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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회 국민강좌] - 한국적 선비정신의 원류인 선도(화랑도)의 조화정신 2017.01.13  조회: 568

선도의 대가 참시선인, 물계자, 박제상, 백결 선생 "조화로운 세상' 이끌어


국학원 제162회 국민강좌서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강연 

"신라 상고기 참시선인, 물계자, 박제상, 백결 선생은 선도의 대가로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데 앞장섰다." 

10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국학원 제162회 국민강좌에서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신라 화랑도(선도)의 생명사상과 조화調和 정신- 물계자?박제상의 ‘조화’ 정신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며 이같이 말했다.  

 신라의 건국과 ‘밝음’의 통치 철학

 정경희 교수는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고조선의 선도가 전승된 면모는 확연하다. 사로6부가 조선유민朝鮮遺民, 곧 고조선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전승과 함께 6부의 선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천손사상의 전통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 10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국학원 제162회 국민강좌서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가 "신라 화랑도(선도)의 생명사상과 조화 정신- 물계자?박제상의 ‘조화’ 정신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정 교수는 "특히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성씨인 ‘박朴’은 한국선도의 핵심 표제어인 ‘밝, 밝음’의 한자식 표기이며, 이름인 혁거세赫居世 역시 우리말로는 ‘밝, 불구내(弗矩內)’, 의미는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림(광명이세光明理世)’이라는 점이 적시되었는데 밝사상으로 신라 건국을 주도한 사제왕司祭王으로서의 면모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천손문화(선도문화, 밝문화)’에 기반하였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새로운 시대이념으로서 불교가 등장하여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5~6세기 무렵까지는 사상적으로 무려 6~7백년 정도에 이르는 긴 과도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 선도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주된 사상으로서 기능하였으나 시대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성격이 적잖이 달라진 측면도 있다.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정 교수는 『삼국유사』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 전하는  박혁거세의 탄강 설화를 소개하고 박혁거세의 탄생 과정이 신성화되고 있는데 특히 밝음이 강조되고 있다. 몸에서 광채가 났고, 천지가 진동하면서 日月이 밝아졌으며, 이름조차도 우리말로 ‘밝, 불구내(弗矩內)’ 한자로는 ‘光明理世(밝게 세상을 다스림)’이라고 하였다. 또한 밝음의 근원인 하늘의 아들로서 비정되었다. 고조선 이래의 선도 ‘밝’사상의 중심인 사제왕으로서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박씨 파사왕계의 선가, ‘참시선인’의 조화정신

신라의 건국이념이었던 선도는 이후에도 박씨 왕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특히 제5대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재위 80~112) 계통에서 신라 상고기를 대표하는 선가들인 참시선인, 물계자, 박제상, 백결선생이 집중 배출된다.

정 교수는 영해박씨 세보 및『삼국사기』에 나타난 파사왕계 계보를 종합하고 여기에 기년상의 문제까지 고려해 계보를 소개했다.

즉 , ‘파사이사금→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이비伊非(이칠伊漆) 갈문왕葛文王→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물계자(勿稽子, 물품파진찬勿品波珍飡)…박제상朴堤上’의 계보가 성립한다.
파사이사금의 맏아들인 제6대왕 지마이사금(재위 112~134) 이후 파사왕계는 더 이상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지만 부왕副王격이자 선도 최고의 성직聖職인 갈문왕에 연이어 오르게 된다. 이비(이칠)갈문왕의 아들인 아도阿道 역시 일성 15년(148) 갈문왕의 위에 올랐는데, 그는 특히 당대 최고의 선가로서 거문고에 능하여 후대에 주로 금선琴仙, 칠점선인七點仙人, 참시선인?始仙人 등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내해 4년(199년) 가야(금관가야, 현 김해) 거등왕居登王의 초청으로 삽량주(현 양산) 황산강黃山江을 건너가 신라와 가야 양국의 화친을 주선한 행적이 널리 알려져 있다.

 3세기초 ‘포상팔국의 난’과 ‘물계자’의 조화정신

신라건국의 주체로서 박씨왕족에게는 국가 보위保衛의 책임이 부여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탈해이사금 이후 박씨왕족을 변경 요새지에 파견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그 선상에서 2세기말~3세기초 무렵 파사왕계 아도갈문왕의 아들인 물품파진찬이 가야(금관가야) 방어를 위한 요새지인 삽량주 지역으로 이거해 가게 되었다.

정 교수는 "물품은 삽량주의 군사?행정 책임자로서 부친 아도갈문왕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선도 장로長老 가문 출신답게 전래의 ‘고도古道(고조선의 선도)’에 입각, 신라?가야 양국은 동일한 연원을 지닌 동족이므로 호혜 공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대가야 화친 외교를 주도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노력 결과 내해 6년(201) 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해 오게 되었다. 곧이어 내해 14년(209) 가야연맹체내 내란인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자 가야의 요청으로 신라도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신라군으로 내해이사금의 왕자 이음利音?우로于老(1차전), 또 내해이사금(2차전)이 이끄는 왕경군王京軍(6부군六部軍)과 함께 물품이 이끄는 삽량주군도 참전하였고 가장 큰 전공을 세웠다. 내해이사금과 왕자 이음?우로는 석씨왕족 중에서도 정치적 강경파인 이매계伊買系로 박씨왕족의 핵심 인물인 물품을 견제, 논공행상에서 배제하였고 이로 인해 반발이  크게 일었다.

 정 교수는 이러한 견제와 배제에도 물품은 개인의 공명심과 시비를 드러내기보다는 선도 장로로서 전체의 조화와 화합을 우선하여 피은避隱을 선택하였다. 물품의 피은은 석씨왕실이 강경파인 이매계伊買系에서 온건파인 골정계骨正系로 바뀌는 일계기를 제공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물계자의 활동에는 선도의 정치론이나 윤리관이 기반이 되고 있었으니 선대인 이비(이칠)갈문왕, 아도갈문왕을 이어 선도 장로로서 역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모로 인해 아도갈문왕이 후대에 주로 ‘금선, 칠점선인, 참시선인’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듯이 물품파진찬 또한 ‘물계자勿稽子’의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품은 오래 장수하였다고 하니, 사체산師?山으로 은거해 들어간 이후에도 선도를 연마하고 문인들을 교도하는 등 석씨왕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파사왕계에 주어진 선도 장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말?5세기초 ‘박제상’의 조화정신

정 교수는 이어 박제상의 조화정신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박제상은 선대 물품 이래 오랜 세거지였던 삽량주에서 태어나 왕경王京(현 울주)으로 이주하였는데 생애 전반기에는 주로 왕경에서 관인생활을 하였으며, 생애 후반기에는 삽량주간?良州干 배임을 계기로 향리 삽량주로 이거한 이래 몰년까지 계속 이곳에 머물렀다. 곧 박제상은 삽량주의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갖춘 왕경세력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삽량주에서 왕경(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으로 이주한 박제상은 박씨왕족의 핵심 성원이자 김씨왕실의 지친으로서 내물 후반기 정국에 출사하였다. 당시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종속 구도 하에서 고구려?신라 대對 백제?왜?가야 간의 전쟁이 빈발하였는데 그 와중에 박제상은 삽량주간에 배임되었다. 선조 물품이 삽량주간에 배임된 전례에 의한 것으로 가야?왜 연합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박제상은 신라가 대고구려 종속 및 백제?왜?가야의 공격에서 벗어나 자립하기를 바랬으나 신라의 대고구려 종속 정도는 더욱 심화되어 급기야 고구려의 개입으로 내물왕이 제거되고 실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신라 국가선도의 담지 세력인 박씨족의 핵심 성원으로서 실성의 대고구려 종속 노선에 반발, 삽량주간에서 물러나 실성 치세기 내내 삽량주에 은거하였다. 삽량주 은거 생활의 중심은 별서別墅 징심헌澄心軒으로 여기에서 가장家藏 및 왕실 장서들을 두루 섭렵,『징심록澄心錄』을 편찬하였다.

실성대 고구려에 대한 종속 노선이 더욱 심화되고 고구려세력을 등에 업은 실성에 의해 내물 왕자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제상은 신라초 이래 선도 장로들에게 주어진 ‘택현擇賢’ 관행에 의거, 국론을 일으켜 눌지반정訥祗反正을 유도하였다. 또 눌지반정 후에는 약소국으로 실추된 신라의 국위 회복을 위해 왕제귀환王弟歸還을 주도하였는데, 왕제귀환 외교의 입론점은 ‘부도론符都論’, 곧 ‘고조선의 선도’ 전통에 입각한 조화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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