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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회 국민강좌] - 고려가 중시한 서경은 평양이 아니다 2017.07.12  조회: 187

 

 

  

 <강의요약>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두 개의 압록강이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 그것이다. 또 국경선 압록강(鴨綠江)의 거점 도시는 보주(保州)였고,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의 그것은 의주(義州)였으며,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하고 있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하여 변함없이 압록강(鴨綠江)이었지만, 이러한 서북 국방 방어체계가 성립한 것은 요와 금의 교대시기 보주가 고려에 재귀속된 12세기 초반이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 1, 2, 70, 8영에 합계 정병 22천 명이었다.

 

종래 고려의 서북 국경을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으로 이해해 왔다. 그 일차적인 전거는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가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렇게 국경선 압록강()과 보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과 의주가 혼동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음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국내외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고려사>>, <<요사>>, <<금사>>를 비교하여 논증한 이런 결론에 따르면, 기존에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되어 왔던 강동 6,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이 모두 국경선 압록강(鴨?江)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국경선 압록강(鴨?江)은 현 요하의 철령 부근 지류로 비정된다. ......

 

 

 

 

 

< 강의자료 정리>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 요·금 시기의 압록(鴨?)과 압록(鴨綠)을 중심으로
<<고려사>> 지리지 서문
1-1 그 사방 경계는 서북으로는 당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의 경우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의 도달점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고, 동북은 그것을 초과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안북도호부 의주(義州)조
1-2 의주는 본래 고구려 용만현이다. 또 화의라고 부른다. 처음에 거란이 성곽을 압록강(鴨綠江) 동쪽 언덕에 설치하고, 보주(保州)라고 호칭하였다. 문종 조에 거란이 또 궁구문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호칭하였다. (달리 파주(把州)라고 한다.) 예종 12년에 요 자사 상효온이 도통 야율령 등과 더불어 금 병사를 피하여 바다에 떠서 도망가면서 우리 영덕성에 공문을 발송하여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우리 병사가 그 성곽에 들어가 무기·화폐·곡물을 수습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쳐서 의주방어사로 삼고, 남쪽 경계의 호구를 추쇄하여 채웠다. 이에 다시 압록강(鴨綠江)으로써 경계로 삼고,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인종 4년에 금이 역시 州로써 그것에 귀속시켰다. 고종 8년에 반역하였으므로 강등하여 함신이라고 호칭하였다가 곧 예전대로 복구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하여 목으로 삼고, 18년에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별호는 용만이다. 압록강(鴨綠江)이 있다. (달리 마자수(馬?水)라고 하고, 또 청하(靑河)라고 한다.)

<<고려사>>10 세가 10 선종 5년(1088) 9월
1-3 9월에 태복소경 김선석을 파견하여 각장을 혁파할 것을 간청하였다. 표문에서 말하기를, (중략) 통화 12 갑오년(994) (중략)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상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계에 당도해서 여러 성곽을 분배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공진을 안문에 파견하여 압록(鴨綠)에 구당사로 삼았습니다. (중략) 갑인년(1014)에 하천에 배를 축조하여 수로를 교통하였고, 을묘세(1015)에는 주의 성곽이 경계에 편입되어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1055)에는 궁구를 설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병신(1056)에 요구를 허락하고 옥사를 훼철하였습니다. (중략) 또 임인년(1062)에 의선군(義宣軍)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므로, 항의하였더니 수리 시설을 혁파하였습니다. 갑인세(1074)에 정융성의 북쪽에서 탐색·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중략) 하물며 오늘에 미쳐 새로운 시장을 경영하려고 하니, (하략)

 

<<동문선>> 48 狀 (朴寅亮) 入遼乞罷??狀
1-3-1 (전략) 또 통화 13년(995) (중략)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와서 논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계에 당도해서 여러 성곽을 분배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공진을 선발·파견하고,압록수()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갑인년에 뜬다리를 축조하여 수로를 교통하였고, 을묘년에는 경계를 넘어 축성해서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년에는 궁구를 설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갑신년에 미천한 자를 허락하여 옥사를 훼철하였습니다. (중략) 또 임인년에 선의군(宣義軍)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므로, 항의하였더니 경영 공사가 혁파되었습니다. 갑인년에 정융성의 북쪽에서 탐색·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중략) 하물며 오늘에 미쳐 새로운 시장을 경영하려고 하니, (하략)


<<新唐書>>220 열전145 동이 고려
1-4 (전략) 마자수는 말갈 백산에서 나오며 모양이 오리머리와 같다고 하여 압록수()라고 부르는데, 국내성을 지나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수하고, 또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써 사람들을 건네주니, 기인해서 믿고 요새로 여긴다.

 

<<고려사절요>>2 예종2 예종 12년(1117) 3월 3일
1-2-1 김연이 긴급 상주하였다. “금 병사가 요의 개주(開州)를 공격·탈취하고, 내원성을 습격하였으며, 대부(大夫)·걸타(乞打)·유백(柳白)의 3군영을 정복하고 전함을 전소시켰습니다. 통군 야율령이 내원성자사 상효온 등과 더불어 그 대중을 인솔하고 선박 140척에 적재하여 강어귀에 나와 정박하였으며, 우리 영덕성에 통첩을 발송하여, 내원·포주 두 성곽을 우리에게 귀속시키고, 마침내 바다에 떠서 도망갔습니다. 우리 병사가 그 성곽에 들어가 무기 및 화폐·곡물을 수습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주를 고쳐 의주방어사로 삼았으며, 압강(鴨江)을 경계로 삼아 관방을 설치하였다. 백관이 표문을 올려 경하하고, 두 성곽을 회복하였다.

 

<<고려사>>82 지36 병2 성보 예종 12년(1117)
1-2-2 12년에 의주(義州)에 축성하였다. 865칸이고, 문이 다섯이며, 성머리가 열일곱이고, 차단성곽이 일곱이었다.

 

<<동문선>> 19 七言絶句 鴨江西岸 望統軍峯 (김극기)
명종 23(1193) 경
1-2-3 용만(龍灣)이 감아 도는 곳 보주성을,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아 눈이 다시 밝아지니. 진귀한 통군봉 한 송이를, 강을 사이에 두고 달려가 웃으며 서로 맞이하네.

 

<<元史>>149 列傳36 耶律留哥 고려 고종 6년(1219) 봄
1-2-4 병자에 걸노(乞奴)·금산(金山)·청구(?狗)·통고여(統古與) 등이 야사불(耶?不)을 추대하여 징주(澄州)에서 황제 호칭을 참칭하여 국호를 요(遼)라고 하고 연호를 천위(天威)라고 고쳤다. 유가(留哥)의 형 독랄(獨剌)을 평장으로 삼고, 백관을 설치하였다. 바야흐로 한 달이 지나 그 원수 청구가 반란하여 금에 귀속하고, 야사불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승상 걸로를 추대하여 국가를 감리하고 , 그 행원수 아아(鴉兒)와 더불어 병사·인민을 나누어 좌우익으로 삼아, 개(開)·보주(保州) 관문에 주둔하였다. (하략)

 

<<遼史>>36 志6 兵衛志下
1-5 변경의 파수병. 또 고려의 <대요사적(大遼事跡)>을 수집하였는데, 동쪽 경계의 파수병으로써 고려·여직 등 국가를 대비함을 수록하였다. 그 국가 수비 규모를 보아, 분포·설치가 간명·긴요하다. 하나를 들어 세 변방을 알 수 있다. 동경에서 압록(鴨?)서북봉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황룡부(黃龍府)의 정병(正兵)이 5천이고, 함주(咸州)의 정병이 1천이다. 동경에서 여직의 경계를 따라 압록강(鴨?江)까지 군사초소가 무릇 70개인데, 각각 수비 군사가 20인으로, 합계 정병이 1천 4백인이다. 내원성(來遠城) 선의군영(宣義軍營)이 여덟개인데, 태자영(太子營)에 정병이 3백이고, 대영(大營)에 정병이 6백이며, 포주영(蒲州營)에 정병이 2백이고, 신영(新營)에 정병이 5백이며, 가타영(加陀營)에 정병이 3백이고, 왕해성(王海城)에 정병이 3백이며, 유백영(柳白營)에 정병이 4백이고, 옥야영(沃野營)에 정병이 1천이다. 신호군성(神虎軍城)의 정병이 1만이다. 대강(大康) 10년(1084)에 설치하였다. 이상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 2천이다.

 

 

1084년 요 변경 파수병 현황

 

 

 

 

 

<<遼史>> 38 志8 地理志 2 東京道
현종 1년(1010) 5월 28일)
1-6 보주 선의군절도. 고려가 주를 설치하였다. 예전 현이 하나인데, 내원이라고 한다. 성종(聖宗)이 고려왕 순(詢)이 멋대로 즉위하였으므로 죄를 물었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정리
압록강(鴨?江)변 보주는 고려가 설치하여 거란(요)과 국경으로 삼았고, 현종 6년(1015) 경 요에서 침범하여 선의군절도에 소속시키고 있다가, 예종 12년(1117) 다시 고려에 귀속되면서, 후방 방어거점인 압록강(鴨綠江)변 의주에 축성하여 의주방어사 소속으로 개편한 것

 


도1. 국경선 압록강(鴨江)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12년(993) 10월, <<고려사>>94 열전7 서희 동년
2-6 동10월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삼았으며,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계에 주둔하여 거란을 방어하였다. 윤월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전진하여 안북부에 머물렀다. 거란 소손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을 공격하여 우리 선봉군 사신 급사중 윤서안 등을 포획하였음을 듣고 왕이 전진하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중략) 희가 말하였다. “아니다. 우리나라야말로 바로 고구려가 고국이다. 그러므로 고려라고 호칭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약 토지 경계를 논한다면 위쪽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국경에 있는데, 어찌 침탈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鴨綠江) 내외 역시 우리 국경 안이다.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훔쳐 근거하며 완악하고 교활하니, 도로가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외교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축출하게 해서 우리 옛 땅을 환속시키고 성곽을 축조하여 도로를 통하면 감히 수호하지 않겠는가.


<<遼史>>13 本紀13 聖宗4 統和十一年正月
2-6-1 고려왕 치(治)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여직(女直)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115 列傳45 二國外記 高麗 (統和)
2-6-2 11년 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조서로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拾遺>>7 本紀13 聖宗4 (統和))
2-6-3 11년 춘3월 고려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여 사죄하였다. 여진(女眞)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彙編>>4 補遼史交聘表2 統和十一年癸丑[淳化四年]
2-6-4 3월 병오 고려왕 치가 예폐사 시중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조서로 여진(女眞) 압록강(鴨綠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였다.(하략)

 

<<遼史彙編>>7 遼史紀事本末7 征撫高麗
2-6-5 (성종 통화) 11년 춘3월 고려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 사죄하였다. 조서로 압록강(鴨綠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이본 상고. <<통감집람>>에 이르기를, 강은 길림 오라 남쪽에 있는데, 수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조선과 분계선이 되고, 봉황성 동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통전에서 이르는 바로 예전의 마채수(馬砦水)이다. 고려가 이것을 믿고 천혜의 요새로 삼는다.(하략)

 

(<<고려사>>3 세가 3 성종13년(994) 2월,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동년 동월, <<遼史拾遺>>7 본기13 성종4 (통화12년 춘3월))
2-7 13년 춘2월 소손녕이 문서를 보내 말하였다. “(전략) 압강(鴨江) 서쪽 마을에 계획하여 다섯 성곽을 창건·축조하려고 하며, 3월 초를 선택하여 축성 지역에 도착해서 수축을 시작하려고 하오. 엎드려 요청하건대, 대왕께서 미리 먼저 지휘하여 안북부에서 압강(鴨江) 동쪽까지 합계 2백 80리에 적당한 전지를 답사하고 지리 원근을 참작해서 아울러 축성하게 하고 작업 인부를 파견해서 동시에 착공하며, 그 합당한 축성 숫자는 조속히 회신하시오.(하략)

 

<<고려사>>3 세가3 성종 13년(994), <<고려사>>77 지31 백관2 외직 구당, <<고려사>>94 열전7 하공진,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동년
2-8 이승건(李承健)을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로 삼았다. 곧 하공진(河拱辰)을 파견하여 대신하였다.

 

<<고려사>>4 세가4 현종1 현종1년(1010) 11월 16일
2-11 신묘에 거란군주가 보병·기병 40만을 스스로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遼史>>15 본기15 성종6 통화28년(1010)
2-11-3 11월 을유에 대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 강조(康兆)가 항거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후퇴하여 동주(銅州)를 보위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74 진종 대중상부3년(1010) 11월
2-11-9 처음에 고려왕 송이 죽고, 그 동생 순이 국가사무를 임시로 통령하였다. 일찍이 여섯 성곽을 경계 상에 축조하였는데, 흥주, 철주, 통주, 용주, 귀주, 곽주라고 하였다. 거란이 자기에게 배반하였다고 여기고, 사신을 파견하여 여섯 성곽을 요구하였으나, 순이 허락하지 않았다. 거란이 마침내 거병하여 성곽 아래에 갑자기 도착해서 궁실을 분탕하고 거주민을 표략하였다. 순이 승·나주로 옮겨 피하였다. 군대가 후퇴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화평을 요청하였다. 거란이 견결하게 여섯 성곽을 언급하였다. 순이 즉시 군사를 발동하여 여섯 성곽을 수비하였다. 이에 미쳐 거란이 또 대규모로 와서 정벌하였다. 순이 여진과 연합하여 항거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중략) 고려가 또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성곽을 축조하고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바라보며 강을 걸쳐 다리로 삼았으며, 복병으로써 새 성곽을 고수하였다. (하략)

 

<<遼史彙編>>4 보요사교빙표2
2-13-2 개태 원년 임자(대중상부 5년, 1012) 8월 기미 고려왕 순이 형부시랑 전공지를 파견해 와 안부를 물었다. 또 표문을 받들고 질병을 핑계로 조회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서로 다시 흥화·통·용·철·곽·귀 등 6주 지역을 탈취하였다.

 

<<遼史>>15 본기 15 성종6 개태3년(1014), <<遼史>>115, 열전45 이국외기 고려 (개태3년) 5월
2-15 이해 여름 조서로 국구 상온 소적렬, 동경유수 야율단석 등에게 고려를 토벌하게 하여, 압록강(鴨江)에 뜬다리를 축조하고, 보·선의·정원 등 주에 축성하였다.

 

<<고려사>>4 세가4 현종1 현종6년(1015) 1월,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동년 동월 을묘(20)일, <<遼史拾遺>>8 본기 15 성종6(개태) 4년 춘정월 임인 東征 이하, <<遼史彙編>>7 요사기사본말7 정무고려 개태4년 하4월, <<續資治通鑑長編>>85 진종 대중상부8년 11월 계유
2-16 6년 춘정월 거란이 다리를 압록강(鴨綠江)에 제작하여, 다리를 끼고서 동·서 성곽을 축조하였다. 장수를 파견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사>>94 열전7 최사위, <<고려사>>94 열전7 곽원 현종20년,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현종20년(1029) 11월
2-18 거란 동경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반란하여 자칭 흥요국이라고 하였다. 형부상서 곽원(郭元)이 기회를 타 압강(鴨江) 동쪽 언덕을 탈취하기를 청원하였다. 사위(士威)와 서눌(徐訥) 등이 상서해서 부당하다고 하였다. 원이 고집하여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사>>5 세가5 덕종0(1031), <<고려사>>94 열전7 왕가도,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2-19 공부낭중 유교(柳喬)를 파견하여 거란에 가서 장례에 참석하고, 김행공(金行恭)이 즉위를 축하하였다. 표문으로 압록(鴨綠) 성곽·교량을 훼철하고, 억류된 우리 사신을 귀환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도2. 사서에 기록된 강동6주 추정지

 


도3. 현 역사학계의 강동6주 위치