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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회 국민강좌] - 고구려-발해인 징기스칸(전원철 박사/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변호사) 2017.05.12  조회: 273

< 강의요약 >

- “세계정복자칭기스 칸은 발해-고려 진국공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의 제19대손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청나라는 한 가문 주몽의 후손

-몽골제국-티무르제국-무갈제국은 조선민족의 방계선조의 제국들

-조선민족의 미래는 무엇인가?

 

 

 

<강의목차>

I. 서문:

기존의 고구려-발해말갈-몽골에 관한 견해

 

II. 본론:

1. 칭기스 칸 선조가 나온 에르게네 콘이야기

2. 두 사람의 생존자 키얀과 네쿠즈, 곧 일하(壹夏)의 아들 '()'과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

3. ‘키야트()’ , ()’씨라는 뜻

4. “텡기즈 콘진국공대야발

5.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사실은 당-신라 대 발해 사이의 대전쟁

6. 발해 씨는 퉁구스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의 庶子가문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8. 기존 학계의 관점과 다른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9.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바로 발해 서경(西京) ‘압록강-()-

10. 원태조 칭기스 칸과 금 태조 아골타의 공통 선조 대야발 4세손 금행(今幸)

11.“황금항아리” “금행의 발해 실지(失地) 회복

 

III. 결론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우리가 할 일은?

 

 

 

 

 

I. 서문:

 

기존의 고구려-발해말갈-몽골에 관한 견해

 

칭기즈 칸(1162~1227)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의 일이다. 페르시아인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역사상 그 어떤 이도 쓰지 않았던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2004년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나아가 199521세기의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의 도래를 앞두고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 년 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단지 몽골사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왜인지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라고 한다.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의문 때문에 필자는 이 글을 썼다.

그 결과 필자가 알게 된 결론은 바로 이 책이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밀은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표자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스런 역사, 비봉출판사, 2015과 동서의 2을 통해서 자세하게 밝힌 바와 같이,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의 비밀은 첫째 칭기즈 칸이 (==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이다. 이 이름을 두고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터무르-또는 데미르-”, 철인(鐵人)”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이름은 <원사>태조기가 보여주듯이 대무신(大武神), 곧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테무진의 가족과 자신이 칭기스 칸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손임을 주장한 것이다.

둘째 이유는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에 그런 비슷한 낱말조차도 없는데, 이 칭기스 칸이라는 말의 뜻을 왕중 왕또는 가장 위대한, 강력한 왕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주류학계의 견해와는 전혀 달리 이 칭기스 칸이라는 왕호는 발해 고왕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왕(震國王)’또는 진국공(震國公)’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 kh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칭기스 칸의 손자 원세조 쿠빌라이 때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자신의 <동방견문록>에서 25회나 칭기스 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딱 한 번만 제외하고 24번을 칭기 칸이라고 쓴다. 왜일까? “친기 칸은 바로 원대 남인(南人)의 말로 진국왕이라는 소리이다. 곧 칭기스 칸은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세계 정복자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자처한 것이다.

셋째 이유는 몽골이라는 종족칭 및 국명이다. <타리히 고지데(Tarikhi Gojide, 선별된 역사)>가 밝히듯이 칭기즈 칸은 자기 당시까지는 이름도 없던 그 땅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오늘날 몽골(몽골리아)”라고 부르는 자신의 나라 이름을 처음으로 몽골이라고 붙이고,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칭한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날 학자들은 이 말을 보통 송나라인들의 기록 <흑달사략(黑?事略)> 등에 따라 멍거(, )”라고 하는 몽골어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칭기스 칸 자신과 자신의 종족이 몽골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이유는 그 말이 바로 발해-말갈이라는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키우는 마을, 고을을 뜻하는 말골(馬忽)/몰 고을이라는 말이다.

테무진(대무신), 칭기 칸(진국 왕), 몽골(말골)이 바로 그가 고구려-발해인의 후손임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상의 결론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문헌사학적 자료이다. 필자가 중앙아시아에서 획득한 한 중.고대 사서 <사국사(Arba’Ulus Tarikhi)><집사>, <투르크의 계보(Shejerei Atrok)>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가 나온다. 이는 지금부터 705년가량 전 라시드 웃딘이 자신이 찬술한 방대한 사서 <집사>에서 말한 그 사라진 <황금의 책(Altan Daftar)>의 삽입판들인데, 그것은 놀랍게도 바로 칭기스 칸 가문의 선조를 밝힌 족보이다.

 

  금겉장으로 입힌 진국왕(震國王) 대조영과 대야발의 후손의 <황금의 책>, 족보

 

발표자는 이 족보의 계보를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요사> <금사> 등 여러 동방사서와 대조, 교차하여 연구한 결과 그 계보 속에서 칭기스 칸은 놀랍게도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반안군왕 대야발의 제19세손임이 드러난다.

결국 몽골제국은 조선반도의 우리민족과 함께 사라진말갈의 나라, 발해왕국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918년에 발해가 망한지 어언 1000년 중 3년이 모자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 밝혀진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사적 진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를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소속의 우리 주류 국사 학자들은 말갈을 이른 바 퉁구스족이라는 말갈족으로 부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갈이 우리 조선민족의 선조인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심지어 국사교과서에서조차도 발해는 지배층 고구려인과 피지배층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서술하고, 송기호 교수 등 일부 주류학자들은 발해는 퉁구스족 말갈족이 만든 나라이므로 고구려적 요소를 빼면 발해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만주사라고까지 보고 있다.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을 저지하라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진 동북아역사재단은 왜 스스로가 인터넷에서 쓴 대로 구당서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인지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그렇게 동어반복적으로만 되풀이하면서, 발해를 세운 말갈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의 동북공정에서 보이는 중국 중심적 발해 인식을 우리의 시각과 대비시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학계는 발해를 당나라 시기 말갈인, 즉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한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고구려 계승국이다. 구당서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임을 나타낸다. 또 일본에 보낸 발해국서에도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기한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동북공정은: 필자 보충] 발해 건국 초기의 정식 국호는 말갈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 사료에 엄연히 진국이 초기 국명으로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의 오류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발해의 건국주체가 말갈이라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구당서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이라고만 하는 정도의 엉성하고 취약한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주체는 동북공정이 말하듯이 분명히 말갈이다. 또 우리측 학계가 동북공정측이 말하는 말갈에 대항해서 발해의 건국 주체가 고구려인이라는 것도 분명히 옳다. 그렇다면 양측은 다 옿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양측은 자신들의 논리로 서로 상대방에게 대항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양측은 다 말갈이 바로 고구려와 거의 같은 말임을 모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좀 더 자세히 말할 것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우리 학계 사이의 이 논쟁에 관한 발표자의 견해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 발표자가 <무경총요>, <.구당서>, 그리고 발해를 지극히 싫어했던 신라시대 최치원의 글과 서방사서 <사국사>가 전하는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 그리고 조선시대 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 “말갈은 퉁구스어에는 그와 비슷한 소리조차 없는 낱말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은 우리 조선어로만 해석이 가능한 우리 고대어 낱말로 바로 몰 골”,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말갈 말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말 고을”, 말갈의 수령 대조영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일족으로 그 서자가문이다.! 좀더 구체적인 것은 곧 말하게 될 것이다.

 

세계제국 몽골을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는 오늘날 퉁구스인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지방 소수민족으로 잘못 알려진 말갈인대조영의 가계이다. “속말지방의 말갈 대조영가문은 간단히 말해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고, 그들이 다스리던 말갈 7는 고구려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조영 가문을 두고 한 말인 고려별종이라는 말은 마치 주몽이 부여 단군(북부여왕) 해모수의 서자 이기 때문에 부여별종(부여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불리고, 또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주몽의 서자이었기에 역시 부여별종(부여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불린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곧 대조영이 해모수와 주몽의 부여왕가(부여인)에서 갈라진 무리이기 때문에 발해가 망한 뒤 수 십 년이 안 되어 최초로 발해 대조영의 가문의 뿌리를 언급한 <무경총요>부여별류로 기록하고 또 그 뒤애 <구당서>가 그 가문을 고려별종(고려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기록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야 발표자의 연구결과를 통해 고구려 최후의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 잡혀갔다가 요동(고구려)에서 지속되는 민중의 소요를 무마시키기 위해 당 황제가 보장왕을 다시 옛고구려 땅으로 돌려보냈더니 그가 고향 땅에 이르자 마자 말갈의 대조영 가문과 접촉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보장왕은 말갈의 대조영 가문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려다가 장안(오늘 날 서안)으로 다시 소환되어 그 곳에서 세상을 버린 것이다. 당시 보장왕의 네 아들들 가운데, 안승은 신라에 억류되어 있었고, 또 한 아들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두 아들은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땅으로 돌아온 그가 믿을 수 있었던 이들은 오직 바로 대조영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보장왕이 다시 당나라로 잡혀가자 이제 다시금 고구려 옛땅에서 고구려 정실 왕족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걸걸중상이 진국을 건설하고 이어서 아들 대조영이 진국(震國)-고려(高麗)”, 발해(渤海)”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밝혀진다. 대조영의 가문은 이제는 당나라, 일본, 신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버린 고구려 왕가 적계(嫡系, 적손) 가문을 차선으로 대표할 수 있었던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구려 유민, 그 백성들은 이 왕족의 서자 가문이라는 근거 때문에 사라진 적자가문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말갈발해는 한 종족, 한 가문이고 당당한 우리 조선민족의 역사인 것이다.

발표자는 또 칭기스 칸의 선조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15대 선조로 모든 콩그라트(고구려) 종족의 시조로 군주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는 페르시아어 황금의 항아리”, 달리 타타르-투르크어로 황금의 칸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여진 아골타의 8대조 금행(今幸, 金幸)=큰 칸/금 칸이고, 그는 금()나라와 원나라를 세운 가문의 공동선조이자, 발해 반안군왕 대야발-->대일하-->대간(-키얀)-->-키얀의 아들-->금행의 계보 속에서 대야발의 4대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동시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이다.

결국 <금사>에 나오는 아골타의 7대 선조 함보의 아버지가 그이고, 그는 오늘날 사학자들이 신라인 김-함보라고 잘못 파악한 -함보의 아버지이고, <금사><세기>에서 금나라는 말갈의 후손이라고 하고 아골타 자신이 발해인 양박을 시켜서 발해유민을 자기 밑으로 끌어모을 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한 말의 참뜻과 <삼조북맹회편>이 아골타의 조신(女眞, 여진)주몽의 남은 씨앗이라고 한 뜻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우리 학자들이 신라왕가의 후손이라고 잘 못 대서특필해온 청나라 황가는 청나라 건륭제가 대신들에게 편찬하게 한 <흠정만주원류고> 속에서 청나라 태조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의 가문이 금나라의 유부(남은 부락)”이고, “발해왕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도 이제 명백히 풀리는 것이다.

 

고구려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조영의 발해와 왕건의 고려, 아골타의 금나라, 칭기스 칸의 원나라와 세계적 대제국인 몽골4칸국 또 중원이라고도 부르는 지나 땅을 통치한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는 오늘날 몽골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부랴티아 등을 말하는 연연(燕然)” 지방을 아우른 말갈제국이었던 발해는 몽골제국, 차가다이 칸국 내에서 성장한 티무르의 티무르제국, 인도의 무갈제국으로도 발전했다. 전세계를 통치한 제국의 건설자들이 바로 우리 고구려-발해의 후손들이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 국사와 우리의 미래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발표자는 이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하여 밝혔는지, 그 근거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길고 자세한 본인의 2권의 저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요약한 말을 통해 이 자리를 통해 말씀 드리고자 한다
 

 

 

 

 II. 본론:

1. 칭기스 칸 선조가 나온 ‘에르게네 콘’ 이야기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이 사서의 한 부분에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 책은 특히 ‘투르크와 모골(몽골의 투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이란에 서있는 라시드 웃딘 동상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발표자 주)에 다른 투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사마르칸드의 울룩벡(Ulugh Beg·1394~1449) 동상

 

 

 

2. 두 사람의 생존자 키얀과 네쿠즈, 곧 일하(壹夏)의 아들 ‘간(澗)’과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투르크의 계보》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에 관한 문헌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키야트’는 ‘클(乞)’ 씨, 곧 “대(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 자전은 이 한자를 “去(거)-訖(흘)” 반절(反切), 곧 우리말 소리로 “걸”이라고 해두고 있고, 당시 남방 송인들의 소리로는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로 기록했는데, 이 둘째 소리는《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 소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걸”과 “키요트”는 단지 우리말로 소리를 냈는가 당시의 남방송인들의 소리로 내었는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고 둘은 사실은 같은 ‘걸(乞)’의 소리이다. 그런데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으로 아버지 때의 성씨는 ‘걸(乞)’ 씨였는데, 아들 대조영은 그 성을 고쳐 자신의 성을 “대(大)” 씨라고 썼다. 이것을 보면 원래 대조영의 아버지와 그 선조 때의 성씨인 ‘걸(乞)’ 씨는 고구려-말갈어, 곧 우리 말 ‘크다’라는 말의 ‘클(大)’씨를 원래의 한자의 뜻은 버리고 그 한자의 소리만을 빌려서 우리말 소리를 적는 표기방식인 고구려-발해식 이두(吏讀)로 적은 것이다.  아들 대조영은 원래의 자기 가문의 ‘클(乞)’ 성씨를 같은 “뜻”의 한자말로 바꾸어 ‘대(大)’ 씨로 쓴 것이다. 단, 이  ‘대(大)’ 씨 성씨를 한자의 뜻을 살려서 한자를 쓰되, 그 한자의 우리 말 뜻으로 그 한자를 읽는 표기방식인 고구려-말갈식 향찰로 쓰면 설사 ‘대(大)’ 씨라고 썼더라도 고구려-말갈어 구어로는 ‘클(대=걸)’로 읽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성씨는 여전히 “클(乞)” 씨였음을 말한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이야기이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몽골어”에는 그런 뜻을 가진 “키얀”이라는 말 소리는 전혀없다. 그렇다면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몽골어가 아니라, 제3의 언어인데, 그것은 알고 보면 바로 고구려-말갈어가 자주 채용하여 쓴 한자 낱말 “澗(간)”의 옛소리이다. 이 고구려-말갈식 “澗(간)”자는 ‘[세차게 흐르는] 산골 물 간(澗)’이다. 이 말은 라시드가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고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성씨를 붙여서 그 “키얀”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 그것은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라는 성명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일 한)의 양자 누쿠즈’, 곧 《집사》가 말하는 ‘네쿠즈(Nequz)’ 또 《투르크의 계보》 등이 말하는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면서 오직 몽골의 황가 성원과 귀족들만이 그 말뜻을 알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자 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페르시아어로 링쿰”으로 기록된 것이다.
 
4. “텡기즈 콘”은 ‘진국공’ 대야발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발표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임을 발견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국사> 등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이 팅기즈 칸이라고 하는 인물은 <신.구당서> 등과 《대씨대동보》를 통해 보면 분명히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대야발이다.
 


5.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사실은 당-신라 대 발해 사이의 대전쟁
 
 이제 《집사》에서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보자.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6. 발해 大씨는 “퉁구스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요녕골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물길계(勿吉系)”의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대조영 때 “乞(클)”이라는 순수한 고구려-말갈어 성씨를 같은 뜻을 가지는 한자 “大”씨로 바꾼 것이다.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것은 그가 앞서 말한 대로 “부여별류(부여에서 갈라진 무리)”와 “고려별종(고려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이라고 한 것 등, 그가 고구려 왕족의 가닥족속임을 가리키는 기록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이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 고구려 잔얼, 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참고로 “고구려”는 “고-구려”로 성(城)을 말하는 “구려(구루)”와 군(郡)을 말하는 “말 골(말키우는 고을)”로 이루어져, 구려, 구려, 구려, 수 많은 구려와 말 고을, 말 고을 그리고 7개 말 고을 이 합쳐져 크게 된 “커-구려”라는 순수한 우리 말의 한자 이두식 표기국명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투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정벌을 한 길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