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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회 국민강좌] - 백제의 정신문화와 리더십(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2017.04.12  조회: 155

165차 국학원 국민강좌 [2017(단기4350년)4월11일, 서울시청 바스락홀에서)             

백제의 정신 문화와 리더십

 

李道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

1. 계백(階伯)

1) 계백의 출생지와 성씨

 

여지도서고적 조에 따르면 팔충면(八忠面)은 군() 서쪽 20리에 있다. 속전(俗傳)에 백제 충신 성충 계백 등 8인이 이곳에서 태어난 까닭에 이름이 생겨났다고 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도지(道誌)충청도읍지호서읍지에도 기재되어 있다. 8인의 충신이 태어난 곳이기에 팔충면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1981년에는 이곳에 팔충사라는 사당을 건립했다. 팔충신과 관련해지석동지(支石洞誌)에는 범황사(梵皇寺)의 승려인 혜오화상(慧悟和尙)도 이곳에서 출생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과 혜오화상을 비롯한 범황사의 승장(僧將) 5인을 합쳐서 8충신이라고 했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계백은 천등산에서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등산 동쪽 기슭에는 계백에 공부하던 사찰이 있었고, 어머니의 뜻을 따라 이곳에서 천등산 꼭대기를 향해 활을 쏘아 화살보다 빨리 도착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성충과 계백 그리고 흥수는 혜오화상에게 신술(神術)을 배웠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계백은 예전의 팔충면 즉 지금의 충화면 천등리에서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열전에 적혀 있는 계백은 이름인 것이다. 계백의 성()을 알 수는 없다. 그런데 계백을 성으로 지목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階伯[名升 百濟同姓 官達率 義慈王二十年戰亡]라는 기록에 근거하였다. 계백에 대한 할주(割註)에서 이름을 승()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계백은 성이라는 것이다. 계백이라는 성은 百濟同姓이라고 하였다. 이는 백제 왕성(王姓)인 부여씨(扶餘氏)와 동일하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런 다음 부여씨에서 계백씨로 분지(分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대동지지의 구절을 가만히 음미해 보자. [ ]의 할주는 계백에 대한 부연 설명인 것이다. 여기서 계백을 성이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삼국사기열전을 놓고 볼 때 이름 없이 성만 달랑 표기한 사례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름만 표기할 뿐 성에 대한 표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온달(溫達)과 취도(驟徒)를 비롯하여 관창(官昌) 등등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성만으로 열전의 인물을 표기한 사례는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만약 계백이 성이었다면 관련 할주는 ‘[百濟同姓 名升]’로 도치(倒置)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名升은 계백을 설명하면서 一名升()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계백을 일명 승()으로도 일컬었다는 게 된다. 실제 계()섬돌이라는 뜻과 함께 '오르다'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은 혹시 그와 연관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百濟同姓은 계백의 성이 왕실과 동일한 부여씨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백이 성이라는 주장은 타당성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더불어 名升자체에 대한 의미를 탐색해 보기로 한다. 우선 다음에서 인용한사옹원봉사증리조판서리공비명(司饔院奉事贈吏曹判書李公碑銘)을 보자.

 

선비들의 의논 널리 미치어갔네 / 士論攸? 조정 관원 명부 속에 이름 올려져 / 名升于朝 녹봉 받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네 / 祿養及親

이는 다음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운양집(雲養集)).

선비들은 모두 經學에 통달하고 옛것을 배워 / 士皆通經學古

조정에 이름을 올렸다 / 名升于朝

위의 인용들을 보면 名升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부여군 의열사(義烈祠(에도 名升이라고 적혀 있다. 이 경우는 처소격 대상으로 사묘(祠廟)를 상정해 보는 게 가능하다. 계백 위패는 논산 충곡서원에도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名升이 사묘에 이름 즉 위패가 올라갔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조정이든 사묘든 이름이 올라간 경우에 名升으로 기재한 것 같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 출간된대동지지에 적힌 名升은 계백의 이름이 숙종대에 세워진 충곡서원(忠谷書院)과 같은 사묘에 오른 사실을 특기(特記)한 것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계백의 위패가 부여에 소재한 의렬사에 오른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의열사는 1723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면 이제는 百濟同姓과 같은 용례를 찾아 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의 周同姓구절을 인용해 보았다.

* 소강공[(이름은) 석이며 주동성이다. 9세까지의 기록이 없다](靑莊館全書25, 紀年兒覽補編)

* 소공 석은 주동성과 같은데, 성은 희씨이다(召公奭與周同姓 姓?氏)(史記34, 燕召公世家)

위의 인용 사례에서 보듯이 百濟同姓은 부여씨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階伯[名升 百濟同姓]’라는 구절은 계백은 백제동성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즉 계백은 부여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사성(賜姓)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어쨌든 그 이름은 부여계백인 것이다. 따라서대동지지의 기록을 오독(誤讀)하여 계백승(階伯升)’으로 해석한 견해는 설득력을 잃었다.

2) 처자를 죽인 행위에 대한 평가

 

계백은 벼슬이 16관등 가운데 2번째인 달솔에 이르렀다. 그와 동일한 시기에 활약했던 흑치상지(黑齒常之) 가문의 최고 승급 관등이 달솔이었다. 또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 왕족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해 볼 때 계백의 가문도 이와 유사한 신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해준다. 계백의 삶이 광채를 발하게 되는 것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660년 여름,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13만 대병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탄현(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을 넘어 빠른 속도로 진격해 왔다. 계백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전선으로 나가게 된다.

출정하기 직전 계백은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을 감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사로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되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만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계백은 스스로 몸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처자를 벤 것이다. 이로 볼 때 계백은 30대 초반의 청년 장군으로 그려진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자를 가차없이 베어버렸다. 계백은 슬픔과 우수로 범벅이 된 사랑하는 이들의 눈망울을 매섭게 뿌리친 채 매정하게도 붉은 선혈을 검에 낭자하게 묻혔고, 그길로 전선을 향해 말을 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계백의 행위를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인 권근(權近;1352~1409)첫째 무도하고 둘째 도의에 어긋나고 잔인하다고 평하였다. 게다가 먼저 사기(士氣)를 떨어뜨려 싸우기도 전에 남에게 굴복을 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쏟았다. 계백이 전장에 나가기도 전에 자신의 처자를 먼저 죽였음은, 패할줄 알았다는 것이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럴까? 당연히 이에 대한 반론이 없을 수 없다.표해록(漂海錄)의 저자인 최부(崔溥;1454~1504)사람을 논함에 있어서는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서 논해야 된다. 계백은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고서도 그 몸을 아끼지 않았거늘 하물며 그 처자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며, 임금을 배반하였겠는가? 백제가 망할 때 단 한 사람의 충의(忠義)도 없었는데 오직 계백만이 절개를 지켜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옛 사람이 나라가 망하면 함께 죽는다고 말한 바가 아니고 무엇이랴!”고 말하였다.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권근을 비판하면서 계백은 전쟁터에 나갈 때 나라는 반드시 망할 형세에 있었고 몸은 반드시 죽을 결심이 있었다. 만약 나라가 망하고 몸이 죽은 뒤에 처자가 적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고 구박을 당하면서 이 놈이 아무개의 처요 아무개의 자식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신명(身名)을 더럽히고 인도(人道)에 위배됨이 큰 것이니 애초에 한 번 죽어 마땅함을 얻느니만 못하다. 웅어취사(熊魚取捨;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뜻)는 바로 이때에 있는 것이니 어찌 한 가닥 목숨을 차마 끊지 못하여 끝없는 치욕을 당할 것인가?이것은 그렇지 않다. 대체 장수가 되는 도()는 무엇보다도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軍心)이 해이해져 각각 제 살 궁리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사기를 저상(沮喪)시키는 것이다. 권씨는 계백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병법도 몰랐다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우리는 계백의 행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계백은 사랑하는 처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이 행위는 가혹하다거나 지나치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평소 견지해 온 명예를 중시하는 사생관의 산물로 보아야만 한다. 또 이러한 사생관은 일조일석에 길러지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연마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광채를 발하게 마련이다.

계백과 같은 시기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는 어릴 적 수학할 때논어춘추좌전이니사기한서등과 같은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와 동일한 달솔 관등에 올랐던 계백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수학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교적 사생관이 확립된 게 아닐까?

그러나 동일한 교육을 받았지만 모든 이가 교육받은대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 뿌린 허다한 교육의 씨앗 가운데는 움을 틔워 결국 열매를 맺는 경우를 본다. 그 값진 열매가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계백의 사생관도 그러한 산물로 보겠다. 백제를 중흥시켰던 성왕은 신라군에게 생포되었지만 국왕으로서의 품격을 지켰다. 그는 비굴하지 않게 흔쾌히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흑치상지의 경우도 억울하게 옥중에 갇혔을 때 무부답게 깨끗하게 자결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지도자는 희생적 수범과 무한 책임의식을 지녀야만 그 사회가 활력을 얻고 건강해지는 것이다. 계백이 5천 병력을 결사대화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수범을 보인 살신성인적 희생정신 외에는 달리 보탤 게 없을 것이다.

 

3) 지세를 이용

계백은 지금의 논산시 부적면 일대를 끼고 있는 황산벌에 이르렀다. 그러나 넓은 들판에서 열갑절이나 많은 대군을 정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계백은 험한 곳을 이용해 3개의 군영(軍營)을 설치한 후 적을 기다렸다. 이는손자병법에서 미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않는 자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이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계백은 신라 군대에 대적하기 위해 충천한 사기나 일치된 군심에만 의존한 게 아니었다. 그 위에 지형지세를 이용한 전략의 수립을 얹었다. 숫적으로 적은 군대를 이용한 군사력의 효용을 극대화시키는 거였다. 계백은 적은 병력을 3 갈래로 배치시켜 적군을 유인하면서 적군 대병력의 분리·분산을 시도한 것이다.손빈병법에 따르면 유능한 장수는 먼저 유리한 지형을 선정하고 그 지형에 따라 적절한 진형을 짜는 것이다. 적과 교전할 때는 3분의 1의 병력으로 전투를 하고 나머지 진영은 뒤쪽에서 적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게 한다고 했다.

계백이 설치한 3군영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용병과 작전에 뛰어난 장수란 먼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유리한 태세를 갖추어 전투를 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는데, 계백은 뛰어난 병법가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안정복은 계백이 험한 곳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한 것은 지()의 표상이라고 높히 평가했다. 용기와 지모 어느 한 쪽이라도 부족한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 지도자도 마찬 가지이다. 민심을 하나로 통일시키는데 만족할 게 아니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요란한 구호보다는 국민들의 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제의 군사 운용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백제 군대는 몰래 군대를 출동시켜 적의 허를 찔렀다. 그리고 기민하게 움직여서 미처 진을 치지 않은 적군을 격파하거나, 지름길을 이용하여 급격(急擊)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매복하여 급히 때리는 기습전과 상대방의 허실을 꿰뚫기 위한 정보 수집 능력에도 비상한 데가 있었다.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켜 예상치 못한 장소에 출현하여 적을 치기 위해서는 첩보전이 선행되야만 하였다.

백제 무장들의 교양은 근구수 태자가 고구려 군대를 추격할 때 막고해라는 장수가 도덕경의 내용을 읊조리면서 진격을 멈추게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후 왜로 망명한 백제 장군 중 곡나진수와 목소귀자 등 모두 4명의 장수들이 병법에 능했기 때문에 그 공으로 벼슬을 받았다. 720년에 편찬된일본서기짐무덴노 기[神武天皇紀]에 보이는 불의에 나온다(出其不意)”라는 구절은 백제인들에게 배운손자병법시계편(始計篇)의 영향이라고 한다. 옥중에 있던 성충(成忠)이 의자왕에게 올린 계책에도 지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험한 곳에 의지하여 3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4번 싸워 모두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계백 일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백제인들이 익혀 왔던 병법에 힘입은 바 실로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4)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다

 

계백은 대치하고 있는 신라군과 싸우기 직전, 군사들에게 옛적에 월왕 (越王) 구천(句踐)5천 명의 군사로써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각자가 용기를 내어 결단코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맹세하였다. 5천의 군사로써 70만 대군을 격파했으니, 열갑절 많은 신라 군대야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는 거였다. 이 구절은 군사들에게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불어 넣는 것인데,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대적하게 끔 사기를 격발시키고 있는 대목이다. 계백은 전쟁에 임해서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한편 비장감을 갖도록 해서 불리한 형국이었지만 승리를 유도했다. 계백은 허장성세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맹세를 지켰다.

일찍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정신력과 물질력의 비중은 3:1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랑스의 포슈 장군도 전쟁의 승패는 지휘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병사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정신력의 위대함과 지휘관의 역할을 웅변해 주는 말인 것이다.

지도자의 자질로서 난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필요하다. 안정복은 계백이 싸움에 임해서 무리에게 맹세한 것은 신()에 해당 된다고 보았다.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줄 때 만이 지도자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국민들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백의 맹세는 무사로서의 결연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반영해 준다. 신라 뿐 아니라 백제 무사들의 사생관에도 임전무퇴 정신이 깊숙히 자리잡았음을 뜻한다. 백제에서는 퇴각한 군사들은 죄다 목을 베는 엄혹한 형률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라 군대는 화랑이나 장수가 소모품으로 용약 돌진하여 적진(敵陣)에서 장렬히 전사하면 일제히 돌격하여 전세를 반전시키는 수법을 써 왔다. !하는 광기(狂氣) 어린 군중 심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전쟁 방식을 배제하였다. 소수의 희생 위에 얻어진 뼈 아픈 승리 보다는 모두가 승리를 누리게 하려는 휴머니스트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드디어 악전고투하여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신라 군대가 그만 퇴각하였다고 하였다. 안정복은 네 번 싸워 이긴 것은 용()이다고 평가하였다. 계백은 전장의 선두에서 작전을 지휘하며 네 번이나 거듭 승리했었다.

5) 남의 자식은 살려주다

삼국사기계백전은 이와 같이 나갔다가 물러났다 하며 싸우기를 네 번이나 하였는데 힘이 모자라 죽었다고 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백제 군대가 패하게 되는 내력은삼국사기관창전(官昌傳)에 자세히 보이는데, 계백의 넉넉한 품새가 크게 돋보이는 장면이다. 신라의 화랑인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백제군 진영에 뛰어들어 두어 명을 죽인 후 사로잡혀 계백의 앞으로 끌려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겨 보고는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출정하면서 자기 자식을 무정하게 베었던 계백이 아니었던가?

계백은 탄식하여 신라에는 특출한 사람이 많다. 소년이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계백은 관창을 살려 보냈다. 그러나 다시 백제군 진영에 뛰어들어 왔다가 사로잡힌 관창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그의 말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다. 품일(品日)이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을 때와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후회될 게 없다!”고 하였다. 3군이 이 장면을 보고는 모두 격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쳐들어 오니 백제 군대가 크게 패했다. 계백도 전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계백이 어린 장수 관창을 생포했지만 살려주었던 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는 아니었다. 살생유택(殺生有擇)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라 가려서 죽이는 것이었다. 그물에 걸려든 치어(稚魚)들을 방생하는 것과 같은 넉넉한 금도(襟度)를 말해주는 듯하다. 또 이것은 신라 화랑들의 세속오계와 통하는 일면을 보여주지만, 기실은 계백의 어진 심성이 드러나고 있다. 핏발이 서는 전장에서 보여준 계백의 너그러운 태도는 오늘날까지 훈훈한 향기로 남아 감동을 준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치적 파트너를 소멸과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작금의 정치인들이 새겨 보아야 할 덕목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6) 충신과 의사의 으뜸, 계백

 

안정복은 계백이 관창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인()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죽여서 그 시체를 돌려 보낸 것은 의(), 중과부적(衆寡不敵)해서 마침내 죽어 버린 것은 충()이다고 평가했다. 계백은 장수로서의 이상적 덕목을 죄다 갖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랬기에 안정복은 삼국시대에 충신과 의사가 물론 많았지만, 사전(史傳)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양촌(陽村;권근의 호)은 일세의 유종(儒宗)인데도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후인들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고 믿지나 않을까 하는 까닭에 (계백을 위해) 변론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중국 전국시대의 걸출한 전략가였던 손빈(孫?)은 전쟁을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할 3가지 조건으로서, 하늘의 기상과 시간인 천시(天時), 유리한 지리적 조건인 지리(地利), 온 백성이 일치 단결하는 인화(人和)를 꼽았다. 맹자는 천시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나서게 된 계백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화와 지리라는 무형의 무기로써 외침을 막았던 것이다.

국가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굳센 의지와,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지도자의 비상한 능력이 필요하다. 희생적 수범을 보여서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는 동시에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상을 절감하게 한다.

 

7) 황산벌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누가 영광된 삶이었나?

흔히 계백이 이끈 군대를 오천 결사대로 일컫고 있다. 그렇지만 모두 순국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백보다 관등이 높은 좌평 충상을 비롯한 20명은 신라군에 항복하였다. 평소 태도가 수상했던 충상은 뒤에 백제인들의 국가회복운동을 진압하는데도 앞장섰다. 여기서 충상은 왜 2등급인 달솔 관등의 계백 보다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이 될 수 없었을까? 위 아래가 맞지 않은 이상한 지휘체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필시 곡절이 있었을듯 싶다. 의자왕은 계백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출전시키려고 했지만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절충으로 좌평인 충상을 전선에 투입시켜 계백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충상은 세()가 불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군에 납작 엎드려 항복하고 말았다. 계백은 의자왕의 신임을 받았기에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혀 출정한 것으로 보인다. 계백은 자신을 신뢰한 임금에 대한 보답으로 최선을 다해 용전분투했던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해 ()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이뻐해주는 이를 위하여 얼굴을 가꾼다는 말이 상기된다. 관우와 싸우러 나갈 때 조조는 방덕을 주장으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투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 더러 방덕의 주군인 마초가 촉나라에 있는 상황이었다. 반대가 많았기에 조조는 부득불 우금을 대장으로 삼고, 방덕을 부장으로 삼아 출진시켰다. 그러나 정작 끝까지 용전분투하다가 굴()하지 않고 순국한 이는 방덕이었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로서 조조와 30년간 전장을 누볐던 우금이지만 항복하고 말았다. 조조의 맹장 서황은 나는 명군(明君)을 만났으니 공을 세워 보답할 뿐, 어찌 사사로운 영예를 좇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니 계백의 용전에는 의자왕의 신뢰와 사랑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계백이 전장에서 군사들에게 국은(國恩)에 보답하자!”고 했다. 여기서 국은나라의 은혜라는 뜻도 있지만 천자의 은택이라는 뜻도 담겼다. 계백은 천자곧 의자왕의 은택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상영은 계백과 함께 황산전투에 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렬한 전사를 택하기는 커녕 항복하였다. 그는 백제의 16관등 가운데 2번째 관등인 달솔이었지만, 신라의 7번째 관등인 일길찬에 제수되었다. 오욕(汚辱)의 수치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반면 계백은 황산벌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지만, 그 전기가 전해진 것을 볼 때, 신라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음을 뜻한다. 신라인들은 조국을 배신한 상영과 같은 인물보다는 적장이었던 계백을 기렸던 것이다.

 

8) 계백의 무덤은 전하는가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즈막한 언덕에는 계백 장군의 묘로 전하는 유구가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은 석곽이 노출된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에 지금과 같이 봉분을 쌓았다. 이 무덤을 계백 장군의 묘로 간주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무덤이 목이 잘렸다는 수락산(首落山), 가매장했다는 가장골(假葬谷)에 있고, 계백 장군의 위폐를 모신 충곡서원 바로 뒷편에 소재하였고, 묘향(墓向)이 정남향인 점, 곽을 만든 후 안치한 것이 아니라 관 주위에 화강석을 혼합한 백회를 바른 점, 계백묘로 구전되고 있는 점이다. 계백 장군묘의 동남편이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인 황산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분을 계백 장군묘로 간주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유의해야 되기 때문이다. “‘전대의 충신으로 신라의 김유신?김양과 백제의 성충?계백 및 고려의 강한찬?정몽주 같은 이의 묘소도 봉식(封植)하고 초목을 금해야 할 듯하다예조가 또 아뢰기를 비망기에 언급된 성충?계백?강한찬 같은 이를 각 도()에서 적어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선조실록3698일 조)라고 하였다.

계백은 충절의 표상으로 기려졌는데, 1688(숙종 14)에 지금의 논산시 부적면에 충곡서원이 창건되었다. 계백 장군의 위패를 중심으로 하여 박팽년?성삼문 등 17()의 그것이 좌우에 배향되어 있다.

 

9) 의미

기전체(紀傳體) 역사책인삼국사기는 모두 50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10권이 인물들의 전기인 열전(列傳)인데, 수록된 49명 가운데 백제인은 단 3명에 불과하다. 도미의 부인과 흑치상지 그리고 계백이 되겠다. 흑치상지전은 중국의 역사책인구당서신당서의 그것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도미의 부인과 계백만이 우리나라측 문헌에서 채록하였다. 잘 알다시피 계백은 백제가 멸망하던 순간의 인물로서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군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멸망 후 그의 전기가 지어졌고, 고려시대 때삼국사기에 수록된 것이다. 계백에 관한 기록은 백제인이 아니라 신라인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러면 신라인들은 무엇 때문에 계백의 전기를 지었을까?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용약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비록 적국(敵國)의 장수이기는 했지만 신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던 계백의 영웅적인 모습은, 이런 점에서 퍽이나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터에 나간 계백은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겼다. 어린 신라 화랑 관창을 살려서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러한 어진 심성은 일조일석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배양되는 것이요, 그러한 정서를 공유하는 환경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바로 계백의 태도를 통해 백제 정신 나아가 충남인의 정서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예 관념이 각별했던 계백 장군도 자신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깨끗한 마무리를 지었다고 보여진다. 조선 선조 임금도 지시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게 계백의 묘소였다. 그렇지만 계백은 고결한 행적으로써 우리 곁에 지금도 살아 있다. 지고도 이긴 계백이야 말로 진정한 승자가 아니겠는가?

 

2. 흑치상지(黑齒常之)

1) 도굴 되어 드러난 흑치상지 부자의 유골

 

한국계 망국민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유서깊은 묘지가 망산 곧 북망산이었다. 이곳에 흑치상지 부자의 유택도 자리잡고 있다. 1929년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일단의 도굴꾼들에 의하여 깊고도 넓은 곽()을 지닌 이들 부자의 묘소는 바쁘게 파헤쳐졌다. 그 묘지석의 소장자인 이근원(李根源)의 술회에 의하면 같은 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였고 양자 간의 무덤을 쓴 시기가 약 7년에 불과하므로 합장묘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마치 흑치상지 부자가 동일한 묘곽에 묻혔던 것인 양 서술되어 있는 술회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 어쩌면 매우 가까운 곳에 묻혔던 이들 부자의 묘가 오랜 세월에 의해 봉분이 없어지고 공교롭게도 도굴꾼에 의해 동시에 도굴됨에 따라, 부자의 묘지석과 유체[骨體]가 출토되었고, 이것이 마치 같은 묘곽에 묻혔던 것처럼 이근원에게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묘주(墓主)와 더불어 2부인과 첩이 합장된 묘에서도 3인의 묘지석이 모두 출토된 예가 있다. 동진(東晋) 왕흥지(王興之)의 묘소에서는 341년과 348년에 각각 사망하여 7년이 지난 뒤 합장한 부부묘에도 각자의 묘지석이 출토되었다. 게다가 흑치준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준의 장례를 무덤 속 광중을 문득 열어 관을 넣고 급히 닫기에 이르렀구나라고 하였다. 합장임을 생각하게 하는 문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근원의 술회대로 흑치상지와 흑치준 부자가 동일 묘광에 묻혔다고 보는 게 온당할 듯하다. ‘깊고도 넓은 곽에는 두 사람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묘광 안에는 두 사람의 유체가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의 것은 길고 또 다른 사람의 것은 짧았다고 한다. 긴 유체는 대략 9척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이는 목측에 불과하므로 신빙하기 어렵지만 흑치상지를 가리킴은 분명하다.?구당서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신장이 7(196Cm; 7x石尺 28Cm)이 넘는 장신이었다고 하므로 관련짓는 게 무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록 골체라고 하여 유골만이 남아 있었던 양 기록되어 있지만, 신장에 관한 언급이 되어 있을뿐 아니라 9척이라는 큰 신장으로 목격담이 적혀 있는 점을 볼 때, 시신이 거의 미이라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400년 전의 시신이지만 언젠가 임진왜란 중에 억울하게 참수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소를 이장할 때 그 시신이 미이라의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핏자국도 선연하더라고 한다. 그렇다면 흑치상지의 시신도 천추의 한을 품고 죽은 터라 썩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단 말인가?

또 묘광에서 한옥(漢玉)과 금은동기(金銀銅器)?도와기(陶瓦器) 등도 매우 많이 출토되었는데, 북경의 골동품상이 구입하여 갔다고 한다. 오직 묘지석만은 값이 비싸고 또 반출이 어려워 남아 있는 것을 마침내 이근원이 구하여 보관하였다. 이근원은 이때 한옥 1점을 같이 구하였는데 정교하게 새긴 공예품이라 자신이 즐겨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이근원은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석과 그밖에 부장품 1점을 소장하였다. 그 후 소주(蘇州)의 문관회(文管會)에 기증되었고 현재는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수장되어 있다. 곡절 많은 비장한 생애를 살다가 이국 땅에 묻힌 한 무장의 존재는, 그의 생애가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에 의하여 마구 파헤쳐지면서 세상의 빛을 쪼이게 되었다.

 

2)흑치상지 묘지명의 체재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서 판독되지 않은 글자는 거의 없다. 묘지석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71Cm로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서체는 구양순체풍(歐陽詢體風)의 단정한 해서(楷書)로 도합 411604자가 쓰여졌다. 그 필치는 하지만 하지 않고 蕭散, 俊郞가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문자 가운데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사용되었던 이른바 무주신자(武周新字)가 곧잘 보인다. 묘지명 墓誌銘의 작성 시기가 측천무후의 집정기인 당나라 성력(聖曆) 2(699)에 흑치상지의 묘를 개장할 때였기 때문이다.(앞으로 흑치상지묘지명묘지명으로 줄여서 표기한다)

흑치상지의묘지명은 대략 6 단락으로 나누어진다는 지적이다. , 1단락은 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흑치상지가 당에서 받은 관직과 훈작(勳爵) 및 추증된 관직 등이 보이고 있다. 2단락은 서()의 첫머리에서 흑치상지의 생애에 대한 평가를 개괄한 것이다. 3단락은 그의 가문 내력과 품성 및 수학(修學)에 대한 기록이 된다. 4단락은 백제와 당에서의 공훈과 역관(歷官)에 대한 기록이다. 5단락은 흑치상지의 장자인 준()의 신원(伸寃) 요청과 허락의 제(), 개장 요청과 허락의 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6단락은 미괄(尾括)의 형식으로 흑치상지의 생애를 칭송한 명()이다.

3) 학문적 소양과 관계 진출

흑치상지는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어린시절부터 유교적 교육을 착실히 받으면서 성장했던 것 같다.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덕망을 나타내는 수사적(修辭的) 칭송이 그득하다.흑치준묘지명에는 흑치상지의 생애를 아버지는 상지(常之)로서 당나라의 좌무위대장군 상주국 연국공이 되었고 좌영군대장군에 추증되었다. 그의 재주는 뛰어나 재주꾼들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의 행동은 훌륭한 씨족들 중에서도 빛이 났다. 공훈은 천지를 덮었으니 관부(灌夫)와 같이 장군을 맡았었고, 포상은 산하에 무성하였으니 소공(召公)과 같이 연국(燕國)에 봉해졌었다. 죽어서도 능히 그러하였으니 그를 기려 추증함에 영예가 가득하였다라고 적었다.

구당서흑치상지전의 첫머리에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 사람인데 신장이 7척이 넘었으며 날래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라고 그 용모와 성품을 집약하여 준다. 그가 신장이 7(196Cm)이 넘었다고 하는 것은 본시 그 가문의 씨성이 부여씨였던 점과 결부지어 생각하게 한다. , 북국의 나라 부여인들의 신체적 특징을 잘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유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3세기 후반에 씌어진삼국지 三國志에 의하면 부여인들에 관하여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후덕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적힌 그의 성품에 관한 몇 구절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부군(府君)은 어려서부터 사나이답고 포부가 화통했으며, 기지와 정신이 영민하고 빼어 났으니 가볍게 여긴 것은 기욕(嗜欲)이었고 중히 여긴 것은 명분의 가르침이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침착하고 맑았으니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정의 궤적이 활달하여 멀리는 그 이수(里數)를 나타내지 아니 하였다. 거기에다가 정성으로써 더했으며 인물이 따뜻하고 어진 것으로써 거듭했다. 이 때문에 친족들이 그를 공경하였고 스승이 그에게 경탄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의젓하였으며 성품이 명달하였다. 힘은 능히 관같은 무거운 중량을 들 수 있지만 힘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지혜는 능히 적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지혜로써 스스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써 썼지만 드러났고, 어리석음으로써 올바름을 길러 나갔기 때문에 그 때 행실이 산처럼 우뚝하게 서 있었고, 모두가 쳐다보는 명망이 있게 되었다.”

오직 부군은 외로운 산봉우리가 우뚝하게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기상으로써 재간의 표상이었다. 말은 적었으며 뜻은 넓었고 지엽처럼 많이 덮인 게 없었다. 이제 군대에 들어가 수레를 밀며 변방에서 절개를 세우니 중상을 잘 하는 사람도 악을 더하지 못했고, 칭찬을 잘하는 사람도 능히 아름다움을 더하지 못했다.”

 

물론 이 같은 기록은, 귀신에게 아첨하기 위한 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는묘지명에 적힌 것이라서 과장된 문면이 적지 않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러나신당서흑치상지전에도 비록 편린이지만 그의 온유함과 관대함이라든지 꼿꼿한 기상에 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사랑이 있었다. 그가 타는 말이 군사들에게 매질을 당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하여 경솔히 관병(官兵)을 때리겠느냐고 하였다. 상을 받는대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겨놓은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얼마간의 과장은 있다손치더라도묘지명의 기록대로, 그는 영민함과 꼿꼿한 기상을 품고 있는 태산과 같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그의 전인적인 품성은 일단 개인적인 성격에 기인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려서부터의 유교적 학문소양에서 비롯된 바 크지 않았을까 한다.

흑치상지의 학문적 소양에 관해서묘지명에는 어려서 처음 공부할 나이가 되었는데, 춘추좌씨전, 반고의한서와 사마천의사기두 역사책을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다 했고 공자 역시 부끄럽다 했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이다. 이 경지를 넘는다면 무엇이 족히 많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여 어릴적 수학과 관련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를 통해서 흑치상지는 중국의 여러 고전과 역사서를 읽었고, 상당한 교양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좌구명 운운 左丘明云云의 구절은논어공야장편에 나온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겉으로 말을 꾸미고,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척하는 태도를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고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또 속의 원한을 숨기고 그 사람에게 친한 척하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위의 구절은 흔히논어주석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아첨을 위해 가장된 애교를 부리면서 자신을 가장하는 일과, 마음속에는 원노(怨怒)를 비수처럼 감추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없는 척하는 이중인격의 인간이야 말로 수치스러운 노릇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공야장편을 흑치상지가 어린 시절부터 읊조렸음은 그의 가치관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어쩌면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종국에는 억울하게 모반 혐의를 쓰고 옥중에서 사망한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삽입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요컨대 이러한 일화는 흑치상지의 학문적 토대를 더욱 명료하게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묘지명의 이 기록은 흑치상지의 영민함과 학문적 깊이를 칭송하는 문사가 되겠지만, 실은 백제 귀족들의 학문적 소양을 암시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

북사 北史백제 조에 의하면 풍속이 말타고 활쏘기를 숭상하였을뿐 아니라 고서(古書)와 사서(史書)를 애독하여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엮을 줄도 알며 관청사무에도 능숙하였다라고 하였다.구당서백제 조에도 서적으로는 오경(五經)과 제자서(諸子書) 및 사서가 있으며, 또 표()와 소()의 글도 중화의 법에 의거한다라고 하여 백제인들의 학문적 소양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백제에서는 4세기 중반 이래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비롯한 박사제도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박사는삼국사기근초고왕기 말미에 적혀 있는 고흥(高興)이 되겠다. , 무녕왕대에 왜에 파견되었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가 문헌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경전(經典) 관련 박사이다. 이러한 점에 미루어 볼 때, 백제에서의 귀족 자제들은 유교적인 교육기관을 통하여 학문적 소양을 일찍부터 넓혀나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흑치상지의 전인적 성품의 토대는 적잖이 이 같은 유교적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약관이 안 되어 지적(地籍)으로서 달솔(達率)을 제수받았다라고 하였다. 그가 20세 이전에 지적 즉, ‘소속된 가문이나 신분을 가리키는 쉽게 말해 문벌로서 달솔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흑치상지가 처음부터 달솔 관등에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이나 천남산의 경우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남생의 경우 9세에 선인(仙人),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에 올랐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흑치상지 역시 10대부터 관계(官階)에 나아가 관등순서를 밟아 20세 전에 승급 상한인 달솔까지 올랐다고 하겠다.

4)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건너 가다

묘지명의 기록을 참작할 때 58세 때인 687년에 흑치상지는 회원군 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가 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낭장 찬보벽과 연합작전으로 돌궐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찬보벽이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 함께 계획을 세우라고 조칙이 내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무리한 진격을 감행하다가 전군이 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럼에 따라 찬보벽은 옥리(獄吏)에 넘겨져 베임을 당했다. 흑치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묘지명만물은 정강을 꺼리는 법이요, 행실이 높으면 중상을 받게 마련이네라고 하였듯이 그는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의 모반 사건과 관련,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조회절의 모반 사건은 그 전모가 알려진 바 없다.

흑치상지를 무고한 주흥은 혹리(酷吏)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흑치상지가 주흥의 독수(毒手)에 걸리게 된 것은 서경업의 난이 있은 2년 후인 686년에 제정된 고밀(告密)이라는 이름의 밀고 제도 때문이었다. 이 제도는 사실의 유무에 관계없이 투서에 의해 남을 무고하게 하는 것이다. 밀고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상을 받거나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서경업의 반란을 진압한 후 측천무후는 반란을 사전에 포착하여 진압할 목적으로 일종의 비밀경찰 제도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나직(羅織)’이란 밀고를 당한 당사자에서부터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과 친우에 이르기까지 연루자를 확대하여 일망타진으로 잡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한 사람의 처형보다도 오히려 이 쪽을 사람들은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특히 주흥은 삭원례(索元禮)?내준신(來俊臣) 등과 더불어 각각 많은 불한당을 곁에 두고는 밀정으로 부렸다. 이들은 잔혹한 고문만도 10 종류나 만들어낸 야차(夜叉)와 같은 위인들이었다.

무고한 흑치상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주흥의 말로가 순탄할 리 없었다. 모반자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기세 등등하던 주흥이 이제는 자신이 모반죄에 엮어져 동료인 내준신 앞에서 새파랗게 겁에 질린체 자백 아닌 자백을 하였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파직(罷職)시켜 귀양 보내는 선에서 그쳤으나 원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주흥은 도중에 암살되었다. 잔인한 살륙을 너무나도 많이 자행하였던 인간 백정인 삭원례와 내준신 또한 처형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우리 주변에서 허구한 날 꼼수나 두면서 커튼 뒷전에서 음해나 일삼는 소인배들의 말로 또한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689109(무오)에 흑치상지는 60세를 일기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교형(絞刑)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 해는 9월에 윤달이 들었으므로, 그는 세상이 얼어붙은 시점에 영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구당서흑치상지전에는 이와는 달리 스스로 목을 메어 죽은 것으로 적고 있다.신당서에도 투환사 投?死라고 하였으므로 목메어 자살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가 자살했다면 옥중에서 엄청난 번민과 실의 속에서의 막다른 선택이었으리라.

사람은 죽는 순간 일생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압축되어 일순간에 스쳐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마지막 순간 흑치상지의 뇌리에는 무슨 상념들이 지나갔을까? 지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총명하다고 기대를 모았던 유년시절, 전도가 양양한 벼슬길에 나섰다가 의자왕 말기의 궁중부패를 보고 고뇌하면서 벗들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젊은 시절의 순간들, 나라의 멸망을 몸소 겪고 또 조국의 재건을 위해 힘차게 싸웠던 열정적인 나날들, 내분의 한복판에서 고뇌하다가 항복하여 부여융과 함께 국가 재건을 설계하고 또 땀방울을 흘리던 분주하던 모습들, 미련을 털고 쫓겨 가던 때의 기나긴 낙담, 모래 먼지 날리는 끝도 없이 막막한 변경에서 오랑캐 군대들을 깨트리던 대, 또 전공을 얻어 환희에 젖던 순간들, 득의에 찼던 나날들, 그리고 일생일대의 마지막 전투였고 운명을 결정지었던 찬보벽과의 돌궐 토벌전에 나섰다가 암담해 하던 순간들, 등등이 어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을,묘지명에서는 영욕은 반드시 있는 법이고 죽고 사는 것은 명이네. 진실로 돌아가는데 함께 한다면 어찌 하필 부인의 손에서 목숨을 마치리요라고 하면서 달래고 있다. 있는 곳마다 보배를 이루었으니 어디를 간들 밝지 않았으리요? 오직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으니 봄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네, 문물이 그에게 의뢰해서 빛을 움직이게 되었고, 소문과 밝은 문화가 그를 기다려 공을 이루게 되었네라면서 그의 곡절 많은 생애에 대한 의미를 반추해 주고 있다.

흑치상지의 죽음은,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으로서 위명을 떨쳤던 고선지(高仙芝)의 그것과 흡사하여 더욱 마음을 저리게 한다. 영국의 유명한 동양학자인 스타인(M.A.Stein)고선지 장군이야말로 일찍이 유럽이 낳은 어느 유능한 사령관 보다도 탁월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였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세계사에 찬연히 빛나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고선지는 일생 일대의 마지막 전투였던 안록산의 반란군을 막기 위해 10만의 병력을 모아 낙양 서쪽의 삼문협(三門峽)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후퇴하는 관군의 보고로 이 지점을 고수할 수 없음을 알고, 창고를 열어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불태운 후, 군대를 이끌고 다시 삼문협 서쪽의 동관(潼關)으로 후퇴하여 지켰다. 동관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큰 불상사가 터졌다. 그에게 금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 오늘날의 기무사 장교에 해당되는 감군(監軍) 직책의 변영성(邊令誠)이 당현종에게 무고하였던 것이다. 그럼에 따라 고선지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죄목은 후퇴했다는 것과 사졸에게 양곡과 군수품을 나누어주는데 부정이 있었다는 거였다. 고선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막 참수된 봉상청(封常淸)의 시신이 땅꽈리와 패랭이꽃 덤불에 딩구는 것을 보면서 형장에 들어섰다. 봉상청은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하여 당나라의 사정을 알린 글에서 대장군 봉상청으로 하여금 15만의 무리를 이끌고 따로 낙양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던 그 인물로서 한쪽 다리를 저는 무장이었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시신을 돌아 보며 한 마디 던졌다. “공은 내가 천거한 바이고 또 나를 이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으니 이제 공과 더불어 죽음을 같이 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군문(軍門)의 관직에서 항시 고선지의 뒤만 쫓아오던 봉상청이 죽음은 먼저 맞이한 것을 애달프게 느끼며 한 말이었다.

임종에 즈음하여 고선지는 내가 후퇴한 것은 죄이니 죽음도 감히 마다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를 도적으로 몰아 양곡과 군수품을 가로챘다는 것은 무고(誣告)라고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그는 변영성에게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삼군(三軍)이 모두 있는데 그대만 어찌 모르는가?”라고 말하고는 휘하의 장병들을 죽 돌아다보면서 비장한 어조로 나에게 죄가 있거든 그대들은 죄가 있다고 말하라. 그렇지 않거든 억울하다고 말하라고 하니 군중(軍中)이 모두 억울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케 하였다.신당서고선지전의 이 기록은 오랜 여운을 끌면서 감동을 준다. 어쨌든 이리하여 잘 생긴 일세의 호걸은 약관에 장군이 되어 755년에 처형되었으니, 그의 나이 겨우 40세 전후로 짐작된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말하였듯이, 인간은 삶의 양보다는 질로써 평가된다고 할 때, 마지막 순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여기면서 충실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마지막 순간에 흔들림 없이 생애를 정리할 수 있어, 먼 훗날까지 꽃다운 향기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흑치상지가 죽자 고선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무수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살육한 장본인인 측천무후가 또 한 사람을 그렇게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한 측천무후는 흑치상지가 죽은지 16년이나 더 살고 평온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런걸 볼 때 인과응보니하는 이야기가 턱 없이 느껴지겠지만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장남인 흑치준의 노력으로 698년 신원되었고 좌옥금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측천무후의 제서를 적고 있다.

죽은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 상주국(檢校左羽林衛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 있는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군사 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장수로서 군대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소 공적을 펴게 되었다. 옛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윽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마쳤으니 의심스러운 죄가 분간이 되지 않았도다. 근래에 조사를 해보니까 일찍이 반대되는 상황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허물이 아닌 것 같다. 진실로 깊이 민망스러우니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고 위로를 해 주어야겠다. 그리서 총장을 더해주어서 무덤을 빛나게 해주어야겠다고 하여 좌옥금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에 추증하고 훈봉을 옛날과 같이 하였다.···”

그가 죽은지 10년째 되는 699(성력 2) 122일에는 측천무후가 개장(改葬)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의 유택은 그 해 217일에 지금의 낙양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이장할 때 측천무후가 물 1백단과 장사에 쓸 천막 및 노복들을 내려주고 담당관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묘지명에는 망산 남쪽 관도의 북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묘지명의 맨 마지막 그러니까 의 끝 구절에 내가 진실로 감모해서 그를 위해 묘지송을 쓰노라. 여기에 쓴 말은 없어지지 않을 터이니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좌절되고 굴절된 생애에 대한 평가 또한 바르게 펴지는 날이 오리라고 낙관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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