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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제 35회 학술회의] 2017.04.06 조선시대 국왕의 사례로 본 홍익대통령의 조건 2017.07.01  조회: 41

 

 

[35회 국학원 정기 학술회의]

 

대주제:

조선시대 국왕의 사례로 본 홍익대통령의 조건

 

 

 

1. 일정 및 프로그램

  1) 일정

       ▶ 개최일시: 201746(목요일) 오후 130~ 6

       ▶ 장 소: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

       ▶ 주 최: ()국학원

       ▶ 주 관: ()국학원·국학운동시민연합·대한민국 역사진단학회

       ▶ 후 원: ()일지인성문화재단, ()국학신문사

 

 

 

   2) 프로그램

        대주제 : 조선시대 국왕의 사례로 본 홍익대통령의 조건

           [사 회]----------- 우대한 박사[국학운동시민연합]

 

            기조강연 :  

           발표--- 김창환(국학원 사무총장) : 홍익대통령의 5가지 조건

 

* 1주제 - "조선왕을 통해 본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 세종과 정조를 중심으로

         발표------------------ 김병기(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

 

* 2주제 - 세종의 한글창제와 홍익정신

          발표------------------ 반재원소장(훈민정음연구소 소장)

 

 

 * 3주제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 정조대 조선중화주의의 이면에 자리한 민족문화의 위상 -

          발표--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전 서울대 규장각책임연구원)

    

 

 

발표문 -  서론맺음말>

 

 

제1주제 : 조선왕을 통해 본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 세종과 정조를 중심으로  :                                                          김병기

    

 

 

 

 

제2주제 :   세종의 한글창제와 홍익정신     

                                                        (1.서론, 7.세종의 홍익정신 수록)       

                                                                                  반 재 원

      1. 서론
      2. 훈민정음 중성의 배열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3. 훈민정음 초성의 배열순서가 지금과 다른 이유
      4. 훈민정음이 28자로 만들어진 이유
      5. ㅋㅌ과  에 획을 더한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
      6. 홍익 한글을 위한 합용병서 원용 예
      7. 세종의 홍익정신    

  

[국문초록]
  훈민정음 창제의 이론적인 배경과 동양 천문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중성 배열순서가 지금과 다르게 되어 있는 이유는 동양천문도인 하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해례본의 중성 순서 : ?,   ,?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해례본의 초성 배열순서가 지금과 다르게 되어있는 이유는 동양천문도인 낙서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해례본의 초성 순서 : ㄱ ㅋ ,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ㅅ, ㆆ ㅇ, ㄹ, ?)    훈민정음이 모두 28자로 만들어진 이유는 <28수 천문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24자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세종 때에 사용하던 4글자와 합용 병서법을 살려쓰면 우리말 뿐 아니라 정확한 외국어표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ㅋ ㅌ과   에 획을 더한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 즉 ㅋ과 ㅌ에는 획(━)으로,  에는 각점(?)을 더한 이유는 <28수 천문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창제와 동양천문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종때 활용하였던 합용병서법을 일부 원용하여 지금의 한글에 첨가하여 <기능성 한글>을 만들어 주면 현재 표기가 어려운 외국어 표기가 해결되므로 한글세계화에 물꼬를 열 수 있다. 아울러 세상의 모든 발음을 다 표기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든 것은 바로 단군의 홍익정신이다.

1. 서론
  한글의 창제원리를 밝히고 세종때의 합용병서법을 보완한 <기능성한글>을 준비함으로써 세계의 문자인 홍익한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자 한다.

 

7. 세종의 홍익정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천문도를 이론적인 배경으로 삼았던 이유는 조선의 역법으로 조선의 하늘을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문자를 가지고자 한 자주정신의 발로였다. 세종 15(서기 1433)칠정산내편을 편찬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명나라 역을 중국역이라 하고 우리나라 역을 본국역으로 구분하였다. 그로부터 10년후인 세종 25(서기 1443)에 문자를 창제하였다. 그리고 10여명의 노비들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또한 홍익정신의 발로였다. 세종이 문자를 창제한 것은 힘없는 일반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세종의 홍익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위대함이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한글 세계화 정책>도 홍익정신의 차원에서 추진되어야한다. 세계화는 결코 강요나 군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선행과제가 한글 창제원리의 규명과 함께 훈민정음 당시의 합용병서법을 원용한 <기능성한글>이다. 어떠한 발음도 모두 표기할 수 있는 글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명실상부한 세계의 홍익문자가 될 것이다. 결코 어렵거나 복잡한 작업이 아니다. 정부에서 의지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바로 해결될 문제이다. 자판개발도 <기능성한글>을 전제로 한 작업이어야 한다. 통일 후의 문자 정책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앞으로 학계의 주요 주제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이다.

 

 

 

 

 

 

제3주제 :

正祖韓國仙道 인식과 檀君의 위상 제고

                                                                                       鄭景姬

머리말

. 肅宗·英祖箕子 존숭과 檀君 인식의 변화

1. 兩亂 이후의 민족적 각성과 역사인식의 변화

2. 숙종?영조의 기자 존숭과 단군에 대한 새로운 주목

. 正祖韓國仙道 인식과 檀君의 위상 제고

1. 君師 정조의 개방적 三敎觀調息 수행

2. 정조의 韓國仙道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맺음말

    

 

머 리 말

 

한국고대 이래의 전통사상인 韓國仙道는 삼국시대 이래 佛敎와 습합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상 이외에도 현실적인 통치체제의 정비와 운영을 위해 유교이념이 적극 도입되었다. 특히 麗末鮮初의 시기에는 性理學이 도입, 조선 건국의 이념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조선 건국초기인 15세기에는 왕조개창이라는 변혁의 와중에서 성리학은 형식적인 이해에 그쳐 기존의 사상, 곧 선도, 불교, 中國道敎 등과 공존하였으나 점차 조선사회가 안정되고 또 성리학을 전공한 새로운 지식층인 士林이 성장하면서 학문적 이해가 심화되어 갔다.

조선건국후 약 2백 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兩亂(倭亂胡亂)으로 조선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양란을 거치면서 강렬한 민족적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각성에 바탕하여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당면 과제를 안게 되었다.

민족적 각성에 바탕한 양란의 후유증 해결의 과정에서 성리학을 위시한 기성의 사상들은 새롭게 반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본고에서는 크게 두 측면에 주목해 보았다. 첫째 기존의 성리학 이념이 양란 이후 각성된 민족의식과 맞물려 더욱 강화된 측면과, 둘째 성리학 이념과 대척적인 고유의 선도 전통이 주목된 측면이다. 양측의 차이는 특히 역사인식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첫째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은 유교문화의 상징인 기자의 전통을 강조하는 정통론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으며, 둘째 고유의 선도 전통에 주목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선도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양란 이후 민족적 각성을 통한 양란 후유증의 해결이라는 지상과제가 설정되었고, ‘성리학 이념의 강화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으로 과제 해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17세기 후반·18세기, 肅宗正祖代에 이르러 그 과제는 일단락되었다. 조선후기의 가장 영명한 3명의 군주인 肅宗·英祖·正祖에 의하여 조선사회는 再造, 후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러하다면 이들 3명의 군주들은 양란 이후의 성리학 이념의 강화 및 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성을 어떻게 조정하고 어떠한 접합점을 찾아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본고에서는 특히 肅宗·英祖·正祖기자단군인식이라는 매개를 설정해 보았다. 이시기 君師로서 성리학 이념을 주도하였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국왕의 기자 및 단군에 대한 인식은 성리학 이념의 강화 및 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의 위상이나 접합 정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一章에서는 숙종 및 영조의 기자 및 단군 인식을 살펴 보겠다. 먼저 양란 이후 민족적 각성과 함께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향 및 고유의 선도 전통에 주목하는 양대 경향이 생겨났고 이것이 역사인식 면으로는 성리학의 정통론적 역사인식의 강화 및 선도적 역사인식의 새로운 주목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났음을 살펴 보겠다. 또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후반 이후 숙종 및 영조가 기자의 위상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단군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모습에서 확인됨을 살펴 보겠다. 二章에서는 정조의 기자 및 단군 인식을 살펴 보겠다. 먼저 정조가 개방적 三敎觀으로써 중국도가 전통을 포용하고 調息 수행까지 행하였던 점을 통하여 중국도가 전통과 유사한 한국선도 전통을 포용할 수 있었던 배경을 고찰해 보겠다. 이어 숙종 및 영조가 단군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는 정도였다면 정조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선도 전통을 인식하며 단군의 위상까지도 제고하였음을 살펴 보겠다.

 

 

맺 음 말

 

이상에서 양란 이후의 민족적 각성의 과정에서 18세기 조선의 국왕 정조가 고유의 전통인 한국선도를 인식하며 더하여 단군의 위상까지 제고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양란을 통한 민족적 각성은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 또는 성리학과 대척적인 고유의 仙道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과 같이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중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은 역사인식 면에서 유교문화의 상징인 기자의 전통을 강조하는 정통론적 역사인식, 기자마한정통론으로 드러났으며, 고유의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선도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특히 17세기 후반 숙종대 이후 성리학의 정통론적 역사인식이 가장 강화되던 시기에 선도적 역사인식도 덩달아 부각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사상이 극도로 강화될 때 이에 대한 반성적 사유 또한 강화되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숙종대 이후의 국왕들의 기자단군인식에서 이러한 경향이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肅宗이나 英祖기자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으로 단군에 대해서도 새롭게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정조는 그간 높아질 대로 높아진 기자의 위상은 차치해 두고서 오히려 단군에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조는 성리학국가의 국왕으로서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일차적으로 준거삼으면서도 치열한 학문적 연마를 통하여 성리학의 원류인 六經古學의 근원적 가치를 중시하였고 더하여 유교 외에도 佛家道家 전통까지도 포용하는 개방적인 三敎觀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 삼교관에 따라 중국도가 전통을 포용하며 직접 調息 수행까지 행하였는데, 정조의 이러한 면모는 중국도가와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지닌 한국선도 전통을 포용하게 하는 학문적 바탕이 되어 주었다.

정조는 仙道祭天의 전통을 긍정하고 한국선도의 元經天符經까지도 인식하는 등 고유의 선도 전통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에 토대하여 檀君廟(崇靈殿三聖祠에 대한 지속적인 致祭와 관심, 檀君墓 修治, 三聖祠 祭品·祭儀 정비 등의 방식으로 단군의 위상을 제고하였다. 숙종이나 영조가 기자의 위상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단군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하였다면 정조는 특히 단군에 대한 관심을 확대 계승하여 단군의 위상을 제고한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양란 이후 민족적 각성을 통한 양란 후유증의 해결을 위하여 성리학 이념의 강화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이 설정되었다면, 숙종 및 영조, 또 정조의 기자 및 단군 인식을 통하여 처음에는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다가 점차로 선도 전통이 주목되어 갔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정조가 선도 전통이나 단군에 주목하였던 데에는 개방적 삼교관과 같은 학문적인 배경도 자리하고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방식이 갖는 민족적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후기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양란 이후의 처절한 민족적 각성이었다고 한다면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방식은 朝鮮中華主義로 개념화되듯이 조선이 계승하고 있는 中華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의 자존의식을 회복하고 조선후기사회를 再造하는데는 기여하였지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진정한 민족적 각성과는 큰 거리를 보였던 점 또한 분명하였다. 전형적인 성리학자들과 달리 조선의 국왕으로서 누구보다도 이러한 문제점을 민감하게 느꼈을 정조로서는 성리학 이념이라는 공식적인 노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선도 전통이나 단군을 강조, 성리학 이념의 한계를 메워가려는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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