘一(한, 하느님)’을 제시하고 이를 이루고 있는 세 차원(三元)으로 ‘天·地·人 三(삼신三)’을 제시한다. 이는 ‘一·三, 삼신하느님’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종래 다양한 해석법이 있어왔는데, 단학에서는 이를 氣學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차이를 보였다.  곧 천?지?인 삼원을 기에너지의 3대 요소로서 설명하였는데 ‘天氣=정보?의식(정보·의식의 속성은 無·空이기 때문에 無·空으로 표현되기도 함), 地氣=질료·물질, 人氣=氣에너지’라는 해석이나 ‘天氣=빛光, 地氣=파동波, 人氣=소리音’로 설명하였다. 이승헌, 2001『힐링소사이어티를 위한 12가지 통찰』한문화 118쪽, 120쪽 : 2002『숨쉬는 평화학』한문화 143쪽
  곧 ‘천기=정보?의식=빛光, 지기=질료=파동波, 인기=氣에너지=소리音’으로 바라본 것으로 이는 기존의 해석법과 차별화되는 대단히 새로운 해석법이자 특히 선도 기학과 양자역학 등 물리학을 연동시키는 고리를 만든 이론으로 크게 주목된다.
  흔히 기라고 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에너지’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보·의식’이나 ‘질료·물질’까지도 포함,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로 바라본 것이니, 천·지·인 삼원은 모두 氣이며 단지 기의 형태만 다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곧 기는 ‘천기(정보?의식, 빛光) ↔ 인기(氣에너지, 소리音) ↔ 지기(물질, 파동波)’의 순으로 밝고 가벼운 차원과 어둡고 무거운 차원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졸고, 2009「한국선도의 ‘一·三·九論(三元五行論)’에 나타난 존재의 생성·회귀론 -한국선도의 수련 이론」『동서철학연구』53 280쪽
  이처럼 단학에서는 ‘一·三, 삼신하느님’의 실체를 기, 곧 ‘일기·삼기’로 바라보았는데, 그 효과적 의미 전달을 위해서는 주로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 ‘천지기운’, ‘생명전자’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기학적 관점으로『천부경』을 해석할 때, ‘進化創造·水昇火降·本性光明·宇我一體·영원한 생명’의 기에너지 원리가 제시되었다.(이승헌, 2002『힐링차크라』44쪽~48쪽)

  단학에서는 ‘일기·삼기’의 속성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해석을 하였다. 종래 일기·삼기의 속성에 대해서는『삼일신고』의 ‘無善惡(·無淸濁·無厚薄)’이라는 고전적인 해석이 있어왔다.  단학에서는 ‘일기·삼기’가 무심한 기에너지일 뿐으로 치우침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를 ‘無我, 無, 空, 0점’ 등으로도 해석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어떠한 私적인 치우침도 없는 ‘公(全體)’의 속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공전을 우선한 자전, 공평을 우선한 평등, 구심력을 우선한 원심력’으로도 해석, 선도 기학의 심오한 깊이를 드러내었다. 졸고, 2011「韓國仙道의 一?三?九論(三元五行論)과 日本神道」『비교민속학』44집 436쪽

  한국선도에 대한 단학의 기학적 접근법은 한국사 연구에도 큰 기폭제가 되었다. 먼저 ‘일기·삼기’적 인식은 한국 상고·고대사에서 널리 등장하는 ‘하늘(천)=밝음(빛)’ 신앙에 대한 획기적인 시각의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곧 단학의 해석법에 의하면 ‘일·삼, 일기·삼기, 삼신하느님’은 형태상 ‘미세한 소리音와 파동波을 지닌 빛光’이니 이것이 한국 상고·고대사에 널리 등장하는 ‘하늘(천)=밝음(빛)’의 실체임을 밝힐 수 있었다. 졸고, 2011「동아시아 ‘天孫降臨思想’의 원형 연구」『백산학보』91집 11쪽

  다음 한국의 구비설화나 민간전승, 또 선도서 등에 널리 등장하는 ‘마고(마고할미, 삼신할미, 마고여신)’도 선도 기학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우주의 근원적 생명력이자 법칙인 ‘일기·삼기’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졸고, 2007 「《符都誌》에 나타난 일?삼론」『선도문화』2 : 「동아시아 北斗-日月 표상의 원형연구」『비교민속학』46집 340쪽 
 종래 한국사속의 마고 전승들은 ‘하늘(천)=밝음(빛)’ 사상과 분리된 채 별개의 地母神(大母神) 신앙 정도로 인식되어왔는데 선도 기학의 관점을 통해 마고사상은 ‘하늘(천)=밝음(빛)’ 사상의 일종으로 수렴될 수 있었다.  또한 단학에서는 우주의 근원적 생명력인 ‘일기·삼기’가 北斗七星 근방에서 시작된다고 봄으로써 한국 상고 이래의 오랜 북두칠성(칠성) 신앙 역시 선도 기학의 일종으로 조명하였다. 졸고, 2011「동아시아 北斗-日月 표상의 원형연구」윗책 : 2011「동아시아 ‘天孫降臨思想’의 원형연구」앞책
 
  이상에서 단학이 한국선도의 요체인 ‘일·삼, 삼신하느님’을 ‘일기·삼기’로 바라봄으로써 한국 상고·고대사나 민속·무속 등에 널리 등장하는 ‘하늘(天)=밝음(빛)’ 사상, 북두칠성사상, 마고사상 등 다기한 계통의 선도 전통을 하나로 종합할 수 있었음을 살펴 보았다. 단학의 ‘일기·삼기’의 관점은 한국 상고?고대사, 특히 사상·종교사 방면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학에서는 ‘일기·삼기’를 대체로 아래와 같은 형태의 기표상으로 도상화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먼저 1기는 대체로 동심원(소용돌이)형 또는 약동하는 원형으로 표현되었다.(<자료1-1>) 다음 3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양인 삼태극형 또는 삼족오형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거나(<자료1-2-左·中>) 아니면 대종교의 천·지·인 표상인 원·방·각형을 가져와 약간의 변형을 주어 사용하기도 했다. 원·방·각형 위쪽에 배치된 약동하는 원형은 1기형 표상이고 그 아래에 배치된 원·방·각형은 3기형 표상이니 1기가 곧 3기라는 의미이다.(<자료1-2-右>)  또한 본질인 ‘일기·삼기’가 펼쳐지고 어우러져 현상의 물질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5기형 표상과 9기형 표상도 있다. 중앙의 일기·삼기가 현상의 물질계를 이루는 4대 원소로 분화되는 과정을 표현한 5기형 표상(<자료1-3>), 현상의 물질계를 구성하는 4대 원소를 다시 각각의 律·呂(음·양의 한국선도적 표현)로 나눈 9기형 표상도 있다.(<자료1-4>)

<자료1> ‘단학’의 기표상 ‘1氣’형 표상은 단학계 민족종교 仙佛敎의 ‘天符印’, 단학의 ‘생명전자’이다. ‘3氣’형 표상은 한국의 대표문양인 삼태극문, 고구려식의 3기형 표상인 삼족오문을 가져온 국학원의 삼족오문, 단학 초기의 敎旗 일종이다. ‘5기’형 표상은 단학 초기의 敎旗 일종, 9기형 표상은 단학의 敎旗 일종, 뇌호흡수련에 사용되는 뇌회로도 일종이다.

1. 1氣 -동심원(소용돌이)형 또는 약동하는 원형      2. 3氣 -삼태극형, 삼족오형, 원?방?각형
              

3. 5氣                        4. 9氣
                

  단학의 이 표상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이들이 한국 상고 이래 각종 祭天儀器나 신성표상물로 널리 사용되어 오던 기표상의 전통을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표상물의 원류는 동아시아 상고문화의 원류인 倍達古國 紅山文化의 祭天儀器나 司祭王의 權杖類 등이다. 배달고국의 기표상물들은 배달고국을 직접적으로 승계한 한반도?만주 일대는 물론 중원 일대, 일본 열도 일대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일원으로 널리 전파, 동아시아 신성 표상물의 원형이 되어오고 있다. 졸고, 2011「紅山文化 玉器에 나타난 ‘朝天’사상(1) - ‘1氣’·‘3氣’형 옥기를 중심으로-」『선도문화』: 2010「紅山文化 玉器에 나타난 ‘朝天’사상(2) - ‘2氣’·‘5氣’·‘9氣’형 옥기를 중심으로-」『백산학보』88 : 2011「韓國仙道의 ‘一·三·九論(三元五行論)’으로 바라본 日本神道」앞책 : 2011「동아시아 ‘北斗-日月’ 표상의 원형 연구」앞책
  이중에서 한반도?만주 일대, 곧 한국사에 나타난 기표상물들을 아래에 제시하였는데, 이들을 ‘단학’ 기표상의 원류로 바라보게 된다.(<자료2>)

<자료2> 배달고국 홍산문화 이래 한반도?만주 일대의 기표상 ‘1기’형 표상의 경우, 상단은 左로부터 동심원형(소용돌이형):홍산문화의 一渦玉佩 2종,  용형: 玉龍 3종,  하단은 左로부터 원형:玉璧 2종, 원통형: 筒形玉器 3종 및 彩陶筒形器이다.  다음 ‘3기’형 표상의 경우, 左로부터 홍산문화의 三太極玉璧, 3종, 고조선의 三太極靑銅牌飾(敖漢旗 出土), 가야의 靑銅三環鈴이다.  ‘5기’형 표상의 경우, 左로부터 紅山文化의 5氣形 渦形玉佩, 고조선의 圓形有文靑銅器(益山 出土), 1세기경 巴紋漆器(光州 出土), 금관가야의 巴紋靑銅器, 백제의 瓦當(수막새)이다.  다음 ‘9기’형 표상의 경우, 左로부터 紅山文化의 八葉玉斧, 고조선의 靑銅八柱鈴, 고조선의 靑銅細紋經, 백제의 八葉蓮花紋 벽돌, 고구려 덕화리1호분 천정화, 고구려 안악3호분 천정화이다.( 졸고, 2011「紅山文化 玉器에 나타난 ‘朝天’사상(1) - ‘1氣’·‘3氣’형 옥기를 중심으로-」윗책) ; 2010「紅山文化 玉器에 나타난 ‘朝天’사상(2) - ‘2氣’·‘5氣’·‘9氣’형 옥기를 중심으로-」 앞책)

 1. ‘1氣’ -동심원(소용돌이)형, 용형, 원형 및 원통형


 2. ‘3氣’ -삼태극형
 
3. ‘5氣’
 
4. ‘9氣’


  이상에서 단학의 기표상들이 배달고국 홍산문화 이래 한반도?만주 일대로 전해진 기표상물 전통, 더 정확하게로는 한국선도의 기학 전통을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선도의 침체 과정에서 한국선도 기학의 원의미가 잊혀지고 민속·무속 등 다양한 형태로의 곡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오랜 시대의 격간을 뛰어넘어 선도 기학의 원형이 회복된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현대 단학에 이르러 한국선도 기학이 새롭게 되살아나고 정립됨으로써 한국선도는 새로운 발전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4. 한국선도 수련법의 현대화
  앞서 단학에 의한 한국선도 기학의 회복 및 현대화 과정을 살펴 보았다.  선도 기학의 현대화는 당연히 선도 기학에 기반하고 있는 선도수련법의 현대화와 맞물리게 된다.  단학이 이루어낸 선도 기학의 현대화라는 성과가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를 통해 선도 수련법이 현대화되었고 또 선도수련법의 현대화를 통해 선도의 대중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선도 기학에서는 ‘일기·삼기’에서 현상의 존재계가 생성되고 사람을 위시한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다고(始) 보며 현상의 존재는 언젠가는 다시 본질인 ‘일기·삼기’로 회귀하게 된다는(終) 인식, 곧 ‘일기·삼기’ 내에서 존재의 생성(始)과 회귀(終)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주기론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렇게 생겨난 사람과 만물 중에서도 오로지 사람만이 ‘일기·삼기’를 온전하게 갖추었기에 사람만이 ‘일기·삼기’로의 회귀가 가능하다고 보며 사람의 ‘일기?삼기’로의 회귀를 위한 방법으로 ‘1단계 性通(수련, 지감·조식·금촉 수련)→ 2단계 功完(대사회적 실천, ‘홍익인간·재세이화’)→ 3단계 朝天(化, 최종적인 존재의 회귀)’를 제시한다. 졸고, 2007「한국선도의 삼신하느님」『도교문화연구』26집 51쪽~61쪽 : 2012「한국선도의 일?삼?구론(삼원오행론)에 나타난 존재의 생성?회귀론」앞책 294쪽~299쪽
 
  이중에서도 1단계 性通(수련, 지감·조식·금촉 수련)은 선도수련 단계이다. 선도수련의 요체이자 원론인 지감·조식·금촉론은 실상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있기에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현대인들이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지감·조식·금촉 수련법에 다가갈 수 있도록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  선도수련법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지감·조식·금촉의 원론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시대 변화에 따른 변용은 불가불 필요한 것이다.
  단학은 지감·조식·금촉의 원론 내에서 다양한 수련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고전적인 선도수련법으로 알려진 도인체조, 단전호흡(行功), 기공류의 프로그램 외에도 진동수련, 丹舞수련, 丹功수련, 힐링차크라수련, 심성수련, 민족혼수련, 효충도수련, 뇌호흡수련, 뇌파진동수련, PBM(Power Brain Method) 수련, 長生步法 수련, 영가무도 수련, 생명전자 수련, 磁氣명상 등 수많은 수련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이들 수련프로그램들은 누구나 쉽게 기감각을 터득하여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생명력(일기·삼기)를 효과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간이한 방식을 지향하였고 이에 따라 규격화·표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단학의 수련프로그램들은 현대인들의 심신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기에 프로그램의 초점이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간 측면이 있다. 단학이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주로 신체 건강 문제에 집중되었기에 수련법도 下丹田 중심의 형태를 보였다. 1990년대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신체 단련 외에 마음 방면으로도 확대되면서 수련법도 中丹田 중심의 형태로 옮겨갔다. 1990년대말 무렵부터는 ‘뇌’가 강조되던 시대분위기와 맞물려 수련법도 上丹田 수련법 중심의 형태로 옮겨갔는데, 특히 이 과정에 등장한 ‘뇌호흡’ 수련법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졸고, 2006「선도의 약진」앞책 743쪽~744쪽
 
서구의 선진국들은 훨씬 이전부터 국책사업으로 ‘두뇌 연구사업’을 기획,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가며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서구사회의 두뇌 연구는 인공두뇌, 뇌정보 처리, 생물학적 매카니즘 연구, 뇌기능의 공학적 연구 등 주로 뇌과학 분야에 집중된 것으로 뇌의 물리적, 기능적 연구의 축적은 있었으나 인간 존재의 본질과 연결된 뇌의 기능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뇌의 상태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면에서는 취약점을 지녔다. 이러한 상황에 등장한 뇌호흡 수련법은 ‘일기·삼기’의 기에너지를 활용하여 뇌의 상태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점에서 획기적인 차이를 보였다.
  ‘뇌호흡’ 수련법은 1990년 12월 한국인체과학연구원(2002년 한국뇌과학연구원으로 개칭)의 설립 이래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1997년『뇌호흡』(영문판 및 한글판), 1999년『뇌호흡2』, 2000년『뇌호흡3』, 2002년『뇌호흡』(개정판), 2007년『뇌안의 위대한 혁명-B.O.S』, 2008년『뇌파진동』, 2010년『뇌교육원론』, 2012년『뇌철학』등이 연달아 출간되면서 이론 및 수련 체계를 갖추어갔다. 대중서로『임산부를 위한 태교 뇌호흡』(2002년),『아이 안에 숨어있는 두뇌의 힘을 키워라』(2005년),『뇌를 알면 행복이 보인다』(2006년),『수험생을 위한 뇌호흡』(2007년),『5분 뇌호흡』(2007년) 『뇌파진동으로 기적을 창조한 사람들』(2009년) 등도 출간되었다.
 뇌호흡의 기본 이론으로 ‘뇌호흡 5단계론’이 제시되었고 주요 수련법으로 PBM, 뇌파진동 등이 나왔다. 근래에는 ‘뇌호흡’수련법을 포함하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뇌교육’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뇌교육’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지만 특히 초·중·고등학교 인성 교육에 도입, 집중력 향상과 정서조절을 통한 학교폭력 해결의 효과가 입증되는 등 성과를 보임으로써 학교 인성교육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뇌교육’은 2008년부터 ‘뇌교육 해피스쿨’ 프로그램의 형식으로 초·중·고등학교에 도입, 현재 4백여개의 학교에 도입되었다. 특히 집중력 향상과 정서조절을 통한 학교폭력 해결에 큰 효과를 보여 2009년 ‘뇌교육 해피스쿨’ 프로그램을 도입한 충북 형석고등학교는 2012년 7월 교육과학기술부가 주최한 제1회 학교폭력 예방 및 근절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단학의 등장 이후 선도수련법이 점차 현대화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뇌교육은 선도 현대화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크게 주목된다.  물론 단학의 많은 수련법들이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한 형태이지만, 특히 뇌교육은 뇌가 강조되는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방향 전환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뇌교육은 교육학, 과학, 의학,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되고 있지만 본질은 한국선도에 다름아니다.  뇌교육을 통해 사람을 위시한 모든 존재의 본질인 ‘생명력’, 곧 일기·삼기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며(성통, 깨달음), 이러한 자각으로 인해 자신과 전체사회의 생명력을 회복하고자 실천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게 되는데(공완, 홍익인간·재세이화, 깨달음의 실천) 이는 한국선도의 요체인 ‘성통·공완’ 전통에 다름아닌 것이다.
  뇌호흡 수련법이 등장한 이후 시작된 뇌교육 관련 연구는 뇌교육 효과 검증 연구를 중심으로 국내외 학계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이제 15년여의 시간을 거치면서 뇌교육은 명실상부하게 한국선도의 새로운 분야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니 단순 효과 검증 연구를 넘어서 총체적 학문화의 과제를 남겨두게 되었다.
  2010년 무렵 한국선도 수련법은 뇌교육에 머물지 않고 다시 ‘생명전자 수련법’으로 경신되는 모습을 보였다. 『두뇌의 힘을 키우는 생명전자의 비밀』(2011년)에서는 우주의 근원적 생명력으로서의 ‘일기·삼기’에 대한 양자물리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이승헌, 2011『두뇌의 힘을 키우는 생명전자의 비밀』브레인월드
  단학 개창 이래 ‘천지기운’, 또는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 등으로 호칭되던 기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시작된 것으로 이러한 접근법의 변화를 담은 개념이 ‘생명전자’이다. 
  생명전자에 대한 과학 이론적 접근과 함께 생명전자수련법이 등장하였다. 카드 또는 동영상의 형태로 만들어진 ‘생명전자 표상’을(<자료1-1-右> 참조) 시각적으로 활용, 한국선도 수련의 원론인 지감·조식·금촉론에 따라 ‘금촉(하단전 각성 )→ 조식(중단전 각성)→ 지감(상단전 각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생명전자수련법의 보조수련법으로서 자기 에너지(Magnetic Energy)를 이용하여 기에너지 감각의 터득을 돕는  磁氣 명상법(『자기명상』, 2013년)도 나왔다 이승헌, 2013『자기 명상』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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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단학의 수련법이 1980년대 하단전 수련 중심, 1990년대 중단전 수련 중심, 1990년대말 상단전 수련 중심의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할 때 생명전자 수련은 이를 종합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특히 선도수련의 요체인 ‘일기·삼기’를 ‘생명전자’의 형태로서 시각화한 것은 선도수련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 의미가 있다. 
  이상에서 단학이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으로 선도기학의 현대화에 바탕한 ‘선도수련법의 현대화’ 요인에 대해 살펴 보았다. 단학은 완연히 새로워진 선도 기학에 바탕하여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해가기 시작하였는데 대체로 1980년대 하단전 중심, 1990년대 중단전 중심, 1990년대말 이후 상단전 중심의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1990년대말 이후 상단전 중심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뇌교육’의 형태로 현대화하였다.  단학의 많은 수련법들이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한 형태이지만, 특히  뇌교육은 뇌가 강조되는 시대변화를 적극 수용한 바, 선도 현대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010년대 선도수련법은 다시 ‘생명전자수련법’으로 변개되었다. 이는 앞서의 상단전 중심인 뇌교육 단계를 넘어선 총체적 수련법으로 선도수행의 요체인 ‘일기·삼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선도수련의 본령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 형태이며 특히 양자물리학과의 접목을 통해 선도수련법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단학은 선도수련법을 보급하되 시대변화를 적극 반영하면서 현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선도수련법의 원론에 충실하면서도 시대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선도수련법을 경신해나가는 유연성이 단학이 선도의 대중화를 주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5.  한국선도의 세계화
  1970년대말?1980년대 이후 등장한 선도수련단체들은 대체로 국내에서 기반을 확보한 후 해외로 진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단학은 규모나 운영 면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해오고 있다. 단학(국외용 호칭은 ‘단요가Dahn Yoga’)의 해외 진출은 1991년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비롯되었는데, 1993년 일지선사가 직접 미국 개척에 나서면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1997년·1998년 무렵 미국사회내 뇌호흡수련법의 보급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뇌교육은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서구사회에서 더 환영받은 측면이 있다. 이성적인 서구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단전’, ‘마음’이라는 개념 보다 눈에 보이는 ‘뇌’를 가지고 접근해 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초·중·고등학교에 뇌호흡수련이 도입되고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빈번하게 뇌교육 관련 강연회 및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졸고, 2006 「선도의 약진」앞책 747쪽~749쪽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던 뇌교육은 2008년 무렵부터는 유엔에서의 활동을 통해 전세계에 주목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2004년 뇌교육의 세계화를 위해 설립된 ‘국제뇌교육협회(IBREA)’는   2008년 유엔본부에서 뇌과학자, 교육학자, 유엔대사 등 세계 10개국의 5백여명과 함께 미래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뇌교육을 세계 교육계에 제시하는 ‘국제뇌교육컨퍼런스’를 개최,『주간조선』 2008년 8월 4일자 「특집기획 ‘21세기 신인류 두뇌짱의 시대’」등
 큰 주목을 받았다. 이어 2011년에는 중남미 엘살바도로에 ‘뇌교육 시범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성공사례가 유엔본부 총회에서 발표됨으로써 뇌교육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크게 높아졌고 그 선상에서 2012년 유엔본부에서 ‘뇌교육 국제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한국정부에서도 뇌교육을 ‘글로벌교육지원사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엘살바도르에 이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뇌교육 시범 프로젝트’가 도입되었고 독일 뒤셀도르프지역의 13개 학교에서도 뇌교육이 도입되었다. 뇌교육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워싱턴 D.C, 뉴욕 등 미국내 20여개 도시가 뇌교육의 날을 지정하였다. 2012년에는 미국 산타페시가 뇌교육도시로 지정되었고, 미국 하와이주에서는 국제뇌교육협회의 날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선도는 뇌교육을 통해 세계화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는데 2010년대부터는 한국선도가 새롭게 생명전자수련법으로 경신되면서 뇌교육과 함께 생명전자수련법이 선도 세계화의 또 다른 매개가 되었다.  특히 생명전자수련법은 단순한 수련법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를 통한 개인·국가·인류의 변화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곧 생명전자수련법이 제시됨과 동시에 이 수련법을 통해 개인·국가·인류의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의『세도나 스토리』(2011년),『변화Change』(2013년)가 나왔다.  이중에서도 특히『변화』는 ‘체인지, 생명전자의 효과’라는 다큐멘터리 영상물로도 제작되었는데 201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영성·종교·미래 국제영화제(IFFSRV)에서 골드어워드 및 5개 부문상을 시상하였다.
 다큐멘터리 영상물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명전자 수련법을 통해 개인·국가는 물론 인류문명이 상극·대립에서 상생·조화로 대전환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생명전자수련법 및 이를 통한 인류문화의 대전환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새롭게 온라인을 활용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던 점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2012년 멘탈헬스방송 www.mhtv.kr(생명전자방송국www.lifeparticletv.kr을 거쳐 현재 힐링명상체인지TV방송국www.changetv.kr로 개칭)이 그러하다. 온라인은 효과적인 선도수련법의 보급을 위한 좋은 매개였다. 
  이상에서 2000년대 이후 선도수련법이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보급되며, 2000년대말부터는 유엔을 통해 새로운 교육적 대안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선도의 전통에 의하면, 선도수련법의 보급은 단순한 수련법 보급의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 곧 한국선도의 대사회적 실천을 위한 기반 조성의 의미를 지닌다.
  선도 기학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본질은 ‘일기·삼기’의 생명력이기에 현상적 존재 양태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하므로 선도는 개인의 생명력 회복 뿐아니라 전체 인류의 생명력 회복까지 도모하며 더 나아가서는 세상 만물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지향한다.  이것이 개인의 생명력 회복을(性通) 전체 인류 차원으로 확대하는(功完) 성통·공완사상이요, 홍익인간·재세이화 사상이다.  개인의 생명력 회복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 인류의 생명력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되는 일부에게만 선도수련법을 보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전세계적인 차원의 선도수련법의 보급이 필요해진다.
  선도수련법이 널리 보급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자신속의 생명력을 자각해 갈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이 바뀐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이 손쉽게 자신속의 생명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배려된 사회 분위기와 환경, 그것도 전세계적인 차원의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실천운동 운동의 진정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선도수련법의 보급, 그것도 전세계적 차원의 선도수련법 보급이 곧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실천운동의 기반이 됨을 알게 된다.  
  이러하므로 1980년·1990년대 국내에서의 선도수련법 보급, 또 1990년대 미국사회에서의 선도수련법 보급을 통해 선도가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세계화되기 시작하던 2000년 무렵에 이르러 국제적 규모의 선도 실천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선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실천운동은 전세계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개념으로 번안될 필요가 있었기에 ‘지구인운동’으로 명명되었다. ‘지구인운동’의 등장은 선도수련법 보급에 기반하여(성통)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본령이 본격되기 시작한(공완) 시금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즈음 우선 지구인운동을 위한 이론서로서『힐링소사이어티』·『힐링소사이어티를 위한 12가지 통찰』(2000년) 및『숨쉬는 평화학』(2002년)이 나왔다. 『힐링소사이어티』·『힐링소사이어티를 위한 12가지 통찰』은 ‘지구인운동’의 필요성을 세계인들에게 호소한 책이며『숨쉬는 평화학』은 지구인운동의 구체적인 철학과 방법론을 제시한 책자이다. 특히『숨쉬는 평화학』에는 한국선도의 기본철학(삼원론), 방법론, 목표에 기초하여 2001년도부터 2010년까지 10개년 계획으로 구상된 지구인운동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선도수련법의 보급을 통해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정신을 실천하는 ‘1억명의 지구인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지구인운동의 구체적 목표로 제시되었다.『숨쉬는 평화학』에서 제시된 바, 지구인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 목표는 크게 3가지로, 첫째 전세계 36,000개의 선도 교육센타의 단계적인 설치, 둘째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정신을 실천하는 ‘1억명의 지구인 연대’ 형성, 셋째 ‘1억명의 지구인 연대’를 실질적으로 가동할 조직으로 ‘지구인연합(SUN)’ 창설이다. 마지막 단계인 ‘지구인연합(SUN)’은 여러 민족들이 같은 지구인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민족·국가간의 영적인 연대(Spiritual Union of Nations)로 지구평화의 실현이라는 유엔의 비젼을 공유하면서 문화운동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유엔의 활동을 지원하는 영적인 유엔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지구 곳곳에서 홍익인간·재세이화의 뜻을 공감하는 사람들의 수가 지구 인구의 1%, 곧 1억이 되면 인류 문명의 흐름이 바뀐다고 보았다.(이승헌, 2002『숨쉬는 평화학』쪽)
 
선도 실천운동으로서의 ‘지구인운동’은 기존의 지구평화운동에 비해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 수련법, 조직, 계획 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훨씬 선명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 상고?고대사에서 ‘성통?공완론’이나 ‘홍익인간·재세이화’론은 단지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사회 운영론 및 운영방식과 관련된 용어였는데 이러한 선도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지구인운동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2000년대에 들어 한국선도의 실천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선도는  ‘평화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또 ‘홍익인간·재세이화’는 ‘힐링소사이어티운동’, ‘지구인운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구인운동과 평화학, 또 그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서의 뇌교육학, 또 그 기반 학문으로서의 국학(한국선도)의 이론적 정립과 인재 양성을 위해 2003년에는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2007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로 개칭), 2010년에는 글로벌사이버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실제적인 지구인운동은 2001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인 ‘제1회 휴머니티컨퍼런스’(지구인 선언대회)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에서 ‘지구인의 날(6월 15일)’및 ‘지구인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어 지구인운동을 지원할 민간조직으로 2002년 ‘세계지구인연합회(WEHA)’, 2003년 ‘세계지구인평화운동연합(WEHAP)’, 2004년 세계지구인평화운동연합의 국제청년조직인 ‘세계지구인청년연합회’(YEHA, 지구인청년단)가 조직되었다.  2006년에는 ‘지구시민운동연합’이 결성되었고 이후 이 조직을 중심으로 ‘지구인운동’이 ‘지구시민운동’의 이름으로 전개되어오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선도는 수련법의 현대화라는 성과에 기반하여 2000년대 무렵부터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세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뇌교육은 뇌과학을 선도해가고 있던 서구사회에서 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크게 주목되었고 2000년대말 무렵부터는 유엔에서의 활동을 통해 보급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2010년대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생명전자수련법이 뇌교육과 함께 선도 세계화의 매개가 되었다.  선도수련법의 세계적 보급은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실천운동을 위한 기반이 되었고 이에 2000년대초 ‘지구인운동’의 이름으로 선도 실천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선도 실천운동으로서의 ‘지구인운동’은 기존의 지구평화운동에 비해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 수련법, 조직, 계획 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훨씬 선명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구인운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1억 지구인 연대’의 결성을 1차 목표로 활발히 진행되어오고 있다.

  6. 현대화·세계화 속의 한국선도 원형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선도 기학 및 선도수련법의 현대화에 기반하여 선도가 널리 대중화되고 2000년대 이후부터는 세계화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이렇게 선도가 현대화하고 또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선도 원형성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현대화나 세계화의 필요성에 따라 선도가 모습을 바꾸어 가게 될 경우 선도의 원형에서 벗어날 위험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삼국 이래 선도가 오랜 침체기를 지나면서도 현재에 이르러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선도의 원형이 분명하였던 때문이었다. 존재론(氣學), 인간론, 수련론, 실천론 등 모든 방면에서 한국선도의 원형을 상정해 볼 수 있지만 그 모든 원형성의 시작점은 존재론(기학)이다. 선도 기학에서 사람을 위시한 세상에 대한 인식, 사람의 본질 및 수련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서는 사람의 대사회적 실천에 대한 인식이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도 기학의 요체가 ‘일·삼, 일기·삼기, 삼신하느님’임은 앞서 살펴본 바인데, 구체적인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일·삼, 일기·삼기, 삼신하느님’은 대체로 그 자체로 강조되기보다는 그 화현인 ‘삼성三聖(환인·환웅·단군)’의 형태로 강조되는 경향이었다.  한국 상고·고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삼성이 大司祭(선도적 의미로는 ‘선도 스승師’)이자 군왕으로서 ‘일·삼, 일기·삼기, 삼신하느님’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던 때문이었다.
  한국 고대 이래의 많은 선도사서들에서는 ‘선도의 전승’이라는 기준으로써 한국사 계통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연원을 제시하고 있는 책자는『澄心錄』「符都誌」이다. 여기에서는 ‘麻姑城→黃穹族→有因氏→桓國→神市倍達國→檀君朝鮮’이라는 仙道正統論을 제시하며, 이외의 대부분의 선도사서들에서는 ‘桓國·神市倍達國·檀君朝鮮’ 三代를 선도의 원형기로 제시한다. 졸고, 2013「한국선도와《澄心錄》」『선도문화』14
  三代를 이끈 주역이었던 역대의 환인·환웅·단군은 한국사 전통 속에서 ‘三聖’, 또는 ‘三神’으로 통칭되어 왔다. 이때의 삼신은 물론 한국선도 일반에서의 ‘천·지·인’ 삼원으로서의 삼신과는 다른 ‘환인·환웅·단군 삼성’으로서의 삼신을 의미한다. 한국선도 전통에서 삼성은 선도수행을 통해 자신속의 ‘일기·삼기’를 회복하고수련법을 후대로 전승한 당대 최고의 ‘大司祭(선도 스승師)’이자(‘성통’),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실천에 충실하였던 군왕이며(‘공완’), 성통·공완후 최종적으로 우주의 근원적인 ‘일기·삼기’로 돌아가 하나된 존재(‘조천’), 곧 한국선도수련의 정석인 ‘성통→공완→조천’의 典範으로서 이야기된다. 졸고, 2009「한국선도와 檀君」앞책 100쪽~101쪽
 
삼성은 선도수행의 상징적 존재일 뿐아니라 실제수련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곧 선도수련시 수련자는 삼성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우주의 ‘일기·삼기’를 끌어 들일 수 있다. 선도수련의 일차적 관건인 우주의 ‘일기·삼기’는 이와 합일된 존재인 삼성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감지될 수 있었기에 우주의 ‘일기·삼기’가 곧 삼성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삼성은 우주의 ‘일기·삼기’와 수련자속의 ‘일기·삼기’를 매개해주는 존재로서 우주의 ‘일기·삼기’일 뿐아니라 모든 사람속에 자리한 ‘일기·삼기’로도 인식되었다.
  여기에서 ‘일기·삼기=삼성(선도 스승)=수행자속의 일기·삼기’라는 한국선도의 일대 원칙이 성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선상에서 삼성이 빠진 일반적 기수련은 한국선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현상도 생겨났다. 이러하므로 선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삼성’이 놓이게 되며, ‘삼성’의 위상 문제는 선도의 원형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졸고, 2012「한국선도 수행의 실제」앞책 131쪽~132쪽
 
한국선도의 이러한 원형적 삼성 인식은 고조선 이후 선도가 퇴조되는 국면 속에서 변질, 삼성이 ‘수련’의 매개라기보다는 ‘삼신하느님신앙, 삼성신앙(단군신앙), 칠성신앙, 미륵신앙’ 등 ‘신앙’의 대상으로 화하게 되었다. 선도전통이 약화되어 수련으로 스스로를 검증하지 못하니 형해화된 신앙의 형식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선도가 부활하는 과정에서 원형적 삼성 인식 또한 차츰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많은 선도계 민족종교들이 등장하였는데 삼성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가장 선명했던 대종교도 있지만 삼성의 기준이 선명하지 못하였던 경우도 많았다.  이때 삼성의 기준이 희미하였던 경우는 한결같이 선도에 여타 사상들을 회통하려는 성향이 강하였고 그 결과 선도적 기준이 분명치 못한 측면이 있었다.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등장한 선도수련단체들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여전하였다. 이즈음 고유의 선도를 표방한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등장하였으나 삼성에 대한 기준이라는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편차가 있었다. 단학의 경우는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 중에서도 ‘삼성’에 대한 기준이 가장 철저한 편이었다.  단학이 보급되던 초창기, 선도가 무속·유사종교 정도로 인식되던 시대 분위기 하에서 삼성·단군 할 것 없이 공히 무속신, 우상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다.  가령 1985년 서울시의 발의로 단군성전을 건립하려던 시도가 기독교세력의 ‘우상숭배론’에 밀려 중지되었던 사건은『주간종교』1985년 7월 10일「서울시 단군성전건립 백지화에 궁색한 변명만」: 『주간종교』1985년 8월 28일「“단군은 국조가 아니다”-기독교, 곳곳서 반대모임-」:『주간종교』1985년 11월 13일「“단군은 국조다” 밝혀-李元洪 장관 22일 국회 본회의서 답변」
 당시의 삼성·단군 인식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성을 강조하거나 삼성이 중심이 되는 ‘선도 祭天’을 거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단순히 심신수련법만을 보급하는 것이 세간의 논쟁을 피해갈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단학은 삼성을 전면에 내세웠고 삼성을 중심으로 한 선도 제천을 극히 중시하였다.
  단학의 삼성 강조는 단순한 삼성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점이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단학은 한국선도를 종교 차원이 아닌 내적 수련의 차원으로 접근, 한국선도의 수련적 본령을 강조하였다.  이러하였으므로 단학의 삼성 인식또한 종교적 ‘신앙’의 차원이 아닌 ‘수련’의 차원이었다. ‘일기·삼기=삼성(선도 스승)=사람속의 일기·삼기’라는 한국선도의 원형적인 삼성 인식을 따른 것이었다. 졸고, 2009「한국선도와 단군」앞책 126쪽 참조

단학은 처음부터 한국선도의 중심에 ‘삼성’을 두었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창기인 1987년 8월 25일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를 창설하고 ‘聖祖檀君崇奉國民大會’를 열어 단군을 ‘聖人’으로 선포하였는데, 이는  단군에 대한 ‘국조’ 차원의 인식을 넘어서 ‘일기·삼기=삼성(선도 스승)=사람속의 일기·삼기’로 조명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또 1998·99년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건립운동’은 단군의 ‘국조’로서의 위상 회복에 대한 당위성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었다.
  단학의 삼성 강조는 ‘선도 제천’의 본령 회복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단학은 ‘선도 제천’을 단순한 종교의례가 아닌 수련의례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국선도의 대표적 의례인 제천은 대표적인 수련의례로서 졸고, 2004「한국선도의 수행법과 제천의례」『도교문화연구』21집 59쪽
 고려시대까지 계속되다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 이르러 사라졌다. 졸고, 2005「한국의 祭天 전통에서 바라본 정조대 天祭 기능의 회복」『조선시대사학보』34집 166쪽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선도의 등장 과정에서 제천이 강조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데, 이시기 등장한 많은 선도수련단체들 중에서도 단학은 제천전통 부활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단순히 종교의례가 아닌 수련의례로서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단센타에서는 매달 제천수련이 정례적으로 행해졌으며 10월 개천절 행사를 위시하여 광복절 행사 이하 단학이 주관한 모든 주요 행사는 한결같이 제천수련제의 형식을 취하였다.  단학의 제천수련이 수련의례로서의 측면과 함께 모든 참가자들이 어우러진 흥겨운 축제 방식으로 치러진 것도 고대 이래 國中大會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단학은 초창기부터 삼성 및 제천을 수련적 차원에서 강조, 선도의 원형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2000년대 선도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이즈음 선도수련법이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세계에 널리 보급됨으로써 홍익인간·재세이화를 표방한 선도 실천운동으로서 지구인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지구인운동이 국학운동과 함께 병행되었다는 점이다. 선도 실천운동은 국내에서는 ‘국학운동’, 국외에서는 ‘지구인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국학운동’의 튼튼한 기초위에 ‘지구인운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니 국학운동과 지구인운동은 동전의 양면으로서 병행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02년 지구인운동을 위한 지침서로서『힐링소사이어티』·『힐링소사이어티를 위한 12가지 선택』·『숨쉬는 평화학』이 나온 동시에 국학운동을 위한 지침서로서『한국인에게 고함』이 나왔다. 여기에서는 단학·신선도·선도 등의 용어 대신 ‘國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니 선도는 한국의 오랜 고유전통으로서 명실상부한 ‘국학’이라는 의미였고 이와 함께 ‘국학운동’도 시작되었다. 같은 해 국학운동을 주도해나갈 일선 창구로서 (사)국학원이 설립되었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시도 단위로 구성된 지역국학원 및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국학운동시민연합 등 유관 단체들과의 공조를 통해 국학운동을 주도해가고 있다.  국학원에서는 국학운동의 시작과 함께 ‘민족혼’ 수련 및 ‘효충도’ 수련을 개설, 국학운동의 촉매제로 삼았으니 선도수련과 선도 실천운동이 하나로 연동된 성통·공완의 전통을 여기에서도 확인해보게 된다.
  국학운동은 대체로 ‘국사(특히 상고사?고대사) 개정 및 국사교육 강화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먼저 2003년~2005년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기 위한 국민운동으로서 ‘고구려역사 지킴이 활동’이 있었고 200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상고·고대사 관련 연대표 오류 시정을 위한 운동이 있었다. 2007년에는 제천단 등 전국각처의 선도 遺墟地에 천부경 비석을 건립하는 ‘천부경비 건립운동’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국학운동의 사상적 중심을 천명한 것이었다.  2008년에는 국학원 경내에 한민족역사공원이 설립, 박혁거세·고주몽·을지문덕·최치원·묘청·나철 등 역대 仙家들 및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설치되었고 또한 그 중심에 21미터(지상 33미터)에 달하는 한국사상 유래없는 초대형 단군상이 설치되었다. 한국선도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등장한 많은 선가들을 제시하고 그 수위에 단군을 놓음으로서 단군에 씌워진 ‘종교’의 굴레를 벗겨내고 한국 상고·고대문화속의 대사제(‘선도 스승’)이자 군왕으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2009년에는 미국 세도나 명상센타 경내에 초대형 마고상이 건립되었다. 앞서 마고(마고할미·삼신할미·마고여신)가 한국선도 기학의 요체인 ‘일기·삼기’의 다른 표현이며 역사적으로는 환국·배달국·단군조선 三代 이전사와 관련된 개념임을 살펴 보았는데, 단학에서는 그 의미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오다가 이승헌, 1999『사람안에 율려가 있네』한문화 : 2001『마고, 지구의 노래』한문화 : 2002『지구의 영혼, 마고의 꿈』한문화
 드디어 마고상을 건립하였다. 이보다 앞선 시기인 2000년 미국 세도나 명상센타 경내에 한국민속촌이 건립되고 단군상이 설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초대형 마고상까지 설치되었다. 단군상이나 마고상이 특히 선도 세계화의 중심지인 미국 세도나에 세워졌다는 점은 선도의 세계화가 국학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시금석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중 단군상의 경우 한국의 국조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국학운동을 넘어선 지구인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마고상의 경우는 ‘일기?삼기’를 상징하기에 국학을 넘어선 지구인운동의 상징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것이 선도 세계화의 차원에서 마고가 강조되는 이유이다. 비록 많은 오해 속에서 마고상이 철거되기는 하였지만 마고상의 건립은 한국선도의 시원에 대한 새로운 천명이자 선도 세계화의 방향의 상징물로서 향후 한국선도의 향방을 가늠해보기에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다.  2011년·2012년에는 상고?고대사 복원의 일환으로 단기연호 병기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 전개되었고 2013년에는 같은 선상에서 역사교육 및 우리말 교육 강화 2013년 출간된『행복의 열쇠가 숨어 있는 우리말의 비밀』에서는 우리말 속에 담긴 선도수련적 의미를 밝힘으로써 일상생활에 녹아있는 천손문화 전통이 강조되었다.(이승헌, 2013 『행복의 열쇠가 숨어 있는 우리말의 비밀』한문화)
, 단기연호 병기 등을 주장하는 ‘우리얼찾기 범국민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학운동은 한결같이 국학 연구와 병행되는 모습을 보였다. 국학, 곧 한국선도의 내용적 실체에 대한 학문적 기반 없는 국학운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때문이다. 가장 먼저 선도에 따라다니던 종교적 이미지를 불식하고자 전통적인 ‘神敎, 仙敎’ 등의 용어와 차별화하며 더하여 중국도교와의 차별성까지도 드러내는 ‘한국선도’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 한국선도라는 개념이 제시된 이후 우선적으로 한국선도와 중국도교에 대한 비교 연구가 시작되었다. 삼국 이래 한국선도의 약화과정에서 한국선도는 중국도교와 뒤섞여 그 고유한 내용성이 흐려지게 되었다.  근대 이후 민족종교가 등장하고 또 1970년대말?1980년대초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선도와 중국도교의 경계는 매우 애매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도교와 차별화되는 한국선도의 내용적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하였으므로 한국선도의 위상 정립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중국도교와의 관계 정리가 필요하였다. 연구 결과 한국선도 기학의 실체인 ‘三元五行論’은 동아시아 상고사상의 원류로서 중국도교의 ‘陰陽五行論’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임이 밝혀졌고 더하여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된 수련법의 차이, 대사회적 실천론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도 밝혀졌다. (주)1과 같음
 
  이렇게 한국선도의 사상적 원형이 제시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한국사 방면의 연구가 시작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2010년부터 한국 상고·고대사를 선도문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天孫文化’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간의 연구 결과 동아시아 상고사의 수위에 놓인 紅山文化가 倍達古國 환웅시대의 문화이자 동아시아 상고 천손문화의 원형으로서 중국?일본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갔음이 밝혀졌다. 국학원, 2010『동아시아 천손문화와 치우천왕(국학원 제20회 학술회의 자료집)』: 2010『천손문화와 환단고기(국학원 제21회 학술회의 자료집)』: 2010『東北亞 문화의 이해를 위하여 -동북아의 상고사 문화원류(국학원 제22회 학술회의 자료집)』: 2011『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2011『동북아시아 韓中日의 평화증진을 위한 천손문화 학술회의(국학원 제23회 학술회의 자료집) 』: 2011『단기연호 어떻게 볼 것인가? (국학원 제24회 학술회의)』: 2013『상고?고대시대 제천문화 복원 위한 정기학술회의(국학원 제27회 학술회의)』등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학은 선도의 현대화나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선도의 원형에 극히 충실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불가피하게 기독교측과의 마찰을 가져왔다.  기독교측에서는 단학을 단군신앙과 관련한 우상숭배집단으로 비방?공격하였는데, 이중에서도 1999년 설립된 단군상 360여기중 70여기가 기독교의 우상숭배론에 의해 훼손된 사건은 가장 처참한 사건으로 기억된다.『주간조선』1575호(1999년 10월 28일)「목잘린 단군상, 역사논쟁 비화」
  2000년대에 들어서는 뇌교육이 초?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크게 활성화되자 학교 뇌교육 보급의 저지에 주력하였다.『국민일보』(2009년 3월 15일자)「SEED(뇌기반 인성교육 프로그램), 두뇌계발 빙자한 미신 프로젝트」
 기독교측의 공세는 단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유도하였던 측면이 있다. 가령 단학을 신종교, 또는 국수주의로 바라보거나 佐佐充昭, 2004「현대 한국에서의 단학운동의 전개-단월드를 사례로 하여」『한국종교학회 추계학술대회 발표자료집』
 또는 근대에 재구성된 전통일 뿐으로 종교를 상품화한 것이라는 인식 우혜란, 2006「기수련 단체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세계화 기획-‘단월드’를 중심으로」『인문과학연구』11: 2008「신자유주의와 종교의 상품화」『종교문화비평』13 : 2011「한국 명상단체의 세계화 기획과 서구 사회의 대응-‘단월드’와 ‘마음수련’을 중심으로」『신종교연구』25
 등이 그러하다.
  단학의 성장 과정에서 민족사상과 가장 대척적인 지점에 놓여 있던 기독교측과의 갈등은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으나 단학 창립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기독교세력과의 분쟁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신학중 한국사회의 사상적 지반인 선도(풍류도?한사상) 전통 위에 기독교가 수용되어야 한다는 ‘풍류신학’이나 ‘한신학’의 전통에 주목해보게 된다. 유동식, 1982『한국신학의 鑛脈』전망사: 1983「풍류도와 기독교」『神學論壇』16집 연세대 신학대학 : 1984「한국문화와 神學思想: 風流神學의 의미」『神學思想』47호 한국신학연구소 :유동식, 1990「風流神學으로서의 旅路-‘한’神學의 전개 가능성에 대하여」『한사상의 이론과 실제』지식산업사: 성백걸, 1990 「恨과 ‘한신학’의 시도」『한사상의 이론과 실제』 : 오강남, 1990「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를 위한 촉매로서의 한사상」『한사상의 이론과 실제』 등
  이러한 역사적, 거시적 안목만이 불필요한 소모를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사 전통에서 한국선도가 차지해온 역사적 비중과 역할, 또 ‘성통?공완(홍익인간?재세이화)’이라는 한국선도의 내용적 실체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반하여 단학을 이해할 때 ‘신종교 세력’, ‘근대에 재구성된 전통’, ‘국수주의’ 등의 평가가 극히 피상적인 평가임이 자명해진다. 
  특히 기독교측을 위시한 많은 비판론자들의 비판의 핵심인 ‘삼성?단군에 대한 우상숭배나 일지선사에 대한 개인숭배’라는 비판의 경우도 한국선도의 일대 원칙인 ‘일기?삼기=삼성(선도 스승)=사람속의 일기?삼기’의 기준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할 때 삼성?단군에 대한 숭배가 우상 숭배 행위가 아니라 수련자 내면의 일기?삼기 회복을 위한 자력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단계임을 이해하게 된다.
  일지선사에 대한 개인숭배라는 비판도 그러하다. 선도가 민속·무속·유사종교로 인식되던 시기에 등장한 단학의 성장 과정에서 설립자인 일지선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양면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되는 부분이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단학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 평가는 더욱 양극화되었는데 한편에서는 2000년 유엔 밀레니엄 세계평화회의에서 ‘존경받는 50인의 세계 정신지도자’중 한사람으로 추대되어 개막식에서 연설을 하거나 미국 여러 시도에서 그를 위한 기념일이 지정되었고 국내에서도 국민훈장을 받는 등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2002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시상, 2008년 제야의 타종인사로 선정, 국외에서는 2000년 ‘유엔 밀레니엄세계평화회의’에서 ‘존경받는 50인의 세계 정신지도자’로 선정, 2002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시 ‘피닉스 어워드’ 수상,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시 ‘LA 어워드’ 수상, 2007~2008년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15개 도시에서  ‘Ilchi Lee Day’ 선정 등) 그러한 한편으로 부정적 시각도 점점 높아져 갔는데 특히 2009년에는 미국내 단학(단요가)의 미국인 퇴직자들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사건이 있었다. 이때 국내 및 미국 TV에서는 판정도 나지 않은 내용을 선정적인 방식으로 편집, 방영하여 큰 물의가 일었고(『연합뉴스』2010년 3월 5일「SBS '그것이', '단요가 스캔들' 방송」:『조선일보』2010년 3월 6일「광고-SBS 그것이 알고싶다 왜곡취재에 대한 입장」:『마이데일리』2010년 3월 8일「단월드, 집회 중단하고 '그것이 알고싶다'에 법적으로 대응」) 결국 뒤늦게서야 소송이 기각되는 해프닝으로 이어졌다.  〔미 애리조나주 연방법원은 2010년 8월 성추행 주장에 대해 진실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최종 기각 판결을 내렸다. 원고중 10명에 대해서는 판사가 증거자료 부족 등으로 소송 기각 판결을 선고했고, 15명은 합의금 없이 자진 소취하를 했다. 나머지 2명도 합의금없이 소취하를 함에 따라 단요가 퇴직자에 대한 모든 소송이 2013년 4월 1일 종결되었고 연방법원은 원고 7명에 대해서는 단요가에 소송비용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헤럴드 경제』 2013년 4월 11일자「美 단요가, 퇴직자 집단소송 종결…원고 7명엔 “단요가 소송비용 배상하라” 판결」: 『대전일보』 2013년  4월 12일자「美 법원 단요가 퇴직자 소송 기각」 등)〕
, 이중에서도 일지선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많은 부분은 개인 숭배와 관련된 부분이다.  실제로 단학에서는 한국선도의 오랜 전통에 따라 수련 일반에서 ‘스승’으로서 일지선사를 최상위에 두는 관행을 따른다.「기공 수련자들은 기를 터득하고 난 후 기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바른 정신과 원리, 그리고 스승은 수련자   가 올바른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지도의 역할을 한다.」(이승헌, 2002『단학기공』한문화 127쪽) : 편집부엮음, 1993「스승과 제자의 만남으로 승화되는 심성 수련」『행복을 창조하는 사람들』222쪽~229쪽
  그러나 ‘일기?삼기=삼성(선도 스승)=사람속의 일기?삼기’의 기준에 의할 때 이러한 관행 역시 일차적으로는 선도의 스승 전통이라는 역사적 안목으로 바라보게 된다. 졸고, 2012「한국선도 수행의 실제」앞책 134쪽
  단학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에 한국선도 전통에 대한 역사적, 내용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상에서 2000년대 이후 선도의 현대화?세계화 추세 속에서도 단학이 선도의 원형을 충실히 지켜갔음을 살펴 보았다. 선도 기학의 요체인 ‘일기·삼기’는 구체적인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는 상고·고대시기 ‘선도 스승’이자 군왕으로서 ‘일기·삼기’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던 ‘삼성’으로 대변되어 왔기에 한국선도의 원형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삼성’으로 바라보게 된다. 단학은 선도가 민속·무속으로 오해받던 상황 속에서도 삼성이나 단군을 ‘선도 스승이자 군왕’으로 조명하였고 더 나아가 제천의례의 수련의례로서의 진면모를 회복하였다. 2000년대에는 선도의 세계화에 기반한 선도 실천운동으로서 ‘지구인운동’과 함께 ‘국학운동’이 병행되었다. 국학운동은 ‘국사 개정 및 국사교육 강화운동’의 방식으로 드러났고 국학 연구와도 병행, 많은 성과를 내었다. 단학의 성장 과정에서 민족사상과 가장 대척적인 지점에 놓여 있던 기독교측과의 갈등이 예상되었는데 실제로 단학 창립 이후 기독교측은 단학을 지속적으로 비방?공격, 단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단학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평가는 한국사 전통에서 한국선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한 역사적, 거시적 인식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7. 맺음말
  본고는 광복 이후 한국선도의 변화 양상을 살피되, 특히 1970년대말?1980년대초 무렵 등장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도의 대중화?현대화?세계화 추세를 추동해가고 있는 ‘단학’ 계열을 중심으로 고찰한 연구이다.  
  남북분단 이후 약화 일로에 있던 선도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에 이르러 다시 한번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즈음 먼저 서구화된 동양명상법이 소개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한국선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였고 선도수련법의 보급을 통해 선도가 크게 대중화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계열로 ‘단학’이 있다. 한국 근대의 선도가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종교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과 달리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의 현대 선도는 선도수련법의 보급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흥한 특징이 있다.  근대 이후 선도가 민족종교의 방식으로 부활한 이래 선도는 민족정신, 또는 민족종교의 차원으로 이해되었을 뿐, 실상 선도의 본류라 할 수련법의 측면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련법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으니, 한국선도의 본령이 제대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해 보게 된다.
  한국선도 전통에서 바라볼 때 단학이 주목되는 이유는 물론 현대에 등장한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세를 확장하여 한국선도를 대표하는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선도전통의 현대화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단학이 선도전통을 현대화한 면모는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지만 가장 먼저 한국선도의 요체인 ‘仙道 氣學’을 현대화한 측면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사의 원류이자 한국사의 원류이기도 한 배달고국 홍산문화 이래 선도 기학의 요체는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력으로서의 ‘一氣?三氣’로서 삼국시대 이후 한국선도의 침체 과정에서 그 원의미가 잊혀지고 민속·무속 등 다양한 형태로의 곡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단학은 그 오랜 시대의 격간을 뛰어넘어 선도 기학의 원형을 회복, ‘일기?삼기’의 의미를 되살려내었고 또 ‘일기?삼기’의 움직임으로 생겨나는 현상 물질세계의 생성과 회귀 문제까지도 해명해내었다. 선도 기학의 현대적 복원으로 인해 한국선도는 새로운 발전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선도 기학의 현대화는 당연히 선도 기학에 기반하고 있는 선도수련법의 현대화와 맞물리게 된다.  단학이 이루어낸 선도 기학의 현대화라는 성과가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를 통해 선도 수련법이 현대화되었고 또 선도수련법의 현대화를 통해 선도의 대중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학은 새로워진 선도 기학에 바탕하여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해가기 시작하였는데 대체로 1980년대 하단전 중심, 1990년대 중단전 중심, 1990년대말 이후 상단전 중심의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1990년대말 이후 상단전 중심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뇌교육’의 형태로 현대화하였다.  단학의 많은 수련법들이 고전적 선도수련법을 현대화한 형태이지만, 특히  뇌교육은 뇌가 강조되는 시대변화를 적극 수용한 바, 선도 현대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010년대 선도수련법은 다시 ‘생명전자수련법’으로 변개되었다. 이는 앞서의 상단전 중심인 뇌교육 단계를 넘어선 총체적 수련법으로 선도수행의 요체인 ‘일기·삼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선도수련의 본령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 형태이며 특히 양자물리학과의 접목을 통해 선도수련법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단학은 선도수련법을 보급하되 시대변화를 적극 반영하면서 현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선도수련법의 원론에 충실하면서도 시대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선도수련법을 경신해나가는 유연성이 단학이 선도의 대중화를 주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한국선도는 수련법의 현대화라는 성과에 기반하여 2000년대 무렵부터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세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뇌교육은 뇌과학을 선도해가고 있던 서구사회에서 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크게 주목되었고 2000년대말 무렵부터는 유엔에서의 활동을 통해 보급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2010년대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생명전자수련법이 뇌교육과 함께 선도 세계화의 매개가 되었다.  선도의 세계화는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 실천운동을 위한 기반이 되었고 이에 2000년대초 ‘지구인운동’의 이름으로 선도 실천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선도 실천운동으로서의 ‘지구인운동’은 기존의 지구평화운동에 비해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 수련법, 조직, 계획 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훨씬 선명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구인운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1억 지구인 연대’의 결성을 1차 목표로 활발히 진행되어오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선도의 현대화?세계화 추세 속에서도 단학은 선도의 원형을 충실히 지켜가는 모습을 보였다. 선도 기학의 요체인 ‘일기·삼기’는 구체적인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는 상고·고대시기 ‘대사제(선도 스승)’이자 군왕으로서 ‘일기·삼기’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던 ‘삼성’으로 대변되어 왔기에 한국선도의 원형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삼성’으로 바라보게 된다. 단학은 선도가 민속·무속으로 오해받던 상황 속에서도 삼성이나 단군을 ‘선도 스승이자 군왕’으로 조명하였고 또 제천의례의 수련의례로서의 진면모를 회복하였다. 2000년대에는 선도의 세계화에 기반한 선도 실천운동으로서 ‘지구인운동’과 함께 ‘국학운동’이 병행되었다. 국학운동은 ‘국사 개정 및 국사교육 강화운동’의 방식으로 드러났고 국학 연구와도 병행, 많은 성과를 내었다. 
  단학의 성장 과정에서 민족사상과 가장 대척적인 지점에 놓여 있던 기독교측과의 갈등이 예상되었는데 실제로 단학 창립 이후 기독교측은 단학을 지속적으로 비방?공격, 단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단학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평가는 한국사 전통에서 한국선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한 역사적, 거시적 인식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연구 성과와 쟁점
  1) 규원사화출현과 연구의 출발(1968년 이전)
  2) 연구의 본격화와 위서설의 등장(1970·80년대)
  3) 진위논쟁의 격화와 연구의 심화(1990년대)
  4) 시민사회의 활동·남북동연구와 연구의 다양화(2000년대-현재)
 3. 향후 연구과제
 4. 맺음말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1. 들어가는 말
  한국사에서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문제를 가장치열하게 고민한 시기는 근대이다.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우선 자신들의 존재성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한민족의 존재근원을 단군에서 발견하고 대종교로 귀의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나철·김교헌·신채호·박은식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단군민족주의 기치 아래 독립전쟁과 사상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당면 과제는 바로 유가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한국근대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여말선초의 선가계통의 사서가 유가의 사서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이성계는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목자득국론(木字得國論)에서 찾았던 것이 사실이다.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 참조.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 나라 건설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그 결과 선사(仙史)와 선교(仙敎)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세력은 지하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난 이후 당시 지식인들 중에 피폐한 현실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 성리학 지배질서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북애(北涯子)였다. 그는 한민족의 출발점이 환인·환웅·단군 삼신이라고 확신하면서 선교(仙敎)에서 민족 구원의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이유립은 권근의 후손 권현(權俔)의 행장에 권현이 규원사화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유립, 「문헌학에 대한 재검증의 필요성」,『대배달민족사』 5, 고려가, 1987, 72-73쪽). 하지만 이를 증명할 사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성리학이 지배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해 몸부림 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는 양란 이후 조선의 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토하면서 읊었다.

  내가 말하거니와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걱정이다. 춘추(春秋)를 지으니 명분이 바르고 강목(綱目)을 이루어 정윤(正閏)이 나뉘었는데 춘추와 강목은 중국 선비의 힘을 입어 되었다.
  우리나라는 옛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는 여러 번 병화를 입어 흩어지고 없어졌다. 그러다가 후세에 소견이 좁고 생각이 얕은 자들이 중국 책에 빠져서 주(周) 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은 것이라고 하고, 먼저 근본을 세울 줄 모르고 내 나라를 빛낼 줄 몰았다. 이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어매기만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천하다 하지 않으랴. 북애 저 / 고동영 역, 『규원사화』, 한뿌리, 1986. 7쪽.

 
  이처럼 북애는 조선의 몰락 원인을 국사와 경서의 부재와 망실에서 찾았다. 국사와 경서를 되찾으면 조선은 희망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리학으로 인해 망해가는 나라와 백성의 구제방안을 보성(保性)에서 찾았다. 보성이란 “‘본래의 나’를 찾아지킨다.”는 의미이다. 결국 조선은 본래의 나를 찾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북애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북애의 혜안은 오늘 날에 더 심각하게 요청된다.
  글쓴이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되살릴 길을 규원사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도 이런 글쓴이의 생각에서 시도된 것이다. 지금까지 규원사화에 대한 글은 40여 편이 발표되었다. 위서설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규원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규원사화에서 우리의 본래모습을 찾으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그동안 규원사화 연구는 역사·정치학·철학 쪽에 주로 이루어져왔다. 글쓴이는 이 글의 목적을 그동안 발표된 글들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밝히는 데 두었다. 이를 위해 연구 성과·논점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규원사화 연구를 활성화한다는 의미에서 연구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규원사화의 본질을 밝히고 ‘규원사화학’으로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연구 성과와 쟁점
  1) 규원사화출현과 연구의 출발(1968년 이전)
  『규원사화』는 북애가 숙종 1년 1675년 완성한 이후 비장되어 오다가 대일항쟁기 1925년 김용기의『단전요의(檀典要義)』·1928년 김광(金洸)의『대동사강(大東史綱)』·1934년 이창환(李昌煥)의『조선역사(朝鮮歷史)』·1937년정진홍(鄭鎭洪)의『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鄭鎭洪,『檀君敎復興經略』, 啓新堂, 1937, 25쪽.
·1939년 서계수(徐繼洙)의『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등에서 인용 활용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민족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선도문화』6,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09, 126쪽;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한국사시민강좌』 2, 일조각, 1988; 趙仁成,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3, 경남대학교사학회, 1987, 173-174. 물론 조인성은 근대의 사서에서 규원사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곡해하여 규원사화가 근대의 위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근대 이전에 규원사화가 필사되어 퍼졌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특히 1925년『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이미 규원사화가 인용되었다면 1932년에 정훈모의 단군교 측에서 등사하여 판매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미 규원사화는 단군교와 상관없이 1925년 이전에 유포되어 있었다는 점이 사실에 가깝다.
 
 그런데『단전요의』나『단군교부흥경략』은 근대 단군계열의 집필이라는 점에서 규원사화의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광(金洸)의『대동사강』·이창환의『조선역사』·서계수의『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는 선가의 사관보다 유가의 춘추사관에 따라 강목체의 대의명분·정통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한치윤의『해동역사』나 이종휘의 『동사(東史)』등의 사서와 같은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서는 규원사화와 달리 춘추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김광 등이 규원사화를 인용한 것은 이들이 규원사화를 대체로 진서(眞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원사화가 근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제라는 시대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 상고사와 사상사의 본격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 책의 중요성을 인식한 양주동의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해방 후 고려대학교도서관·서울대학교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에 1부씩 기증했다. 서희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고려원 1986, 75쪽.
 이외에 권상로 소장본이 동국대에, 방종현 소장본이 서울대에, 이선근 소장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고, 특히 북한인민대학습당에도 소장되어 있다 최인철,「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한민족연구』2, 한국민족학회, 2006,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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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판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金壽一)에게서 1946년 5월 25일 이전 어느 시점에 현금 100원에 구입하여 5월 25일  등록(도서열람번호: 貴 629(古2105-1))한 ‘김수일 소장본(金壽一 所藏本)’ 글쓴이가 ‘김수일 소장본’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판본의 경우 대체로 원소장자의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임채우는 ‘고필사본’이라고 명명하였다(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124쪽).
이다. 이를 다시 1972년 당대 최고의 권위자 이가원·손보기·임창순 등으로 이루어진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결과 숙종 1년(乙卯, 1675년)에 만들어진 ‘진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김수일 소장본은 김성구의 지적 김성구, 「『규원사화』 교감기」(임채무,「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126쪽).
대로 제질 등을 보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임채우는 이것이 북애의 친필본이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124-125쪽.
 
  여기에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고서의 진위여부는 무엇보다 지질(紙質) 등의 서지학적 측면에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김수일 소장본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신학균은 “가필추가된 글자가 본문과 동일하다.”라는 이유로 김수일 소장본을 북애의 후손이 갖고 있던 진본으로 보고 있다(신학균,「「揆園史話」에 대하여」,『도서관』130, 1968, 26쪽). 또한 고서심의위원회도 진본으로 보았다(고평석,『한배달』6, 1989). 반면 임채우는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임채우,「선도사서『규원사화』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123쪽). 진본이든 필사본이든 중요한 점이 김수일 소장본이 조선 중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판명된 이상 전혀 의미가 없다. 이 점에서 위서설 주장자들은 학문의 기본소양에서 벗어난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이것도 아니면 어떤 ‘불순한’ 목적에서 규원사화 등 단군관련 사서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사의 서술에서 고려의 김부식 등의 유학자들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철저하게 단군의 역사를 배제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적 질서의 공고화를 위해 조선 초기(세조대)에 있었던 사서 100여종의 수거령을 내렸다. 위서설은 이러한 성리학자들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서설을 주장하는 일련의 세력이 그들의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는 김성환의 주장(김성환,「한국도교의 자연관: 仙敎적 자연관의 원형과 재현」, 『한국사상사학』 23집, 한국사상사학회, 2004, 77쪽)은 대단히 타당하다.

  규원사화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이는 신학균(申學均)이다. 그는 1968년에 대동문화사(大東文化社)에서『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번역서의 의미는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학균은 규원사화의 가치에 대해 「「揆園史話」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수일 소장본을 북애의 친필본으로 주장하면서, 북애의 위대성을 “이 일사를 위하여 한 平生을 바쳤으니 偉大한 愛國者라 아니 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규원사화에 인용된 사서로 『삼성밀어(三聖密語)』·『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조대기(朝代記)』·『사문록(四聞錄)』·『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5종을 비롯하여 총 39종을 들고 있다. 李相時, 「『揆園史話』에 대한 文獻考證」,『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가나출판사, 1987, 164쪽.
 이처럼 그는 처음으로 규원사화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신학균, 「「揆園史話」에 대하여」, 26-27쪽. 
 
  그런데 여기에서 1960년대의 규원사화 인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균이 규원사화의 번역을 결정한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冊을 번역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一年前 몇몇 先輩들과 檀君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本書 번역에 대한 말이 나와 上古史 硏究와 在整理라는 意義를 생각하여 이를 着手하기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北崖 著/ 申學均 譯, 「譯者序文」, 『揆園史話』, 대동문화사, 1968, 11쪽.
 여기에서 보듯이, 본격적인 ‘상고사 연구와 재정리’라는 당시 역사학의 당면과제인 식민사학 해결 기반조성이라는 의미에서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이병도 등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 상고사 인식의 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해체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학균의 규원사화 번역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단순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규원사화 번역에 정명악(鄭命岳)·최동(崔東)·윤치도(尹致道) 등 일련의 단군연구자들의 조언과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학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近者에 와서 檀君에 대한 硏究를 하신 선생님들이 계시니 鄭 命岳 先生님(韓國全史) 崔 東 先生님(朝鮮民族上古史(필자:조선상고민족사의 잘못)) 尹 致道 先生님(民族正史) 등 諸位이시다. 이분들은 한결같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刻苦의 努力 끝에 上記한 巨著들을 世上에 내놓았다”(위와 같음).
 아울러 윤치도도 “그 동안 동학 신학균(申學均)씨에 의한 규원사화의 번역출판을 보았고, 정두옥(鄭斗玉)·문정창(文丁昌) 등 제씨의 상고사연구에 관한 출저(出著) 등 우리 상고사연구에 많은 노력의 경주가 있었을 뿐더러 우리나라 사학계의 괄목할만한 각성이 엿보임은 참으로 이민족의 장래를 촉망할만한 일이며.”라고 기술하였다. 윤치도, 『중정판 민족정사』, 대성문화사, 1971, 1-2쪽.
   
  여기에서 보듯이, 규원사화 번역은 이러한 1960년대 상고사 연구 경향 속에서 기왕의 상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식민사학 극복 방안을 모색하던 일련의 학자들의 결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1970년대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1975년 11월 3일자. 「사대·식민주의사관 뿌리뽑자 원로들 국사찾기협의회 결성」.
 이처럼 신학균을 비롯한 민족사학자들이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처럼 규원사화는 항일전쟁기 1925년『단전요의』등에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항일전쟁기에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김수일 소장본과 신학균의 번역본은 이후 규원사화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1968년 신학균의 번역본이 나온 배경에는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이다.
 
  2) 연구의 본격화와 위서설의 등장(1970·80년대)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규원사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번역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신학균은 1973년 명지대학교 문고본으로 규원사화를  간행하였다. 北崖 著 ; 申學均 譯, 『揆園史話 : 檀君實史』, 明知大學出版部, 1973. 신학균은 1974년에 대동문화사에서, 1986년에 명지대학에서 규원사화를 다시 번역 출간하였다.
 특히 명지대학교 설립자 유상근은 이 책의 간행이유를 서구문화의 범람 속에서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확인하는데 두었다고 밝혔다. 유상근, 「명지대학교 문고를 발행함에 있어서」,  위의 책.
 이러한 움직임은 규원사화가 한국의 지식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鄭鎭弘,「揆園史話의 神話」, 『文學과知性』23, 문학과지성사, 1976, 136쪽.
 
  특히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5년 10월 28일에 “한국사의 시폭(時幅)과 강역을 바로잡고 한국사의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뿌리 뽑겠다.”는 취지 아래 이루어진 ‘국사찾기협의회’의 결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향신문, 1975년 11월 3일자. 「사대·식민주의사관 뿌리뽑자 원로들 국사찾기협의회 결성」. 이 날자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 국사찾기협의회에는 안호상(安浩相, 배달문화연구원)·유봉영(劉鳳榮, 백산학회)·문정창(文定昌, 한국고대사학회)·임승국(林承國, 한국고전문우회)·이유욱(李裕昱, 진단학회)·이대위(李大偉, 기독동우회)·박시인(朴時仁, 알타이 인문학회), 박창암(朴蒼岩, 월간 자유사)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임승국은 “국사는 무한의 가능성이다.”라는 주제로 한국사의 주체는 이미 증발했고, 중독(中毒) 왜독(倭毒)된 객체 위에 서양의 기성복 사관으로 목하 망명중이라고 하면서 아케데미사학을 공격했다.” 이어서 경향신문은 임승국이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교수(이병도: 필자)의 개론책(『한국고대사연구』: 필자)은 일제 하 일본인들의 반도사관을 청산하지 못한 책이라고 꼬집고 “한국의 눈으로 한국을 보는 사안(史眼)을 갖춰야 한다.” 동시에 경향신문은 아카데미사학도 국사찾기협의회의 움직임에 대해  “상투적이며 전근대적인 고대사 논쟁은 한국사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역기능한다.”라고 전하였다. 여기에서 1950년대 수면으로 잠복해 있던 이병도를 중심으로 대학을 장악한 식민사학이 60년대를 거치면서 70년대에 공개적으로 민족사학을 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를 중심으로 학술활동을 하면서 이병도의 식민사학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처럼 식민사학은 국권회복이 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는 식민사학에 대한 전면전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이 시기까지만 해도 단군을 부정하는 식민사학 이외에 대체적으로  규원사화를 진서로 받아들이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1970년 중반 민족사학의 본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규원사화 연구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한영우는 1975년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에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한영우,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 『한국학보』1, 1975.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확신한 그는 여기에서 그 대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북애의 문화·역사 의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그는 ‘광범위한 민속자료의 이용’, ‘언어적 해석방법의 도입’, ‘문헌고증학적 방법의 채용’라고 하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역사서로 인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강목체와 정통론에 치우친 유가사학이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대가 내려갈수록 동이문화의 재인식과 자부로 전환되는 동기를 규원사화에서 주목하면서 규원사화의 출현과 근대 민족주의사관을 근본적으로 도가사학의 영향이라고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한영우는 신채호가『단기고사(檀奇古史)』「중간서(重刊序)」를 썼다는 점, 박은식·최남선의 동이(東夷) 중심 서술 등을 들어 도가사학이 근대민족주의사학에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그는 규원사화를 도가사학의 대표적인 사서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아세아문화사가 규원사화를 비롯한 선가 사서류를 발행한 배경이 되었다. 亞細亞文化社, 『揆園史話 ; 靑鶴集』, 1976.
 
  그리고 이러한 규원사화 평가는 정진홍(鄭鎭弘)에게도 이어져 종교학으로 그 연구 범위가 확장되었다. 정진홍, 위의 논문.
 아울러 한영우의 연구성과는 1977년 7월 16일 한국고전연구회에서 ‘안호상이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를, 윤치도가 ‘규원사화’를 강의하는『경향신문』1977년 7월 14일자, 「고전연 강좌열어」.
 등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사를 연구한 송찬식은 1977년 규원사화를 진서로 인정하는 학계의 연구경향 속에서도 ‘위서설’을 제기하였다. 「위서변」,『월간중앙』1977년 9월호. 송찬식은 규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나는 일전에 누워서 규원사화를 들고 午睡를 청하다가 불각 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僞書가 아닌가 의심이 들기 때문이었다. 대저 그 내용이 고금의 類似之說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한말 일제시대 대종교계의 주장과 너무도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쇄본이 없는데다가 북애노인이라는 不知所從來의 사람이 지었다 하며 효종 숙종대의 저작임을 표방하였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인용서목이 모두 지금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헌비고』등 한말 이전의 고문헌에 전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소위 奇書와 秘記들이다. 그 근거가 황당하여 의심을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제에 의하면 대야발의『단기고사』도  규원사화를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 그러나 대야발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동생임을 표방하고 이어 표면상 규원사화가 단기고사보다 훨씬 후대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단기고사가 위서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고 보면 설사 그 근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규원사화가 별 수 없이 위서로 귀착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학계의 연구성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들었다. (1) 『문헌비고』등의 고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위서『단기고사』보다 후대에 나왔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위서에 불과하다. (2) 민기(民氣)·선민(先民) 천주(天主)는 효종 숙종대의 용어가 아니다. (3) 말갈·여진을 우리민족의 분파로 보고 만주의 고토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 대종교 내지 민족주의사학의 주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학문적 연구성과를 기술한 논문이 아니라 단순히 대중지에 의문을 제기한 수준이었다.
  그의 주장은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1987년까지 송찬식의 주장이 통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1980년 11월 17일 천관우(千寬宇)는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에서『경향신문』1980년 11월 17일자, 「인물한국사- 고대편 단군 ⑤ 규원사화」.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영우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의 위서설을 부정하였다.
  더욱이 1980년 9월 29일 단군정신선양회의 주체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기독교목사 김산(金山)도 규원사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경향신문』1980년 9월 29일자, 「천부경으로 본 단군사상 모든 종교철학원리 담겨-단군사상 학술발표회」.
 이는 기독교계에서도 일정부분 규원사화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영훈은 1981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규원사화를 주제로 한  최초의 정치학 석사학위논문을 받는 등 鄭榮薰, 『揆園史話의 民族思想』,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규원사화 진서론은 더욱 강화되고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정영훈은 규원사화가 선행 선가들의 사상적 축적을 바탕으로 성립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후대의 민족의식 내지 민족노선이 바로 이 선가계열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근대민족주의의 원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처럼 근대민족주의 출현배경을 규원사화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선가-대종교-국학이라는 한민족 선가의 흐름을 국학-신도-국수주의라는 일본 사상의 궤적과 대비시키면서 민족의식의 성장이 일본에 비해 늦은 이유를 선가사상의 ‘매몰’에서 찾았다.
  1980년대에는 1982년 윤이흠(尹以欽)의 연구 尹以欽, 「韓國文化 硏究를 위한 宗敎學의 役割과 期待」, 『人文論叢』9, 서울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82;
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의미는 정치·역사학을 넘어 종교학에서 더욱 강조되는 경향성을 보였다. 아울러 국문학에서는 이상택(李相擇)의 연구가 주목된다. 李相擇, 「「明珠寶月聘」硏究」, 『韓國古典小說의 探究』, 중앙출판사, 1981. 138-140쪽.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송호수·박성수 등이 꾸준히 규원사화의 연구를 이어갔다. 송호수, 「民族起源錄의 올바른 解釋」, 『백사학보』 27, 백산학회, 1983; 「국사정론(사상적 측면에서)」,『한국철학연구』14, 해동철학회, 1984; 『한민족의 뿌리 사상』,기린원, 1984. 박성수,「단재의 고대사관」,『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집현전, 1985.
   
  이러한 일연의 연구는 규원사화는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는 한학자 김재환이 1981년 9월 간행한『단국총사(檀國總史)』에서 규원사화 등 선사류 뿐만 아니라, 수백권의 관련사서를 조사하여 기자·위만조선의 허상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김재환,『檀國總史』, 삼일당, 1981.
 또한 1984년 박성수는 동아일보에 「북애의 반 사대 민족사관」이라는 제목으로 투고하였다. 여기에서는 그는 북애의 사관이야 말로 민족사관의 모델이라고 주창하였다. 동아일보, 1984년 3월 31일자,「북애의 반사대 민족사관」. 규원사화와 관련한 박성수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경향신문, 1986년 10월 2일자,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1987년 1월 15일자· 3월 19일자·6월 11일자,「박성수교수의 단군기행 3·11·22」 ).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동영은 1986년 5월 새로이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북애 저 / 고동영 역, 위의 책. 이후 고동영은 1992년과 2005년에도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영우은 1986년 11월『민족지성』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韓永愚, 「在野史書 解題 揆園史話」, 『民族知性』9, 民族知性社, 1986.
 더욱이 규원사화의 사실성을 밝힌『주간조선』연재물「단군조선 이렇게 말살되었다」가 1986년 9월 책으로 출간되어 규원사화의 존재성과 그 사실성은 일반에 더욱 깊이 확산시켰다. 서희건 편저,『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고려원, 1986.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이러한 움직임에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그 결과 1986년 12월 조인성이 이병도 이병도 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도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  한영우, 「이병도」,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 비평사, 1987; 김수일,「이병도와 김석형 : 실증사학과 주체사학의 분립」,『역사비평』82,역사비평사, 2008; 김용섭,「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발달 2-1930,40년대의 실증주의사학학」, 『문학과 지성』가을호, 1972; 최재석,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과연 조작된 것인가-소위 <문헌고증학>에 의한 삼국사기비판판의 정체.『한국학보』38, 1985, 이종욱, 「실증사학의 벽을 넘어 새로운 역사일기 한국고대사연구 100년: 현재-쟁점, 『역사학보 』170, 2001. 한영우·김용섭(제1세대 제자)와 이종욱(2세대 제자)은 이병도의 제자였지만 그들의 학문은 이병도와 달랐다. 이외에 이유림· 문정창 · 김정희 등이 이병도의 친일사학을 비판하였다.
의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에 스승의 뜻에 따라(?) 이는 조인성이 이병도의 위서 주장을 자신의 위서설의 핵심근거로 들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조인성,「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이병도 박사의 구순기념 한국사논총』, 지식산업사, 1987. 이 논문은 1987년 1월에 기고하여 1988년 9월에 지식사업사에서 발간된 『이병도 박사의 구순기념 한국사논총』에 수록되었다. 이후 조인성은 위서설의 확장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마 이 논문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못하였다.
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조인성은 이 논문에서 본격적인 규원사화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대체로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믿는 학계와 사회의 합의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1) 규원사화의 백두산에 대한 어휘고증은 한지서(韓鎭書)가 1823년에 간행한 『해동역사(海東歷史)』「지리고(地理考)」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규원사화는 1823년 이후에 나온 것이다. 특히 백두산을 설명하는 부분은 규원사화와 해동역사에 고려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이라고 하여 모두 잘못 인용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서를 저본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규원사화는 근대에 알려졌으므로 북애가 해동역사를 참고한 것이다.
 (2)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나온 문화지개발(文化之開發)의 ‘문화’는 20세기초 정치·경제 ·예술 등의 일본 번역어로 Kultur 또는 Cultur의 뜻이다. 이점에서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뜻이 아니다. 
 (3) 규원사화에 인용된 각종 문헌자료의 대부분은 한치윤(韓致奫)의『해동속사(海東續史)』(1800-1814)에 의거하였다. 이 부분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상시와 최인철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4) 「단군기」의 금양이언서병용(今若諺書幷用) 이하의 구절은 1900년 전후 어느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5) ‘한 조각의 진역’, ‘한 줄기의 유민’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민족의 처지를 가르키는 말이다.
 (6) 규원사화가 김광의『동사사강』에 최초로 인용된 것을 보면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위서이다. 조인성의 이러한 위서설은 그가 「「한국에 있어서 고대사 논쟁과 「揆園史話」「檀奇古史」「桓檀古記」」(呂運虔,「古代史書의 僞書 論爭」, 『自由』 350, 성우회, 2002, 33쪽에서 재인용)에서 밝혔듯이 1974년부터 시작된 상고사 논쟁에서 상고사의 영역을 확대한 1986년 한국정부의 국정교과서 개편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음을 실토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조인성의 위서설은 일제의 한국 상고사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한국고대사학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규원사화 등 고기류를 위서로 몰아간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학문의 영역이라기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한국사 멸살 행로밖에 볼 수 없다.    
 
  이처럼 규원사화가 사학계 일각에서 부정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소설· 자료집 등 단군관계 출판물이 쏟아져 베스트셀러 상위 10을 석권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는『경향신문』1986년 12월 27일자, 「연말 출판계 「단군조선」 붐」.
 등 일반 대중들은 위서설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상시(李相時)는 1987년 2월「『揆園史話』에 대한 文獻考證」 李相時, 「『揆園史話』에 대한 文獻考證」,『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참조.
을 발표하여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면서 규원사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북애의 역사·문화의식을 조명하였다. 그는 문헌고증에 집중하여 구체적으로 규원사화에 국내 사서 9종(선사 사서 6종, 유가 ·불가 사서 3종)·중국 사서 34종 모두 43종이 인용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규원사화가 선사류만을 의지하여 기술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존재한 거의 모든 역사서를 망라하여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규원사화의 문헌고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에서 강조하였다.   
  이상시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조인성은 위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7년 3월 다시 한편의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 趙仁成,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3, 경남대학교사학회, 1987.
 이글에서 그는 1920년대말 시흥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등사하여 규원사화를 판매하였다는 이유립이 정영훈에게 했다는 회고담, 이유립, 위의 논문. 그런데 이유립은 규원사화가 단군교측에 의해 가필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지만 규원사화 그 자체를 위서로 보지는 않았다. 
 이선근의 소장본에 ‘A.D. 1932. May’라고 기록된 점을 주된 근거로 단군교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허황된 내용의 규원사화가 갑자기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으므로 윤덕영의 위작.”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가 단군교(윤덕영)의 위서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주장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존재를 부정한 일제도 규원사화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제의 상고사 날조와 왜곡에 일조한 이병도의 사견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것도 실증으로 확인된 것이 아닌, 이병도의 근거 없는 ‘낭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술한 사실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구순기념 책자에 실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병도의 2세대 제자로 알려진(『경향신문』1987년 10월 21일자 「「두계학문 60년사」한눈에) 조인성은 이병도를 ‘민족주의자’로 둔갑시킨 예찬론을 다음의 논문에서 전개하였다. 조인성, 「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와 식민주의사학의 문제 : <韓國古代史硏究>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4, 한국사연구회, 2009;「李丙燾의 韓國古代史硏究 : 漢四郡·三韓의 歷史地理 硏究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55, 한국고대사학회, 2009; 조인성, 「이병도와 천관우의 고조선사 연구」, 『韓國史市民講座』 49, 일조각, 2011.
     이처럼 조인성은 이병도의 상고사연구에 많은 비판이 있음을 직시하고서도 이병도를 ‘민족주의사학자’로 호도하여 찬양하였다. 이는 역사사실 왜곡을 넘어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조인성의 위서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민현구·김두진 등도 공유하있다.

  이어서 조인성은 이병도의 애제자 이기백이 주도한 1988년 2월『한국사시민강좌』에「「揆園史話」와 「桓檀古記」」를 투고하여 기존의 규원사화 ‘위서설’을 재차 강조하였다. 趙仁成,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 일조각, 1988. 이 논문에서 그는 『진역유기』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북애의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일본에서도 번역되었다. 趙仁成(?谷勝?), 「『揆園史話』と『桓檀古記』の史料?値について」, 『東アジアの古代文化』62,  古代??究所編, 1990. 그런데 조인성의 이 논문이 일본에서 번역된 이유를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필시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한·일 식민사학자들의 부정적인 인식 공유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8년 1월 5일자 『한국경제신문』「논설」에 조인성의 주장이 실리는 등 규원사화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매몰된 일부 학자들의 본격적인 반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친일사학자라고 평가 받는 이병도의 영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이에 대해서는 이희진,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 책미래, 참고.
 모대학 출신과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연구자들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앞장서 퍼트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채호·박은식·김교헌 등의 근대민족주의사학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하고  현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대응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최광렬의 비판에 이어서 최광렬, 『한민족사와 사상의 원류』, 사사연, 1987, 256-259쪽.
,  이상시(李相時)는 1988년 3월『민족지성』에 송찬식·조인성의 규원사화 위서설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1) 숙종대(1677년)의 을지문덕 사우(祠宇) 건립기사가 숙종실록에 있고 이에 대해 북애가 언급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쓰인 것이다.
 (2) 친일파 윤덕영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규원사화 간행을 지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더구나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3) 이유립의 주장은 규원사화의 단군 존속연대와 자신이 신봉하는 『환단고기』의 그것과 맞지 않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4) 민기(民氣)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천주(天主)는『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오는 말로 근대어가 아니다. 특히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약자이지, 컬쳐(Cultur)의 번역어가 아니다. 그리고 금약이언서병용(今若以諺書幷用)은 한글을 사용하면 어리석은 백성도 단군이 ‘박달임금’이라는 뜻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북애는 다음과 같이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 만역 한글을 함께 사용하였다면 이러한 폐단도 없고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도 이것을 쉽게 깨달아서 문화의 개발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장황하게 기술하지 않겠다.”(북애 지음/고동영 옮김,『규원사화』, 한뿌리 1986, 33쪽)라고 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 하였다.
 
 (5) 만주가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살리진 것은 발해 멸망 해인 926년이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6) 국내 사서 9종과 중국 사서 33종 총 43종의 역사서를 활용하였다. 특히 세조실록에 『진역유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서가 언급되어 있다.
 (7) 선가사서가 간행될 수 없는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진서의 『해동역사』에 규원사화가 인용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선가를 이단시한 유가의 경향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리고 규원사화는 명대 이전의 문헌만을 인용하였고, 해동역사는 청대의 문헌까지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시의 지적은 북한 학자 최인철의 견해(최인철,「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99-100쪽)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진서론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대목 중 하나이다. 규원사화가 조인성·박광용의 주장대로 1920년대 대종교계통에서 쓴 책이라면 한진서의『해동역사』에서 보듯이 (17세기) 이후의 사서도 규원사화에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용된 사서는 규원사화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이점에서 규원사화가 해동역사보다 간행시기가 앞선 것은 분명하다.  
  (8)김광의『대동사강』·이창환의『조선역사』·정진홍의『단군교부흥경략』·서계수(徐繼洙)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1938) 등은 오히려 규원사화가 근대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9)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진역유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규원사화에 인용되지 않은 중국사서『죽서기년(竹書紀年)』·『후한서(後漢書)』의 동이(東夷)관계 기사는 규원사화의 그것과 중요골자·연대가 서로 부합하고 있다. 이점은 규원사화가 진역유기를 저본으로 하였다는 증거이다. 李相時, 「「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하여 ; 한국경제신문 1988.1.5.게재논설을 읽고」,『民族知性』25, 1988.

  이후 1988년 이상시는 『대한변호사협회지』와 『정우』에 이와 같은 내용을 실어 조인성의 위서설에 대한 반박을 이어갔다. 李相時,「「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한 綜合的 評價」,『大韓辯護士協會誌』 141, 대한변호사협회, 1988; 「「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하여」,『정우』72, 국회의원 동우회, 1988.

  이상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는 주로 번역서를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 소장본이 진본임을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 연구의 한 핵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중반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영우는 본격적인 규원사화 연구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을 발표하였다. 이에 힘입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사학은 대중속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송찬식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제기하였으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의 규원사화 연구는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으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 위서설이 규원사화 연구와 인식의 공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 중반 이후 이에 위기를 느낀 조인성을 필두로 ‘식민사학자들’이 위서설을 제기하면서 이상시 등이 이에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을 보였다. 

  3) 진위논쟁의 격화와 연구의 심화(1990년대)
  1990년대에 들어와 규원사화 연구는 조인성의 위서설에도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연구자는 정영훈(鄭榮薰)이다. 그는 조인성의 주장을 “우리 정신사를 유가들의 사고수준만 염두에 두고 논하는 ‘단견의 소치’.”라고 비평하였다. 鄭榮薰,「揆園史話에 나타난 民族意識」, 『정신문화연구』39, 1990. 143쪽.
 특히 그는 1990년 「揆園史話에 나타난 民族意識」 鄭榮薰, 위의 논문. 같은 의미에서 박성수는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믿어온 탓으로 어느 덧 그것이 正統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규원사화류의 다른 민족 사서들은 이단으로 몰아 부치고 있다”(박성수, 「단재의 고대사관」,『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집현전, 1985, 163쪽)라고 단군관련 사서 위서설을 비판하였다.
을 발표하여 규원사화의 연구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정영훈은 북애와 규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규원사화는 선가 사상의 영향 아래 양난이후 성립된, ‘아족(我族)’ 그는 “아족의 의미를 조선을 지칭할 때 동국 동방 등 지리적 정치적 용어들만을 유가사서에 넘쳐나는 데 비해 규원사화의 아족이라는 개념은 종전보다 훨씬 선명한 민족의식을 정립한 것으로 민족의식 수준이 상당히 발전된 양태를 보이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정영훈, 위의 논문, 147쪽).
으로써의 국사를 명백히 자각하면서 저술된 책이다. (2) 북애는 양난 이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유한 조선 역사와 문화정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실성(失性)의 현실과 정면 대결하였다. (3) 규원사화의 민족의식은 민족국가의 재거(再擧)열망, 고유문화전통에 대한 집착·계승·보전을 추구한 것으로 요약된다. (4) 규원사화는 단군민족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대중화되었고, 근대 저항민족주의의 활력소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정영훈의 연구는 규원사화의 역사적 위치와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대표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정영훈의 연구성과가 발표된 2달 후 1990년 9월 박광용은 전반적으로 조인성의 위서설 위에서 위서 주장을 되풀이하는데 열을 올렸다. 박광용,「역사논단 대종교문헌 위작 많다-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10, 역사비평사, 1990.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사학에 대한 ‘거부감’을 바탕으로「대종교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역사비평』에 발표하였다.
  그 제목에서 학문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선동가’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민족종교임을 주장하는 이른바 유사종교단체들.”이라고 하여 대종교를 ‘유사종교’라고 폄하하였다. 박광용, 위의 논문, 206쪽.
 이는 대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매도하여 탄압하던 일제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박광용은 규원사화「만설」의 “경주 첨성대는 천수년 지났는데.”라는 내용을 근거로 그  대를 1830년-1940년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1901년 5월 3일자『황성신문』「논설」의 필자 북애자(北涯子) 박광용이 언급한 황성신문「논설」 필자 북애자(北涯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북애자는『皇城新聞』 1901년 5월 3일자,「論說 帝國新聞停刊辨」에서  제국신문정간에 대한 일종의 반발과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 황성신문의 북애자가 규원사화의 북애와 같은 인물로 단정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1901년 단계는 민족주의 문제가 표면화되지 못하였다. 민족주의는 러일전쟁 전후로 폭발적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황성신문 논설의 필자가 필명을 북애로 쓴 것이 규원사화 저자 북애와 관련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규원사화가 1901년 단계에 이미 세상에 알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를 거명하면서 규원사화의 저자를 1910년대 조선사편찬위원회나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 관련자로 추정하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의 ‘연일청론(連日淸論)’을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 또는 자치론적 민족개량주의 논리와 결부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동양삼국동맹론이 친일 개화론자들의 논리라는 전제 하에 규원사화의 논리를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일방적으로 등치시켰다. 이 가설 위에 규원사화의 논리는 바로 대동아공영권의 그것과 같은 것이므로 규원사화는 윤덕영 등의 개화친일세력의 위작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박광용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모두 친일세력만이 삼국동맹론 또는 일선동조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그의 주장은 한국근대사의 연구성과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반역사학적 태도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삼국동맹론을 주장한 신운용,「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2009,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2009, 참조.
 최익현·안중근 등도 친일파이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 대종교세력 등 민족주의자 또는 근대 평화세력은 모두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 선전구호’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이병도의 주장 위에 성립된 위서설은 “친일파가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승국 林承國, 「『환단고기·규원사화에 僞作많다』에 反駁한다」, 『自由』207, 자유사, 1990.
과 강수원(姜壽元)『종교신문』1990년 9월 10일자, 「朴光用교수 논문의 허구성 痛駁」.
이 이러한 박광용의 주장을 적절하게 비판하였다. 임승국은 박광용이 “웅비(雄飛)라는 용어를 일제가 말들어냈다며 대한민국 군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웅비(雄飛)의 출처가『후한서』「조온열전(趙溫列傳)」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규원사화의 삼신(삼일)사상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모방했다는 주장에 대해 삼일(三一)이라는 용어가 『사기』「봉선서(封禪書)」와 『한서(韓書)』율력지(律歷志)에 나오고 있고, 신향(神鄕)이라는 말도『漢書』에 나온 것임을 밝혀 박광용의 비학문적 태도를 질타하였다. 박광용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자신의 논리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서영대도 규원사화 위서설을 주장하였지만(서영대「단군관계문헌자료 연구」,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74-75쪽)  그다지 학계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특히 서영대는 『단군 그 이해와 자료』(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에 일제가 생산한 단군관계 자료는 실으면서도 규원사화 등 선사류는 넣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규원사화에 대한 연구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1992년 박성수 박성수, 「단군에 대한 인식변천」, 『청계사학』 1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92.
, 1993년 심백섭 심백섭,「揆園史話」의 本文構造와 世界觀 形態에 對한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석사논문, 1993.
의 석사학위에 이어 특히 정영훈은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박사학위 논문『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정영훈, 『檀君民族主義'와 그 政治思想的 性格에 관한 硏究 : 韓末-政府樹立期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1993.
을 발표하였다. 이는 그의 규원사화론이 학문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영훈은 이후 다음의 논문에서도 자신의 규원사화론을 주장하였다. 정영훈, 「한국정신사 속에서의 국수주의」, 『自由』303, 자유사, 1998.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예술분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연구가는 1994년「우리나라 무용과 음악의 발달」 서정자, 「우리나라 무용과 음악의 발달」, 『창론』13, 중앙대학교 예술연구소, 1994.
을 쓴 서정자이다.
  이러한 규원사화 연구 경향은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켜 김성구가 번역서를 간행한 배경이 되었다. 김성구, 『역사로 기록된 고조선 이야기 : 규원사화 역주』, 백산자료원, 1999.
 규원사화 등 선사에 대한 일반의 뜨거운 반응과 관심은 1997년 12월 단군학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경향신문』1997년 12월 20일, 「단군학회 창립된다」.
 
  이처럼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초기부터 박광용의 주장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박광용의 규원사화 위서설은 학계로부터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박광용의 가설은 학문의 수준을 넘어서 민족진영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비난만 초래하였다.  임승국·정영훈 등은 박광용의 주장에 적절하게 응수하였으며 규원사화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훈과 심백섭이 박사학위와 석사학위 논문을 생산하는 등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무렵 정영훈의 연구성과는 큰 주목을 끌었다. 연구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4) 시민사회의 활동·남북동연구와 연구의 다양화(2000년대-현재)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조인성은 새로운 내용이 없는 위서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조인성, 「『桓檀古記』의 『檀君世紀』와 『檀奇古史』·『揆園史話』」, 『단군학연구』2, 단군학회, 2000. 
 그는 어느 일본 학술잡지에 위서설과 관련한 글을 투고하였다고 한다. 조인성,「「한국에 있어서 고대사 논쟁과 「揆園史話」 「檀奇古史」 「桓檀古記」」( 呂運虔,「古代史書의 僞書 論爭」, 『自由』 350, 성우회, 2002, 33쪽에서 재인용).
 이에 대해 여운건은  “한국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기본관점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이며 읍제국가 형태였다.”라는 조인성 주장의 핵심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인식을 상당수의 한국상고대사 연구자들이 답습하고 있음을 스스로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질타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인성이 규원사화에 대해서도 위서라는 가설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설을 학계 일반의 평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조인성의 주장을 단군의 역사를 말살한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선에 있다고 한 여운건의 평가는 대단히 타당하한 지적이다. 呂運虔,「古代史書의 僞書 論爭」, 『自由』 350, 성우회, 2002; 呂運虔, 「사서(史書) 소개」, 『自由』      360, 성우회, 2003.
 이처럼 조인성의 가설은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인성, 「단군에 관한 여러 성격의 기록」,『한국사 시민강좌』 27, 일조각,  2000. 조인성은 여기에서 검증된 근거도 없이  규원사화를 완전히 ‘거짓 기록’이라고 단정하였다.
 학계에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하여 진서론 위에 이루어진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김명하(2002년) 김명하, 「한국 상고대 정치사상에서의 천인관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2.
·박병섭(2003년) 박병섭,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한단고기』의 역사성 검토」 , 『韓國宗敎史硏究』 11 한국종교사학회, 2003.
·김한식(2004년) 김한식, 「홍익인간과 정치사상 :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상고사 서술과 관련하여」, 『단군학연구』 2, 단군학회, 2000.
은 규원사화를 상고사 연구에 적극 활용하여 그 지평을 넓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시민단체들이 규원사화 등 단군관련 고기류의 보급과 그 인식의 확산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단체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이다. 이 단체의 주최로 2002년 열린 학술회의에서 박성수는「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발표하여 규원사화의 가치를 되짚어보았다. 박성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제19회 대시민 강좌-치우천황 중심으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2002.
  
  김한식은 2003년·2004년에 걸쳐 상고사 관련 문헌비판을 주도했다. 그는 2003년 논문 金漢植, 「우리 上古史와 관련된 中國文獻에 관한 小考」, 『敎授論叢』34, 國防大學校, 2003.
에서 규원사화의 영향을 받은 사서로 김교헌의『신단실기』(1914)를 들어 규원사화의 역사성을 한층 강조하였다. 2004년 논문 金漢植,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敎授論叢』 36, 국방대학교, 2004.
에서 그는 조인성 등의 위서주장을 비판하면서 대체로 규원사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2002년의 시민사회의 활동은 2004년에도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30일 ‘국사찾기협의회’ 주체로 ‘중국동북공정 대비 단군조선사광복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고 ‘국사찾기협의회장’인 고준환이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를 발표하였다. 고준환, 「환단고기·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중국 동북공정 대비 단군조선사광복 국민대토론회 자료집』, 국사찾기협의회, 단기 2337(2004).
 물론 이는 기존의 규원사화론을 정리하는데 그쳤으나, 규원사화 논리가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의 방어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이는 규원사화가 중국과의 역사전쟁의 기본서로 활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200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으로 남북공동연구를 들 수 있다. 북한 원로 학자 손영종의 글 손영종, 「단군 및 고조선관계 비사들에 대한 리해 :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단군학연구』8, 단군학회, 2003. 손영종의 이 글은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단군조선 남북 공동학술 토론회 >에서 발표된 논문이다(고준환, 위의 논문 5쪽).
은 남북이 함께 한 연구라는 점에서 규원사화 연구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손영종이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내놓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2005년-2006년 상고사 남북공동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이는 남북의 공동역사연구의 출발이 한민족 상고사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아울러 남북이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에 공동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한편, 김한식 김한식,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나타난 자연관」, 『敎授論叢』37, 국방대학교, 2004.
·김성환 김성환, 「한국도교의 자연관: 仙敎적 자연관의 원형과 재현」, 『한국사상사학』 23집, 한국사상사학회, 2004.
은 규원사화 연구를 철학분야로 확대시켰다. 이들은 주로 규원사화에서 엿볼 수 있는 한국인들의 자연관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김성환은 위서설을 펼치고 있는 조인성 등에 대해 “학자들이 대체로 근대적 역사학의 선입관에 사로잡혀 전통적인 도교 역사서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박광용의 경우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다소 편향된 분석을 하고 있다.” 김성환, ㅇ?의 논문, 77쪽.
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규원사화의「조판기」에 한국도교(선교·신교)의 한국적 창조신화의 전형이 담겨 있다고 평가하였다. 
  신운용은 2004년 조선의 건국배경 중의 하나를 여말선초에 등장한 단군세력라고 설명한 주장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참조.
의 연장선에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단군론자 북애에 착목하면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물론 그는 북애의 논리를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민족주의의 전사(前史)라고 평가하였다. 신운용,「조선중기의 단군론과 규원사화」,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
 
  이후 이재원도 2005년 규원사화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이재원,「북한의 단군신화 인식에 대한 연구: 문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단군학연구』13, 단군학회, 2005. 12.
 그는 북한학자 김봉환·손영종 등의 논문들이 단군설화를 규원사화와 적극적으로 관련지었다고 평가하면서 『단군설화집』 43편 중 2편이 규원사화를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이는 북한의 상고사 연구에서 규원사화가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북한의 규원사화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러한 가운데, 2005년과 2006년은 규원사화 연구에 한 획을 긋는 해로 기록될 만한 해였다. 한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정영훈이 중심이 되어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선가계 사학에 대한 남북공동연구’가 2년에 걸쳐 진행되어 2006년 11월에 결과물을 제출하였다.『환단고기 규원사화 등 仙家계 사학에 대한 남북공동연구』(한국학술진흥재단 2005년도 협동연구 지정주제 지원사업 연구결과보고서), 2006.
 
  이 때 발표된 눈문은『한민족연구』에 수합되었다. 남한에서 정영훈·김성환·서영대가, 북한에서 사회과학원의 최인철과 문혁이 참여하였다. 이들 중 규원사화에 대한 연구는 정영훈과 최인철이 맡았다. 정영훈은 근대민족사학을 개괄하는 동시에 위서설을 비판하면서 규원사화와 같은 선가류 사서가 근대민족주 태동의 배경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선가사학과의 관련 속에서」, 『한민족연구』2, 한민족학회, 2006.
 
  최인철의 규원사화론은 북한의 규원사화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1) 규원사화에 국내외 문헌 40여종이 인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사서는 대명일총지(『大明一統志』) 이전의 고전이 활용된 반면, 1678년 이후의 국내 서적은 인용되지 않았다. 이점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다.   
 (2) 규원사화의 문장이나 용어는 다른 단군관계 비사들(『단기고사』·『단군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된 것이며 후세에 추가된 내용이 별로 없다.
(3) 규원사화「단군기」의 47대 왕명, 통치년간 기록도 『조대기』나 『진역유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4) 규원사화의 인명·지명은 대부분이 고대시기의 인명·지명으로 근대 이후 가필되었거나 조작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5) 규원사화의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약자이며  북애의 개탄은 양란 이후 조선의 현실을 읊은 것이다.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한민족연구』2.

  최인철은 한국의 많은 규원사화 연구자들처럼 규원사화를 대단히 진보한 사서로 평가하였다. 최인철은 규원사화에 보이는 구이(九夷) 모두가 한민족의 조상으로 본 점과 강역문제 · 수도문제·기자조선선설·연청일(連淸日)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최인철, 위의 논문, 115-117쪽). 
 하지만 그의 규원사화론이 이상시의 연구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도 보였다. 그럼에도 한민족 상고사 연구에 규원사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활용하면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북한 학자의 자세는 남한 연구자보다 진일보된 면을 보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허종호 외, 『고조선 력사개관』(북한의 우리역사연구알기 1), 도서출판 중심, 2001, 참조.

   이처럼 정영훈·최인철은 대체적으로 규원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 때 함께 한 김성환은 「대종교계 사서의 역사관」을 기술하면서 그 배경으로써 규원사화를 착목하지 못하였고, 김성환, 「대종교 사서의 역사관-상고사 인식을 중심으로」,『한민족연구』2.
 서영대는 규원사화 위조론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서영대, 「조선 후기선가문헌에 보이는 한국상고사 인식」,『한민족연구』2. 특히 그는 이 논문에서 규원사화를 선가문헌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규원사화를 선가 사서의 핵심으로 인정한 한영우의 위의 논문을 근거로 “한국사상사 이해가 심화되면서 선가의 실제가 드러났다”고 다소 논리적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점에서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남북공동연구는 색을 바래는 모습을 연출한 점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2006년 이덕일·김병기는 규원사화를 통해 치우의 의미를 추적하였다. 이덕일·김병기, 「『규원사화』에 나오는 치우관련 기록」,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이어서 민영순은 2008년 규원사화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북애 지음 ; 민영순 옮김, 『揆園史話 : 우리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돕는 역사서』, 다운샘, 2008.
 이는 규원사화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그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2009년부터는 규원사화 연구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연구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200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점에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와 그 관계기관이 최근의 규원사화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임채우이다. 그는 규원사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2009년부터 2013년까지 2009년·2010년·2011년·2013년 4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2009년 논문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에서 규원사화 위서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2010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한국 선도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호도  규원사화 위작논쟁을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였다(이승호,「한국선도문헌의 연구사 소고: 전승과정과 위작논쟁을 중심으로」, 『선도문화』6,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09).
 
  이어서 임채우는 규원사화를 통해 한국선도(도교)의 위상·특징·전통을 확인하는 일련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2010년 논문 임채우, 「『규원사화』에 보이는 天祭의 형식 : 유교 제천의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한국동양철학회』34, 韓國東洋哲學會, 2010.
에서는 한국선도의 제천(祭天) 형식을 규원사화를 통해 규명하였으며, 2011년의 논문 임채우, 「한국선도의 기원과 근거 문제」, 『道敎文化硏究』34, 한국도교문화학회, 2011.
에서는 규원사화를 한국선도의 기원과 근거를 확인하는데 활용하였다. 특히 2013년의 논문 임채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 『선도문화』 14,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에서는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비교를 통해『사문록(四聞錄)』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규원사화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진전된 연구로 평가된다.   
  이처럼 규원사화가 다양하게 연구되는 가운데서도 위서설은 계속 이어졌다. 이문영,「『규원사화』의 미스터리」,『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90-92쪽;金英珠, 「?書と檀君神話 : 『揆園史話』を中心に」, 『アジア遊?』 161,勉誠出版, 2013. 이들의 위서설은 조인성의 주장에서 조금도 진척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규원사화 연구에 끼치는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이상에 보았듯이,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는 주로 정치·철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은 위서설 연구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규원사화가 위사가 아니라는 연구성과와 인식의 확대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시민단체들이 중국의 한국 상고사 왜곡에 대한 대항이론을 규원사화에서 찾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한국시민사회와 일련의 학자들이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을 규원사화 등 선가류 사서 연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된 한국사는 일반에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남북이 규원사화를 매개로 상고사 인식을 공유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2006년 남북학술대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점에서 이 학술대회는 규원사화 연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북 공동연구가 정치적 이유로 진척되지 못한 점은 한민족 구성원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그리고 이시기의 또 다른 특징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관계자들의 연구성과에서 보듯, 이전시대보다 연구자가 양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 연구의 깊이와 폭이 다양해진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점에서 앞으로 규원사화 등 선사(仙史)와 선교(仙敎) 연구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3. 향후 연구과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68년 신학균이 규원사화 번역본을 낸 이후로 규원사화 연구는 다양해졌고 그 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앞으로 규원사화 연구를 넘어서 ‘규원사화학’ 탄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연구과제가 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약적인 연구과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크게 대과제와 소과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대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선가사관(仙家史觀)의 정립이 필요하다.
  한국사를 보는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음을 분명히 보여야 한다. 유가사관·불가사관·도가사관·기독교사관·공산주의사관·자유주의사관 등 모든 사관은 역사를 해석하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역사교육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사관이 연구방법이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역사학의 기본을 알릴 필요가 있다.
  특히 선도사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역사 기술은 사관에 따라 너무나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규원사화 연구 발전을 위해서는 선교사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2) 선가류 사서와 경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기반 구축도 시급한 문제이다.
 유가사학이 한국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가사학의 이론을 연구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선사(仙史) 연구에 대한 지원과 기관의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 점에서 단군관련 단체들이 공동으로 단군관계 종합연구기관(대학원) 설립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그리고 남북의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역사인식의 공유는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소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체호 등 선가사가(仙家史家)들의 상고사 기술과 규원사화를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가 1931년 6월 18일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근래의 위서설과 관련하여 대단히 주목되는 대목이다.

위서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태종의 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 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31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단재 신채호 전집』 제1권 역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30쪽; 이숙화, 『일제강점기의 천부경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교 국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8, 39쪽 참조.

 
  여기에서 보듯이 신채호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로 보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규원사화를 접했다면 이 역시 위서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2) 규원사화의 중요 용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규원사화 속에 담겨져 있는 용어의 출처는 신향(神鄕)(『한서』), 三一( 『사기』), 대고(大誥)(『서경』), 대과(大塊)(『장자』), 주신(主神)(『일본서기』), 민기(民氣)(『여씨춘추』), 선민(先民)(『서경』), 천주(天主)(『天主實義』) 등이 밝혀졌을 뿐이다.
  다른 사서에서 규원사화에서 사용된 용어를 국내외의 사서에서도 찾을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의 성격을 확인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선민’이라는 용어는『세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종 38권, 9년(丁未) 11월 7일(신묘)조.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전조(田租)를 감하여 백성들은 곡식이 남아서 썩는 효력을 나타내었고, 선민(先民)들도 “1분(分)쯤 너그럽게 하면 백성이 1분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으니(漢文帝減省田租, 而致紅腐之?, 先民亦曰: “寬一分則民受一分之賜)”(밑줄: 필자)

 3) 규원사화의 한국사상사 상의 위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의 “이도흥치(以道興治)”, 신라 낭랑비서문의 “국유현묘지도왈풍류(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신채호는 “國有玄妙之道, 曰風流”의 풍류를 “國有玄妙之道仙敎是已”(『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11일자, 「東國古代仙敎考」)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선교라고 주장하였다.
, 고려 이승휴의 홍익인간(弘益人間), 고려의 팔관회, 여말선초의 단군론 등 규원사화와 선(仙)의 관계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구려 호태왕비의 이도흥치의 도는 선도(仙道)임이 분명하고 늦어도 호태왕비가 세워진 414년(장수왕 2)까지는 선도에 의해 고구려가 운영되었음을 이 비는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배경으로 선도가 강력히 작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 가강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규원사화와 대종교계통의 사서와 경서(經書)의 비교연구도 필요하다. 이는 규원사화가 적어도 여말선초와 근대를 잇는 매개체였음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4)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이 요구된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의 별자리 연구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저인 방법을 규원사화 연구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결과라 나올 것이다.

 5) 민족의식에 대한 동시대 타국 (청국과 일본 등)의 상황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민족의식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인류사적 측면에서 주변국과 비교연구가 절실하다. 이는 선교사가 특수사가 아닌 보편사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해야만 하는 연구이다. 특히 한민족의 선교와 일본의 신도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일도 아울러 요청된다.

 6) 연구분야를 다양화해야 한다.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규원사화를 연구해야 한다. 이들 분야에서 연구된 규원사화는 아직 초보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분야의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7) 위서 주장에 대한 반박기술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까지 연구만으로도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님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더는 위서설을 반박하는 일은 무의미한 작업이다. 이제부터는 통사적이고 미시사적으로 더욱 치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4. 맺음말
  글쓴이는 이상에서 규원사화가 연구되어온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보면서 앞으로의 연구과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항일전쟁기 1925년『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인용되면서 규원사화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규원사화는 1925년 이전의 사서에 활동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항일전쟁기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규원사화 연구사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신학균이다. 그는 최초로 규원사화를 번역 출간하여 연구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1970·80년대는 주로 번역서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이 1946년 김수일 소장본이 진본임을 1972년에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 연구사에 기록되어야 할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써 규원사화의 연구가 촉진된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1977년 송찬식의 위서 주장도 있었지만 규원사화 연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에는 규원사화 연구가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1980년 중반 이후 조인성을 필두로 ‘위서설’이 등장하면서 이에 이상시가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1990년초반부터 박광용의 ‘광적’인 주장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이에 대해 임승국·정영훈 등이 적절하게 대응하였으며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훈의 박사학위 논문과 심백섭의 석사학위 논문이 나오는 등 연구수준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 무렵 정영훈은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그 연구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는 전 시대보다 정치·철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연구의 다양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은 위서설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규원사화가 진서라는 연구성과와 인식의 확대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시민단체와 학자들이 중국의 한국 상고사 왜곡에 대한 대항이론을 규원사화에서 찾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상고사 연구 방향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며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필사의 노력에 따른 결과이었다.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된 한국사는 더 이상 주류시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남북이 규원사화를 매개로 상고사 인식을 공유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2006년 남북학술대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북의 공동연구가 진척되지 못한 점은 남북이 서로 반성해야 할 점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특징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관계자들이 적극 참여는 등연구자의 다양화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여러 방면에서 규원사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이전시기보다 선사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점은 규원사화 연구의 미래를 밝게 해 준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크게 대과제와 소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과제로 선교사관의 정립이 필요함이 역설된다. 선교사관의 정립 없이는 규원사화의 올바른 평가는 불가능하다. 유가들이 지배해온 한국사를 선도 사관에서 보면 많은 부분 해석을 달리할 수 있고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확충과 연구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규원사화 속의 용어 대한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2) 한국사상사 상의 규원사화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더욱 기우려야 한다. (3) 규원사화 내용의 과학적인 논증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5)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규원사화를 연구해야 한다. (6) 규원사화 관련 논문에서 위서설의 기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국학과 국학운동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근대 국학의 성립과 그 국학적 요소

김동환 [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 들어가는 말
 2. 기존 국학의 이해
 3. 근대 국학의 성립
 4. 근대 국학의 국학적 요소
 5. 나아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요즘 우리 사회의 주변이 무척이나 복잡하다. 국내적 문제는 물론 국외적 문제 역시 녹녹치 않다. 그 중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학계뿐만이 아니라 정치계?문화계?교육계를 비롯하여, 한민족 사회 전반에 역사인식의 중요성에 대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이러한 역사왜곡 행태를 보면서, 학문이라는 것이 국가적 목적 앞에 무력한 시녀와 같이 전락될 수 있고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말이 국가 혹은 집단의 정책에 의해 어용적 도구로 포장될 수도 있다는 것과 국제관계사 속에서 강대국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힘없이 변개될 수도 있음을 다시금 목도하게 되었다.
   또한 과거 한국과 중?일관계사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중화주의사관이나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가치명제가 아직도 우리 역사계의 티눈으로 박혀 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 국학(國學) 연구에 정체성을 동반한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특히 우리 국학(國學)의 고향으로 고조선의 터전이었던 고구려사?발해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은,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시적으로 흔들어 놓을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태도는 그들의 중화주의적 비전으로, 한국에 대한 과거?현재?미래의 안목이 숨겨진 의도적 작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한국의 과거는 그들의 속국?중화문화의 시혜자요, 한국의 현재는 한반도에 묶여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불완전의 집단이며, 한국의 미래 또한 동북아의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자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문화제국주의적 망상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적 망상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난국에 우리는 국학이라는 의미를 또 다시 생각치 않을 수 없다. 국학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 정체성의 논리요 외국에 대한 국력이론이며, 원심론(세계화론)을 위한 구심론(민족이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정신적  단합요소로 작용한 국학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답게 만들어 온 문화사의 정수이며 민족을 민족답게 지켜 준 정신사 고갱이다. 특히 구한말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파급되는 국학의 성립과 발전은 국학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획기적 변화를 몰고 왔다. 김동환, 「국학과 홍암 나철에 대한 연구」,『국학연구』제9집, 국학연구소, 2004, 187-272쪽 참조.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우리 근대 국학 성립에 대한 논리와, 그 속에 담겨진 국학적 요소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특히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에 의해 성립된 근대 국학의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상 속에 담긴 국학적 요소를 집중 살펴보고자 한다.

2. 기존의 국학 이해
   일반적으로 국학이란 우리나라와 관련된 총체적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역사 현상 속에 녹아 내려온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예술?민속 등, 우리 민족의 모든 사상(事象)이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학은 다른 나라의 학문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정체성과 독창성을 존립 기반으로 한다. 국학이라는 명칭이 상대적 가치 규정이기 때문이다. 김동환, 『국학이란 무엇인가』, ㅎㆍㄴ뿌리, 2011, 31쪽.
 
   물론 최근의 국학을 한국학과 같은 개념으로 부르게 되면서 양학(洋學) 또는 외국학과 구별하기 어려워, 양자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국학의 정립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동방학지』100호, 연세대국학연구원, 1998, 2쪽.
 그러나 국학이라는 의미 규정을 올바로 정립하지도 않은 현 시점에서는 쉽게 공감만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학은 시간적으로 현재와 미래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가치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속성과, 공간적으로도 국학의 분류 근거가 존재론적이 아니라 지역적 분류에 근거한 차별성을 우선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이문, 「인간다운 삶과 국학」,『인간다운 삶을 위한 국학』, 안동대학교국학부, 2001, 27쪽 참조.
 더욱이 동시대의 사회 현실을 직접 다룬다고 하여 역사와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인류의 보편적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주목한다 하여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학에 대한 편견도 기우일 수 있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알아야 동시대의 현실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출발해야 세계와 인류의 문제를 포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기존의 연구 속에서 나타나는 국학의 상한(上限)은 삼국시대를 넘지 못한다. 이만열 은 국학의 흐름을 태동기와 성립기 그리고 발전기로 삼분하고 있다.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 앞의 글, 참조.
 먼저 그는 삼국시대 자기의 역사를 남기려는 작업에서 국학적인 의식의 태동기를 찾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나타나는 역사기록의 의식과 신라 김대문의 저술 속에 농축된 자국문화의식, 그리고 최치원의 국학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지눌 사상에서도 우리 식의 깨달음과 사유가 숨어 있고 도선의 도참설이나 김위제의 신지비사 인용, 유교세력에 반기를 들고 정금론(征金論)과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묘청, 대장경조판과 7대 실록의 완성, 특히 몽고 침략의 위기 속에 나타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이규보의 『동명왕편』등에 나타나는 자주의식은 조선 초기 국학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음으로 그는 국학의 성립기를 조선 초기의 새로운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 민족문화가 흥왕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몽고침략으로 성숙된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문화의식, 고려후기에 성장한 민중세력의 관심, 원(元)나라를 통해 수용한 세계문화의 자극이라고 말한다. 또한 국학 성립기의 중심에 역시 세종의 한글창제를 놓고 있다. 이만열 교수가 한글창제 시기를 국학의 성립기로 본 것에 비해, 황원구 교수는 한글창제를 다음과 같이 국학의 태동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적인 경학?문학?사학?불학 등이 고려시대에 과연 명실상부하게 한국적인 것으로 완전 소화되고 정착되어서 전통문화로 굳어지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것은 중국적인 여러 학문과 문화요소를 수용해서 이를 이해하고 성숙시켰을 뿐, 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중략)…이런 점에서 국학의 개념과 정신에 어느 정도 접근될 수 있는 시기는 조선 조기 세종 때의 한글창제와 문화가치의 학문화를 들 수 있다.”(황원구, 「국학의 연원」,『東亞史論攷』, 혜안, 1995, 117-118쪽.)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민족국가의식?애민의식?문화주의적 동기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주적이고 국학적인 분위기는 조선 전기 문화계 전반을 풍미하는데, 인문학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인문지리를 정리하는데서 두드러지고 사서의 편찬과 각종 문화유산의 보존 그리고 과학기기 등의 발명 등에 찾을 수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그는 국학의 발전기로 지칭하면서, 임란(壬亂)?호란(胡亂) 이후의 새로운 의식의 대두와 주자학에 대한 반성, 고증학과 서학(西學)의 수용을 그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황원구 교수는, 조선 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에 의해 나타나는 현실적?실용적?합리적?실증적?비판적 정신에서 국학의 성립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실학시대를 제 1단계 국학기로 잡고, 20세기 전반 일제침략기를 제 2단계 국학기로, 그리고 해방 후 이루어진 국학연구 분위기를 제 3단계 국학기로 설정한 바 있다.(황원구, 「국학의 연원」, 같은 책, 118-123쪽 참조.)
 특히 사상적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으로 인한 화이관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와 원심적인 자기인식에 경도된 주자학이 퇴조하고 구심적인 자아의 발견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대두됨으로써, 국학의 자아인식이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국학을 논하는 학자들이 실학시대를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판단과 연결된다. 이 시기에는 자아의식의 성장을 토대로 역사학을 비롯하여 고전정리?어문학?지리학?의학?농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학문적이 업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우리의 학문사 내지는 문화사에서 일종의 문예부흥기와도 같은 시기로도 보고, 우리의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변혁기라고도 평가하는 것이다. 같은 책, 120쪽.

   그 중에서도 역사학 분야에서는 강목체의 서술로 정통론(正統論)에 입각하여 씌어진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변화된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정통론을 극복하는 사서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그리고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꼽힌다. 특히 소론계의 이종휘는 단군의 계보가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는 ‘부여-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움으로 처음으로 대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더욱이 유득공의 『발해고』를 효시로 나타난 발해에 대한 관심은, 여러 역사지리서의 등장과 함께 대륙사관적 역사인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학의 위와 같은 역사서술이 유교사학의 상고사 인식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사학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동이문화를 유교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동이문화를 신교(神敎) 중심의 문화로 파악하려는 도가사학(道家史學) 또는 신교사관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한영우, 「17세기의 反尊華的 道家史學의 성장」,『한국의 역사인식』상, 창작과비평사, 1976, 300쪽.

   또한 이 시기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관심도 자아의식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과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그리고 유 희의 『언문지』등이 그것인데, 후일 최초의 국문(國文)이라는 명칭과 함께 순 한글표기와 띄어쓰기 시행, 병서 등을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이봉운의 『국문정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실학의 연구방향은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당면한 문제들과 현실개혁을 위한 사회경제적 문제, 나아가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연구와 함께 새로운 철학에 대해서도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실학이 국학이라는 명칭에 부합될 수 있었던 근거는, 한계성이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것과 함께 근대지향적 성격과 민중사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요 이론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151쪽.
 더욱이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실학에 있어서 실제성의 판단은 모름지기 이 민족과 국가를 어떻게 위하는가의 여부로부터 내려진다는 지적과 함께, 실학이 지향하였던 ‘실제성의 기준’이 어디까지나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민족’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김준엽, 「서문」,『실학사상의 탐구』, 현암사, 1975, 4쪽.
    
   한편 기존의 연구는 국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그 개념이 정립된 시기를 1930년대로 잡고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과 통치기를 지나면서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위기에 처하자, 일부학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되찾아 이를 살려 나가고자 하는 학문적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는 국권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그러한 분위기의 학문을 한국의 칭호인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조선학’ 혹은 ‘국학’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애국적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현실 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도모했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재발견코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발전시켜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황원구, 「국학」,『東亞史論攷』, 앞의 책, 115쪽 참조.

   특히 조선 후기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정인보가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같은 글, 115-116쪽 참조.
 황원구는 정인보 등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학문과 사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개척된 탈중국적인 사상의 흐름을 국학의 계보로 파악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정인보가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사용한 이러한 국학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서 의미 규정을 한 것이다. 이것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명명해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학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實事求是라는 말은 중국의 漢代부터 쓰여진 고전적인 용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해 중히 사용되었던 것을, 후일 호암 문일평이 실학이 마치 실사구시학인 양 實事求是學派라고 표현함으로써, 실학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이을호, 「한국의 실학사상 개설」,『실학사상의 탐구』, 앞의 책, 12쪽 참조.)
 국학이라는 용어도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현금에는 국학이라는 개념 용어로써 의미를 넓혀 온 것과 같은 논리다.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 앞의 책, 2쪽 참조.
 더욱이 해방 후 정인보가,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새로운 체제의 대학을 서대문 밖에 설립할 당시, 국학대학(國學大學)이라는 교명(校名)을 지었다라는 기록 민영규, 「위당 정인보 선생의 行狀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實學原名)」,『담원정인보전집』1,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356쪽.
도 정인보와 국학의 관계를 한층 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정인보는 1930년대를 풍미하던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 유학의 고질인 사대주의와 개화기 이후 서학을 수용함에 있어 나타나는 몰민족적 자세를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실증사학의 표방으로 1934년에 발족된 진단학회의 학풍을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도피적 사학으로 간주했다. 즉 우리들의 마음, 실심에 기초한 학문이 없고 남의 마음, 허심(虛心)에 근거한 국학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가 구현코자 했던 국학정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5천년 간 조선의 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상기해 볼 일이다. 박성수, 「위당 정인보와 조선사연구 해제」,『정인보의 조선사연구』(박성수 편역), 서원, 2000, 170-175쪽 참조.
 

3. 근대 국학의 성립
   전통시대의 학풍에서는 국학이라고 개념화할만한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기존의 국학에 대한 연구 역시, 우리 것에 대한 기준이 없이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개념 설정과 학문의 제업적에 대한 나열형식의 탐구, 그리고 역사적 상한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존 연구 대상으로서의 국학은, 국학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사상적 정체성’과 ‘공간적 차별성’, 아울러 우리 민족의 형성으로부터 민족사를 관통할 수 있는 ‘시간적 연속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김동환, 『국학이란 무엇인가』, 앞의 책, 88쪽

   정체성이란 국학의 연구와 인식대상에 있어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성에 근접한 가치이며, 차별성이란 중국?일본?미국 등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적 차별성과 연결될 수 있고, 연속성이란 우리 문화사 속에 단절되지 않고 흘러온 우리 것에 대한 시간적 가치라고 규정짓고 싶다. 특히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가치가 유입되어 습합 또는 혼재되어 온 우리의 경험에서는 이러한(사상적?공간적?시간적) 요소에 의한 순수국학의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같은 책, 86-108쪽 참조.
 이러한 정리의 필요성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어 문화적 정체성이 모호하게 인식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반드시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민족적 과제이기도 하다. 한말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가령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한국의 문학이나 교육체계?조상숭배 등 문화적 사유 양식이 모두 중국적으로, ‘중국문화의 패러디’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 29-30쪽 참조.
 또한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뒤, 라이샤워와 페어뱅크가 공저한 책(1960년 발간)에서도,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종속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이샤워?페어뱅크(전해종?고병익 옮김),『동양문화사』, 을유문화사, 1984, 506쪽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국학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 황원구, 「국학」, 앞의 책, 115쪽.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 앞의 책, 2쪽.
이라고 개념화시킨다면,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연속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막연한 감이 있고 주변문화의 아류 또는 패러디라는 멍에를 결코 벗을 수 없다. 오히려 국학의 의미규정을 위의 요소를 토대로 정제시킴으로써 진정한 국학연구의 틀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순수국학 개념화에 대한 주장이 폐쇄적 혹은 국수적인 국학정립을 외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상적?공간적?시간적 요소들을 고루 갖춘 국학을 순수국학의 의미로 사유해 본다면,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사상?문화 ?풍습?언어?제도 등, 우리 역사의 줄기에 습합되어 자리 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대별시킬 수 있다.
   다만 순수국학은 위의 세 요소 외에 학문적 범주로 인문학의 토대인 문(文)?사(史)?철(哲)로 국한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文)?사(史)?철(哲)은 고전학의 근본인 동시에, 전근대 사회까지 동북아에 국학으로 통념화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즈(胡適)도 국학을 국고학(國故學)의 약어라고 전제하고 중국의 모든 과거의 문화?역사는 중국의 ‘고유문화(國故)’로, 이러한 모든 과거의 역사?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국고학(國故學)이며, 생략해서 국학이라고 정의했다. 胡適, 「國學季刊發刊宣言」,『胡適散文』第一集, 中國廣播電視出版社, 1992, 참조.
 또한 19세기 서양문화가 중국으로 밀려들 때, 당시 중국 사람들은 서양과 중국의 문화를 서로 대비하여 서학(西學)?중학(中學)이라 부르거나, 혹은 신학(新學)?구학(舊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중국의 국학이라는 용어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생겨난 것이다. 樓宇烈(박승현 譯), 「중국 국학연구의 회고와 전망」,『우리 국학의 방향과 과제』, 앞의 책, 135쪽.

  일본의 국학 또한 문(文)?사(史)?철(哲)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었음은 에도시대의 국학성향을 보면 이해가 된다. 伊藤亞人(임경택 역), 「일본에서의 국학과 일본연구」, 같은 책, 177-178쪽.
 특히 명치 이후의 일본 국학은 국학원대학의 개설과 함께 국사?국어학?국문학?신도학?고고학의 교육연구가 국학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었으며,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진행시켰다. 같은 글, 187쪽.

   아무튼 이러한 요소와 주변 정황을 통해 우리의 순수국학의 개념을 간추려 보면, 순수국학이란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시원으로 고유하게 흘러 내려온 문(文)?사(史)?철(哲)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일찍이 안재홍이 협의(狹義)의 조선학을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 것도 이러한 순수국학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안재홍, 「조선학의 문제」,『新朝鮮』(1934년 12월호),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와 같은 순수국학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학의 근본인 한국정신사의 정수(精髓)를 세우는 작업으로, 한국의 고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한국사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부분이 토착고신앙(土着古信仰)이며, 그 자체가 중요한 맥락을 이루면서 한국사 전반에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 또한 토착고신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때문이다. 김재경, 「한국 토착고신앙의 명칭문제 검토」,『한국학보』제83집, 일지사, 1996, 167쪽.
 특히 고신앙 방면은 일제시대 민족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단군신앙의 영향을 컸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같은 글, 168쪽 참조. 까닭에 김교헌이 칭한 ‘神敎’나, 신채호가 말한 ‘仙敎(東國古代仙敎考)?수두敎(朝鮮上古文化史)?朗家(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그리고 최남선이 칭한 ‘부루敎’, 박은식의 ‘國魂’, 정인보의 ‘얼’, 이능화의 ‘神敎’, 안확의 ‘倧思想’ 등은 신라 최치원의 ‘玄妙之道’와 함께 小異相通하는 명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후일 단군신앙을 부활시킨 홍암 나철에 의해 근대 국학이 비로소 정착됨을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동환, 「국학과 홍암 나철에 대한 연구」, 앞의 글, 참조.

   또한 한민족의 형성사가 고조선 원민족의 형성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민족사회학적 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용하, 「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학』, 지식산업사, 1998, 154-160쪽 참조.
 즉 민족국가의 형성은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원민족에 나타나는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지배지역과 지역주민을 끊임없는 정복에 의하여 확대해 가려는 강렬한 운동을 촉발시켜 꾸준히 민족형성으로 팽창해 가는 동태를 가지고 있다. 신용하, 「민족형성의 이론」, 『한국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학』, 같은 책, 344쪽.
 
   이러한 군사공동체의 특징을 단군시대부터 발견한 인물은 신채호다.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이, 단군시대의 무사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단재신채호전집(改訂版)』上(이하 改全集이라 略稱함),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2, 372쪽.
 그는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극찬했다. 같은 글, 383쪽.
 까닭에 그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것도 화랑이라고 말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개전집(상)』, 같은 책, 225쪽.
 
   한편 신채호는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을 국학(國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즉 “부여?마한 등 십여국의 이름을, 그 연혁을 찾으면 다 단군 때부터 있던 칭호라. 후세에 국학이 끊어져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 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라는 기록이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앞의 글, 359쪽.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 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 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 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신채호, 「꿈하늘」,『개전집(하)』, 같은 책, 213-215쪽.


라고 서술함을 볼 때, 국학(國學)과 불학?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양학(洋學)에 대비하여 사용한 국학의 의미 신채호, 「考古篇(天鼓)」,『개전집(별집)』, 같은 책, 267쪽.
도 무엇이었는가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채호에 있어서의 국학과 국수(國粹)의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용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국수의 정신을, “國粹者는 何오. 卽 其國에 歷史的으로 傳來하는 風俗?慣習?法律?制度 等의 精神이 是라.(國粹保全論-1908年)” 신채호, 「국수보전론」,『개전집(별집)』, 같은 책, 116쪽.
고 주창한 바 있는데, 이 국수정신의 출발을 단군에 접맥시킨 것이다.
   한편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박은식, 「한국통사(결론)」,『박은식전서(상)』,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75, 376쪽.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국어?국문?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 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국문?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사(史)?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김동환, 「박은식 민족사학의 정신적 배경」,『국학연구』제4집, 국학연구소, 1998. 69-71쪽 참조.
 
   특히 박은식이 또 다른 글에서, 육체의 생활은 잠시일 뿐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면, 그 육신의 고초는 잠시일 뿐이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고 화를 주는 자는, 육체의 쾌락은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 것이라고 경고함 박은식, 「몽배금태조」,『박은식전서(중)』, 앞의 책, 207쪽.
을 볼 때, 박은식의 학문에서 정신이 차지하는 무게를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채호가 단군의 선교(仙敎)를 중국의 선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단군선교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종교의 침체를, ‘국수(國粹)의 무너짐’이라고 한탄함을 볼 때,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앞의 글, 387쪽.
 신채호의 국수 혹은 국학이 단군신앙에 연결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박은식도 단군신앙을 부흥시킨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삼신을 믿는 최고(最古)의 종교로 보고 그 신조(信條)가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 국혼(國魂)의 토대가 단군신앙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의 본격적 시발은, 나철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단군신앙 부활에서 나타난다. 특히 나철의 업적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은, 그가 민족적 사유의 기반인 문(文)?사(史)?철(哲)의 확립을 통해 국학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족 집단에 있어 국어와 국사는 그 집단의 철학?사상과 더불어 정체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김동환, 『이 달의 문화인물-나철』, 문화관광부, 2005, 16쪽.
 나철의 단군신앙 중광을 계기로, 유교?불교의 정신에서 배달의 정신으로 돌아 왔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였으며, 진정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였다는 주장 이현익,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대종교보』가을호, 대종교총본사, 2000, 51쪽.
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일각에서는 실학에 나타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나 한말 의병운동에서 표방했던 척사위정(斥邪衛正), 그리고 대한제국기 개화파들이 들고 나온 동도서기(東道西器) 등의 구호들을 주목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 외침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나아가 최남선의 ‘부루교(敎)’나 ‘신도(神道)’, 정인보의 ‘조선얼’ 그리고 안재홍의 ‘한??’이나 ‘태백진교(太伯眞敎)’, 안확의 ‘종사상(倧思想)’과 이능화의 ‘신교(神敎)’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가 단군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호상은 전래 단군신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철학을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개념화시키기도 했다. 안호상, 『국학기본학』, 배영출판사, 1977, 참조.
 
   따라서 나철이 주도한 단군신앙의 부활은, 종교적 범주를 넘어 단군과 연관된 문(文)?사(史)?철(哲)로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보여준 사유의 양태가 민족 고유의 단군신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볼 때, 근대 국학의 성립 역시 여기에서 찾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4. 근대 국학의 국학적 요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상성이나 시간성 그리고 공간성이 충족된 순수국학의 의미와 그 실체를 우리 근대사에 가장 잘 드러내 준 인물이 나철이다. 그것은 나철이 우리의 문?사?철에 회통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 신앙의 중흥을 통해 순수국학의 실체를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김동환, 「국학과 홍암 나철에 대한 연구」, 앞의 글, 221쪽.

   나철은 당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국학자가 아닌 평범한 유학자였다. 또 유교적 소양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한다. 그가 개화사상에 눈을 돌려 근대화에 눈을 뜬 것도 유학자의 안목에서다. 여러 차례의 도일활동(渡日活動)을 통해 외교적 독립을 외쳤던 것도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행동이요, 을사매국오적에 대한 주살(誅殺) 거사도 유학자로서의 비분강개였다. 김동환, 「홍암 나철의 사상과 독립운동방략」,『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113-114쪽 참조.

   나철이라는 인물이 유학자로서의 허물을 벗고 국학자로서 변신하는 계기는 단군신앙을 접하면서다. 나철은 1905년 단군교에 입교하고 1906년 단군교의 영계(靈誡)를 받음과 동시 전래경전(傳來經典)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 천제를 행하고「단군교포명서」를 반포함으로써, 단군교(후일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김동환, 「기유중광의 민족사적 의의」,『국학연구』제1집, 1988, 참조.
 이 사건은 우리 민족 사회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온다. 특히 나철의 단군신앙 중흥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의 회복을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배달교(倍達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섰다는 주장은, 나철 사상에 나타나는 국학적 요소가 전술한 순수국학의 의미 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국학적 관점에서,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동학의 창도로 나타나는 수운사상 그리고 증산교의 창교로 대두되는 증산사상을 비교함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즉 홍암은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을 택함으로써, 사상적?시간적?공간적 특성을 두루 갖춘 순수국학적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자생종교라는 동질성을 가진 수운사상과 증산사상에서는, 시간적 연속성과 사상적 정체성이 결여된 불완전한 국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동학과 증산교보다 후에 일어난 단군신앙(대종교)에 의해, 우리의 국교 관념이 대두되고 국어?국사의 연구가 주도되었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철이 단군 신앙의 중흥을 모색한 배경에도, 평소 그가 품어 온 정신의 중요성이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국망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우국의 행보를 옮기면서도, 늘 시대적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정신’을 갈망했다. 그가 평소 품어오던 ‘국망도존(國亡道存: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가 그것이다. 김동환, 「대종교 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국학연구』제6집, 국학연구소, 2001, 141쪽 참조.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부활을 대종교의 중광에서 찾는데, 박은식이 찾아 지키고자 했던 ‘국혼’과 신채호가 갈구하던 ‘국수’의 의미와 통했던 것이다. 나철이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 받은 「단군교포명서」와 규약, 그리고 그가 남긴「중광가(重光歌)」·「이세가(離世歌)」를 비롯한 여러 글에 나철의 국학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김동환, 「국학과 홍암 나철에 대한 연구」, 앞의 글, 221-225쪽 참조.
 
   먼저 한글 방면을 보자. 나철 역시 당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한문 지식을 배경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행세한 인물이다. 물론 대종교를 중광한 후에도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서나 논문을 남긴 것도 없다. 그러나 나철이 단교교단으로부터 받은 「단군교포명서」를 보면 우리말에 대한 애착이 많이 나타난다. 즉 조선이라는 말이 배달에서 왔다는 설명과 더불어 배달목?태백산?패강?임검?이사금?이니금?나라?서울 등 우리말에 대한 어원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교단이 대종교 중광 이전에 이미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후일 한글운동을 주도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동환, 『이 달의 문화인물-나철』, 앞의 책, 16-29쪽.
 
   대종교를 중광할 당시 단군교단으로부터 받은 규약문류(規約文類)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지침이 나타나고 있다.

“一. 봉교인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문자를 해득치 못하는 자는 마땅히 한글을 먼저 익히게 하되 만일 가난하여 여유가 없는 자에게는 부득이 강행할 것임.”

   즉 문자를 모르는 교인이 있으면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한글을 먼저 습득케 하라는 종교적 규약을 보면, 한글에 대한 대종교 혹은 나철의 방침이 무엇이었는가가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대종교의 노래 중 나철이 작사한 「한풍류[天樂]」「세얼[三神歌]」「세마루[三宗歌]」「어천가[御天歌]」 등의 곡을 보면, 당시 한문으로 익숙해 있던 지식인 나철의 순수한 우리말에 사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 단어?한 글자에도 한자어 사용이 없고 유려하고 세련된 조탁에 의해 펼쳐진 이 노랫말 속에서, 나철의 순수 우리말 구사 능력과 그것을 위한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수원 편, 『대종교요감』, 대종교총본사, 1983, 260-271쪽 참조.

   나철의 단군신앙 영향 속에, 우리말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의 선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한힌샘 주시경이다. 물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실시 주장했던 지석영도 대종교인으로 대종교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기록이 나타나지만, 주시경이야말로 우리글의 명칭을 ‘배달글(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으로서, 한글을 통한 언어 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오로지 헌신했던 인물이다.
   또한 나철과 주시경의 이러한 국어정신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김두봉과 이극로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들 중, 최현배?정인보?안호상?안재홍?이병기 등도 대종교 내의 그 기록의 인멸에도 불구하고 대종교정신과 관련하여 국어활동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국어학이 아닌 국문학 방면에서 나철의 대종교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문학의 통사체계를 처음으로 확립하여 국학의 뿌리를 확립한 인물이 자산(自山) 안확(安廓)이다. 특히 안확은 상고문학의 기원을 대종교의 ‘종(倧)’사상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 상고 문학의 기원이 종교적 신화에 담겨 있으며, 그 종교적 신화의 한국적 원형을 ‘종화(倧話)’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종화’의 주요 모티브를 삼신(三神)에서 찾았고 삼신의 속성인 덕(德)?혜(慧)?력(力)의 섭리가 인간의 생활로 작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까닭에 안 확은 이러한 ‘종’의 관념이 일반 국민의 중심사상을 구성하여 생활 깊이 파고드니, 그 주관적 의식의 발달이 개인 윤리의 역사를 나타내고 그 객관적 도덕질서의 발달이 사회 윤리의 역사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한국의 인문사(人文史)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나철은 국사인식에서도 기존의 유?불 사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는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받은 교리(敎理)?교사(敎史)와 「단군교포명서」등과 같은 문류(文類)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다. 먼저 발해 문왕 대흠무가 기록했다고 전하는 내용을 보면, 『고조선기』와 『후조선기』를 인용하여 단군시대에서 부여로, 그리고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대륙적 혹은 대동아주의적 역사인식이 나타난다. 대종교종경편수위원회편, 「三一神誥奉藏記」,『대종교경전』, 대종교총본사, 2002, 77-80쪽 참조.
 이러한 역사인식은  이미 상고 동이족의 활동무대가 현재 중국본토의 일부와 동북아 전역을 점했다는 중국학자의 주장으로도 뒷받침되는데, 徐亮之, 『中國史前史話』, 華正書局(臺灣, 中華民國68年), 267쪽. [原文] 可知殷周以前乃至殷周之世的東夷, 其活動面, 實包括今日山東全省, 河北渤海沿岸, 河南東南, 江蘇西北, 安徽中北, 湖北東隅以及遼東半島朝鮮半島等廣大區域, 而山東半島爲其中心.
「단군교포명서」에도 ‘단군→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고, 고대 신교의 자취가 동북아 전역에 뻗쳤음을 언급했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81-92쪽 참조.
 
   또한 단군의 가르침은 외면한 채 유교에 함몰된 당대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은, 같은 책, 84쪽.
 일제하 민족주의사학에 나타나는 반존화적(反尊華的) 성향의 지침과도 같다는데 주목을 끈다. 이것은 대종교의 역사정신이 철저하게 신교사관(神敎史觀) 혹은 도가사학(道家史學)에 바탕 둠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철이 남긴 「중광가」의 일부를 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승계되고 있다. 대종교총본사편, 「중광가」,『홍암신형조천기』, 대종교출판사, 2002, 66-67쪽.
 즉 기준왕(箕準王)의 박사였던 위만이 배반할 당시, 신교(神敎)의 원본 서책들이 영원히 유실되고, 한나라의 한사군 때와 당나라 때의 안동도독부 설치로 신교의 근거와 서책이 흩어지고 타버렸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몽고의 침략으로 신교의 제전인 팔관(八關)의 폐지와 신교 서책의 수난을 한탄하고, 조선조 세조?예종 당시 도참서를 금기시하여 『고조선사』를 비롯한 교리?교사 서적이 없어졌음을 개탄했다. 한편 불교가 전래될 당시 경계하고 조심했던 분위기를 일깨워 주고, 유교의 전래로 인한 족성(族性)의 와해를 조소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조 세조?예종 때의 수서 종류들을 신교사서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것은 나철이, 단군교를 경험하기 전인 1904년에 쓴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준 글(與伊藤博文書)」이라는 내용에서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허수아비를 만드는 자는 그 뒤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 형상을 미워하여 따라 죽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이 소국이라 하나 그 인구가 이천 만을 내려가지 않고 모두 血力과 性命이 있어 결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견줄 바 아니라.”『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26쪽.
는 구절에서,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남은, 대종교 중광 후 신교사관을 중심으로 한 탈유교적 정서와 대비된다는데 주목되는 부분이다.
   또한 「단군교포명서」에 나타나는 기자?동명성왕?을지문덕?광개토대왕?대조영?김유신?왕건?이성계 등의 인물 행적을 통해 제시되는 신교적 흐름을 승계하여, 같은 책, 82-84쪽 참조.
 나철은 「중광가」에서 비서갑신모?부루?부우?부소?부여?팽우?고시?신지?왕조명?배천생?여수기?기자?왕수긍?문박씨?비류왕?해모수?아란불?고주몽?박혁거세?파소 婆蘇는 부여 임금의 딸로서, 慶州에 있는 仙桃山으로 들어가 수도를 통해 東神母의 地仙 칭호를 얻었다 함.
?알영부인?극재사?중실무골?소실묵거?오간?마려?김유신?을지문덕?명립답부?산상왕?을파소?대조영?왕건?솔거?김생?대조영?왕건?최치원?이규보?대야발?임아상?대흠무?이성계?인조(仁祖)등의 수십 명의 신교 관련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백봉신사의 정성으로 이 도맥이 되살아났음에 감격했다. 대종교총본사편, 「중광가」,『홍암신형조천기』, 앞의 책, 63-66쪽 참조.

   그러므로 나철이 1914년 10월 5일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총본사에 고령사(高靈祠)를 설치하고 부루?부여?팽우?고시?신지 등을 비롯한 단군신앙의 선철선성(先哲先聖) 14인에게 제례를 올린 것도, 숭조교본(崇祖敎本)을 통한 신교사관 확립의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동환, 「대종교와 홍익인간사상」,『국학연구』제7집, 국학연구소, 2002, 291쪽 참조.
 
   한편 나철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교의식을 환기시켰다는 점이 특기된다. 홍암은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연면히 흘러온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사유를 가장 옹글게 간직한 것이 단군신앙으로 보았다.
   대종교의 전래 경전이 단군시대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며 그것의 역사적 전개 또한 교명(敎名)만 달리 할 뿐, 동북아 전역에 이어 왔다는 것이다. 즉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발해에서는 대도진종(大道眞倧), 그리고 신라는 숭천교(崇天敎)로 고려는 왕검교(王儉敎)로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로 흘러 왔음을 밝혔다. 대종교총본사편, 「중광가」, 앞의 책, 63쪽.
 또한 삼신제석으로 떠받드는 성조신(聖祖神)과 태백신제(太白神帝)인 산상신(山上神), 그리고 만주족이 신봉하는 주신(主神)과 태고단신(太古檀神),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동황대제노백신(東皇大帝老白神) 등도 같은 하느님의 이음동의어로 보고 있다. 같은 글, 68쪽.
 
   또한 나철은 “교문을 세우니 이름하여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乃設敎門曰大倧 玄妙之原道三一)”고 밝힘으로써,『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172쪽.
 현묘지도의 근원이 단군신앙의 삼일철학에 있음을 설파했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 당시 제자 엄주천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를 간곡하게 일깨우는데, 대종교총본사편, 「보본 엄주천에게 준 글」,『홍암신형조천기』, 앞의 책, 91쪽.
 이것은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국교의식을 전수하려는 나철의 의지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최치원의 현묘지도(풍류도)는 한국 고대종교의 결정체로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요 사상이며 문화이기 때문이다. 도광순, 「풍류도와 신선사상」,『신선사상과 도교』, 범우사, 1994, 83쪽.

   나철이 중광(重光: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킴)을 내세운 것도, 몽고 침입 이후 7백 년 간 단절되었던 위와 같은 종교적인 맥을 다시 세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단군신앙 고유제전인 팔관(八關)이 몽고의 침략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까닭에 나철은 순교 당시 유서를 통해서도 진실한 정성을 위해 팔관의 재계(齋戒) 팔관재계란, 고려 때의 팔관재에서 임금과 백성이 한 가지로 하느님께 제사하되 ‘생물을 죽이는 것?도적질하는 것?음란한 것?망령되이 말하는 것?술을 마시는 것?높은 평상에 앉는 것?비단옷을 입는 것?함부로 듣고 봄을 즐기는 것’ 등의 여덟 가지 허물을 금하자는 의식이다.
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대종교총본사편, 「密諭」,『홍암신형조천기』, 앞의 책, 53쪽.
 팔관은 고려조 이지백(李知白)의 상소 내용에서도 전래되어온 선랑(仙郞)의 유풍이었음이 확인되고, 『高麗史』卷第九十四, 列傳 第七, 徐熙.
 고려 의종은 선풍(仙風)과 팔관회를 받들어 따를 것을 명한 바가 있으며, 『高麗史』卷第十八, 世家 卷第十八, 毅宗 二十四年.
 그 행사 내용도, 백희가무(百戱歌舞)와 사선악부(四仙樂部), 다섯 길이 넘는 채붕(綵棚) 설치와 모든 신하들이 포홀행례(袍笏行禮)를 하는 등의 불교적 행사와는 완전히 다른 전래 행사였다. 『高麗史』卷第六十九, 志卷第二十三, 禮十一, 嘉禮雜儀, 仲冬八關會儀.
 
   아무튼 나철의 위와 같은 국교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되는데, 특히 박은식은 대종교가 국교의 가치가 있음을 『한국통사』에서 언급했고, 박은식, 「한국통사(日人束縛各敎會)」,『朴殷植全書(上)』, 앞의 책, 359쪽.
 신채호도 “壇君이 곧 仙人의 始祖라, 선인은 곧 우리의 國敎이며”라고 밝힘으로써, 신채호, 「조선상고사」, 앞의 글, 372쪽.
 단군신앙이 우리 민족의 국교임을 주창하고 있다. 또한 정인보는 해방 후「순국선열추념문」을 통하여, “國變 當時 朝野를 通하여 烈節히 繼起한지라, 守土의 長吏를 비롯하여 丘園에서 艱貞을 지키던 이, 國敎로 民志를 뭉치려던 이,…(후략)…”라는 표현과 같이, 정인보, 「순국선열추념문」,『담원정인보전집』2, 앞의 책, 264-265쪽.
 국교의 기원을 단군에 두고 나철을 국교(國敎)로써 민족의 뜻을 뭉치려 하였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철학적인 방면에서도 나철의 업적은 적지 않은 의미를 남긴다. 선도(仙道)?풍류도 혹은 현묘지도라는 추상적인 가치로 전래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통섭(統攝)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는 가치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나철이기 때문이다. 나철이 말한 “교문의 이름은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는 설파에서 종사상과 삼일철학이 이음동의어임을 알 수 있고,

“大倧의 이치는 三一일 뿐이니, 하나만 있고 셋이 없으면 이것은 쓰임이 없을지오, 셋만 있고 하나가 없으면 이것은 그 몸이 없을지라, 그러므로 하나는 셋의 몸이 되고 셋은 하나의 쓰임이 되느니라.” 종경종사편수회편,『역해종경사부합편』, 앞의 책, 65쪽.


에서는 삼과 일의 철학적인 관계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주재유일(主宰惟一)이나 작용유삼(作用惟三)이로다. 진리미묘(眞理微妙)하시니 만유포함(萬有包涵)이라.”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191쪽.
는 천명에서 삼일철학이 온갖 것을 아우르는 이치임을 밝혔다. 이러한 삼일철학의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철이 저술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이다. 「신리대전」은 대종교의 전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신훈(神訓)’을 ‘신위(神位:한얼자리)’, ‘신도(神道:한얼도리)’, ‘신인(神人:한얼사람)’, 그리고 ‘신화(神化:한얼교화)’라는 네 방면으로 풀어 해석한 글이다. 같은 글, 49-69쪽 참조.
 나철은 이 글에서 대종교 철학의 근본인 삼일을 철학적 원리로 명쾌히 구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평가도 대종교, 즉 홍암의 삼일철학을 토대로 가능한 주장임을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격신관이 발달되어 있고, 불교는 절대무가 발달되어 있다면 대종교의 경전들은 인격신과 절대무의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브라흐만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대종교만큼은 못하다. 유교가 실천에 치우치고 도가사상이 사변에 치우쳤는데, 대종교는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여 어디에 치우침이 없다.” 김상일, 「대종교사상사」,『한국종교사상사』, 연새대학교출판부, 1998, 189쪽.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전래 유속을 일깨우고 인습을 혁파하는 대도 한 몫을 한다. 「단군교포명서」에 언급되는 한복 윗도리의 동정(東旌), 땋은 머리 뒤에 매는 댕기(檀戒?檀祈), 그리고 성조신(成造神)?선령당(仙靈堂)?고시례(高矢禮) 등의 유습 배경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또한 편발개수(編髮盖首)와 일본에서 지켜지고 있는 십팔성(十八姓) 유족의 단군신앙 제사,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모신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우신관(佑神觀), 그리고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를 모신 일본 출운사(出雲社)의 배경을 단군신앙에서 근원을 찾는다. 대종교총본사편, 「중광가」, 앞의 책, 68쪽.
 또한 나철은 부여 풍속으로 내려오는 구서(九誓) 구서란 부여 풍속에 봄?가을 天序禮(나이 차례 예식)를 행할 때, 다 같이 두 번 절한 다음 ‘효도 않는 이는 내치고?우애 않는 이는 내치고?미덥지 않은 이는 내치고?충성 않는 이는 내치고?공손 않는 이는 내치고?공익사업에 힘써야 하며?허물을 경계해야 하며?환란을 구원해야 하며?예속을 이루어 다 후덕해 져야 한다’고 외친 아홉 맹세를 말한다.
와 고려속인 팔관의 준수를 유훈(遺訓)하고 있다.
   특히 선의식(?儀式) 선의식은 단절된 민족 전래의 천제로서, 홍암이 순교하기 직전인 1916년 8월 15일 근대 최초로 거행했는데, 그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開儀式[제천에 올리는 모든 참사인들이 제 자리를 잡고 준비하는 순서]
    一. 參靈式[主祀가 天香을 피워 제단에 올리고 세 번 절하는 순서]
    一. 奠幣式[穀贄?絲贄?貨贄를 올리는 순서]
    一. 進餐式[음식을 올리는 순서]
    一. 奏由式[주유문을 읽어 아뢰는 순서]
    一. 奏樂式[한울노래(天樂)을 불러 올리는 순서]
    一. 願禱式[원도의 글을 정성껏 사뢰는 순서]
    一. 辭靈式[주사가 천향을 피우고 세 번 절하는 순서]
    一. 幣儀式[참사인들 모두 제단에서 물러나는 순서]
의 제정을 통한 나철의 제천보본은, 예로부터 삼신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천제(天祭)를 복원시켰다는데서 전례사적(典禮史的) 의미가 크다. 즉 나철의 제천은 삼신의 신위를 모시고 행한 근대 최초의 천제이었다는 점과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인 선의식을 처음으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대의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유교적 제례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홀기(笏記)를 제정하여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를 시현?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김동환, 「대종교와 홍익인간사상」, 앞의 글, 307-308쪽 참조.
 이것은 “고대 임금들이 반드시 상제 및 단군삼신을 공경하여 섬김으로써 도를 삼았다”라는 기록 北崖子(신학균 譯), 『揆園史話』, 명지대학교출판부, 1975, 53-54쪽.
과 함께, 제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의 내용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대개 尊卑의 예절은 신을 공경하는 데서부터 일어났다. 상하 존비의 차례가 정해지매 선왕의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행해지고 신을 공경하는 예가 제천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만고에 통하고 사방에 이르며 사람으로서 하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책, 53쪽.


   더욱이 나철은 유교적 삼강오륜이나 여타 공맹의 질서, 그리고 유교가례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중시했던 것은 구서나 팔관 또는 세속오계, 천제 등과 같은 고래의 단군신앙 속에서 배태된 가치다. 단군신앙이 우리 국학의 맹아(萌芽)요 배반(胚盤)이었다면, 이러한 가치 또는 행사는 국학의 줄기요 몸통이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적 형식주의와 외화주의(外華主義)에 대한 청산 의지는 그가 순교할 당시의 유서 내용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밀유」에 언급되는“청직(淸直)으로써 뜻을 가지고 근검(勤儉)으로써 살림을 불리라”는 내용이나,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 홍암이 유서로 남긴 「遺誡葬事七條」는 다음과 같다.
    一. 지금 조선 땅에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火葬으로써 깨끗하게 할 것.
    一. 殮襲에는 명주?비단을 쓰지 말고 다만 삼베?무명(평일에 입음과 같은 것)으로써 몸     을 싸며 시체를 거둠에는 棺槨을 쓰지 말고 오직 부들?갈대의 자리로써 묶을 것.
    一. 상여를 쓰지 말고 지게로 옮길 것.
    一. 訃告를 돌리지 말며 弔喪을 받지 말며 장사함에 손님을 청하지 말 것.
    一. 銘旌은 다만 성명만 쓸 것.
    一. 만일에 제사를 지내면 고기?술을 쓰지 말고 다만 밥 한 그릇?반찬 한 그릇(평일에     먹음과 같은 것)으로써 차릴 것.
    一. 교문의 형제자매들은 喪章을 붙이지 말 것.
       (대종교총본사편, 「유계장사칠조」,『홍암신형조천기』, 앞의 책, 57-58쪽.)
에서 강조한 근검?절약의 정신은, 앞의 팔관(八關)의 하나로 언급되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말 것’이라는 조목이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화랑의 ‘삼미행(三美行:겸손?검소?관용)’ 정신 『三國遺事』卷第二, 紀異第二, 四十八代 景文大王.
과도 일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국학의 전래 정신의 한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지향해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더불어 나철 국학의 심지로써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수행적 실천 부분이다. 그것은 단군시대부터 전래되어 오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방법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과 같은 집단에서 중요한 체행과정으로 시행된 듯하다. 이러한 수행정신은 우리 민족 무사혼의 뿌리가 되고 상무정신의 토대가 됨으로써, 문무가 겸비된 인간완성을 구현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한편 수행이란 사회 혹은 국가 또는 민족 집단의 성정(性情)을 연단(鍊丹)하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올바른 수행의 도가 존재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차이는, 성정상의 선진과 후진의 집단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더한다.
   수행과 연관된 대표적 전래서로써는 『해동전도록』·『해동이적』·『청학집』 등을 들 수 있다. 『해동전도록』은 조선조 한무외(韓無畏)가 기술한 도맥 전수과정을 토대로 이식(李植)에 의해 세상에 유포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후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근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까지 연결된다. 또한 『해동이적』은 홍만종(洪萬宗)이 『청학집』은 조여적(趙汝籍)이 각각 저술했다. 이 저술들은 모두 외단(外丹)이 아닌 내단(內丹)과  관련된 서적들로, 차이가 있다면 도맥 전승에서 미묘한 차이가 난다. 즉『해동전도록』은 그 도맥을 ‘노자(도덕경)-위백양(참동계)-종리권(전진교)’이라는 중국적 도맥을 근원으로 최승우로 연결되고 있으며, 『海東傳道錄』「丹書口訣」一章.
 『해동이적』에서는 ‘단군-혁거세?동명왕-신라사선-김가기’라는 단군 도맥근원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청학집』에서는 특이하게 중국의 광성자에서 도맥의 근원을 찾고 그 흐름이 단군 이전의 환인으로 이어졌다고 설정했다. 김낙필, 「《해동전도록》에 나타난 도교사상」,『도교와 한국사상』, 한국도교사상연구회편, 1987, 141-143쪽 참조.
 
   그러나 이 저술들 모두 그 수행의 메커니즘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요소가 강하다. 즉 중국 도교의 정(精)?기(氣)?신(神) 론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 요소들이 인체의 삼단전(三丹田)머무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 초기 매월당 김시습은 물론이고,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와 『지봉유설』 그리고 『오주연문장전산고』같은 저술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같은 글, 157-160쪽 참조.

   나철의 국학이 수행적 방면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수행의 메커니즘에서 중국 도교적인 요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먼저 나철은 도맥의 근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고 그 수행의 목표도 「삼일신고」‘진리훈’을 토대로 하여 성통공완을 통한 홍익인간을 구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김동환, 「대종교와 홍익인간사상」, 앞의 글, 331쪽.
 또한 나철의 수행은, 기존 중국 도교적인 정?기?신이 아니라 삼진(三眞: 하늘의 本性)인 성(性)?명(命)?정(精)이 존재하고 그와 대(對)가 되는 삼망(三妄: 인간의 俗性)으로 심(心)?기(氣)?신(身)이 있어, ‘인간의 속성을 물리치고[返妄] 하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卽眞]’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망즉진(返妄卽眞)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된 것이 삼법수행(三法修行)이다.
   여기서 삼법이란 지감(止感: 마음공부)?조식(調息: 숨공부)?금촉(禁觸: 몸공부)을 말한다. 마음공부는 때 묻은 마음을 씻고 본성(本性)을 발견하는 공부이며, 숨공부는 어지러운 기운을 돌려 본명(本命)을 찾아가는 공부이고, 몸공부는 망가진 몸을 세워 본정(本精)을 일으키는 공부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철은 단군신앙를 중광한 직후부터 순교할 때까지 이 삼법수행으로 일관했다. 그가 단군신앙을 일으킨 1909년의 당부와 숨을 거둘 당시(1916)의 마지막 유언인 다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閉門修道하여 篤誠崇奉하니 一念一事가 只在修道上이오, 一言一辭가 只在養德邊이라.[1909. 12. 1.]”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153쪽.


"謹贈 小雲兄丈 道鑑. 神訓曰 自性求子降在爾腦 信之本也 眞理訓曰 止感調息禁觸 誠之原也 昻哉 專修.(소운 형장께 삼가 도감을 드립니다. 신훈에서 “스스로의 본성에서 한얼의 씨알을 구하라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있느니라”는 말은 믿음의 근본이며, 진리훈의 “지감?조식?금촉하라”는 말은 정성의 근원이니, 소중히 받들어 수행에 정진해 주십시오.[1916. 8. 15.])“ 나철, 「道鑑」,『대종교보』(통권 제286호), 2000년 봄호, 대종교총본사, 33쪽.
 

   한편 나철의 국학 정신은 닫혀있는 가치가 아니다. 흔히들 국학하면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가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람직한 국학의 본질이 자기만을 고집하는 ‘닫힌 학문’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해 가는 ‘열린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철의 국학 정신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군신앙을 경험하기 전의 나철은, 한마디로 유교적 가치에 순치된 우국지사에 불과했다. 을사오적주살 사건이나 여러 차례의 도일(渡日)을 통한 외교 활동의 배경에 숨은 그의 정신적 지탱요소가 유교 또는 개화사상이었음을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당시 그의 사상적 범주는 민족이라는 공간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시간적 한계성 속에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단군신앙을 접하고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나철은 단군신앙을 일으키면서 세계주의적 가치로 변화한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266쪽.

   이 내용을 보면 대종교 중광 이전에 가졌던 나철의 우국적 분노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요, 대종교에 헌신하면서는 국가 관념을 벗어버리고 세계주의의 이념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신앙의 교리관 자체가 조화와 통섭(統攝)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고, 대종교의 교의(敎義) 또한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나철이 “다른 교인을 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대종교총본사편, 「밀유」, 앞의 책, 53쪽.
 자신의 순교를 민족이 아닌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내세운 것, 대종교총본사편, 「殉命三條」, 『홍암신형조천기』, 앞의 책, 51쪽.
 모든 종교의 근원을 하나로 본 것 「중광가(10장)」, 같은 책, 63쪽.
등도 위의 가치와 일맥하는 것이다. 또한 일제시강점기 나철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의 궁극적 소망이 조국광복을 넘어 배달국 이상향을 건설코자 했던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나철의 국학 정신은, 결코 배타적?폐쇄적?국수적?일시적인 가치가 아니요 인류와 미래를 향한 상생적?개방적?보편적?창조적인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향후 국학연구의 방향에도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의 더불어 사는 삶의 전통이 잘 드러나는 풍류도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이 홍익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안재홍과 정인보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재홍, 「夫婁神道와 불함문화론」,『민세안재홍선집』4, 지식산업사, 1992, 109쪽. ; 정인보, 「典故甲」『담원정인보전집』4, 앞의 책, 183쪽.

5. 나아가는 말
   구심을 잃은 물체는 안정감이 없고 정체성이 없는 민족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국학은 바로 민족의 정체성으로, 우리의 중심을 세우는 학문이요 원심활동을 위해 필요한 기준을 세우는 학문이다. 또한 국학은 ‘나와 너’를 구별해주는 학문이면서 ‘우리’를 지향해 가는 학문이다. ‘나와 너’가 없이 ‘우리’가 없고 한편 ‘우리’가 없이 ‘나와 너’를 기약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학(學)은 ‘나와 너’를 구별하지 못하는 학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우리학’으로도 성장하지 못했다. ‘나’를 고려치 않고 ‘너’만을 생각하는 학은 노예의 학이다. ‘너’를 생각치 않고 ‘나’만을 강조하는 학은 단절의 학이다. ‘나와 너’를 분별치 못하는 학은 무의미한 학이다.
   따라서 우리의 국학이 가야할 방향은 나를 발견하는 길로 먼저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중심과 기준, 그것이 바로 사상적 정체성?공간적 차별성?시간적 연속성이다. 이렇게 정제된 학이 바로 순수국학이며 광범한 국학으로 가는 토대가 된다. 그 위에서 너를 만나려는 노력, 이것이 국학의 세계화이며, 이렇게 만나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근현대사의 수많은 위인들 중에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바로 ‘나’를 일깨워 준 장본인으로, 근대 국학의 성립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중심과 기준이 되는 국학적 요소를 명확하게 제시했고 또한 실천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를 발견한 걸출한 인물들이 우리의 국문?국사?철학?문화 등의 제방면에 수없이 많았다. 그를 근대 국학의 선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비중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또한 사상성이나 시간성 그리고 공간성과 보편성이 충족된 순수국학의 요소를 우리 근대사에 가장 잘 드러내 준 인물이 나철이었다. 그것은 나철이 우리의 문?사?철에 회통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 신앙의 중흥을 통해 순수국학의 실체를 체계화한 것과 연관된다. 나철의 단군신앙 중광을 계기로, 유교?불교의 정신에서 배달의 정신으로 돌아 왔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였으며, 진정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였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더불어 나철이 찾은 ‘나’는 너를 외면한 ‘나’가 아니다. 홍암의 ‘나’는 과거의 망각에서 찾아낸 ‘나’요, 현실의 질곡에서 해방된 ‘나’며, ‘너’를 만나기 위해 행진하는 미래의 ‘나’였다. 까닭에 나철의 ‘나’는 폐쇄와 아집과 배타의 ‘나’가 아닌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개방과 조화와 이타의 ‘나’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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